딸기가 보는 세상/인샤알라, 중동이슬람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이젤딘 아부엘아이시와 만나다

딸기21 2013. 5. 2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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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아이들과 단란하게 살아가던 집에 포탄이 떨어진다. 목숨과도 같던 사랑스런 딸들은 ‘조각난 몸뚱이’가 되어 방 안에 흩어졌다. 목이 달아난 딸들의 몸, 잘린 손발을 발견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이 아버지는 그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자식들을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낸’ 자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그렇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난민촌 의사로, 이스라엘군 공습에 세 딸을 잃은 이젤딘 아부엘아이시(58·사진)가 그 사람이다. 


삶을 파괴당한 뒤 오히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팔 평화공존 운동에 나선 아부엘아이시는 “전쟁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서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서울을 찾은 그를 20일 만났다. 악수를 하려고 내민 그의 손을 붙들고 나는 "당신 책을 보면서 울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 책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이니 그걸 읽고 우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면서 웃었다.


그는 “남북한이 갈라져 긴장상태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팔 분쟁은 머나먼 남의 나라 일이 아닐 것”이라며 ‘비극이고 전쟁이었던’ 인생에서 희망을 찾아온 자신의 인생을 얘기했다.



아부엘아이시는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자랐다. 인구 170만명,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가자는 그 자체가 거대한 난민촌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자는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이 곳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델릴라가 삼손의 머리칼을 잘라낸 곳이 오늘날의 가자지구”라고 소개했다. 그의 집안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전후해 터잡고 살던 곳에서 가자지구로 옮겨갔고, 그 후로 60년 이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영구적인 난민’이 됐다.


자발리야 난민촌에서 보낸 그의 어린 시절은 전후의 힘겨운 삶을 살아낸 한국의 옛 세대들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는 “구호기구에서 준 ‘멜빵바지’를 처음 보고 어떻게 입고벗나 고민한 적도 있다”며 “유엔이 주는 우유배급표를 모아 우유를 받아 팔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지우개를 잃어버릴까 실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며 글을 배운 그의 꿈은 “교육을 잘 받아 난민촌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집 잃고 땅 잃은 부모도 9남매의 장남인 그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부모의 바람대로 공부를 잘 해 이집트에 유학한 뒤 의사가 됐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은 여전히 대가족 중심이고, 그도 여덟 남매를 뒀다. 하지만 성공적인 듯했던 그의 삶에 2008년부터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내 나디아가 급성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이자 불임치료 전문가인 그는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병원을 오가며 일하고 있었다. 아픈 아내를 이스라엘의 병원으로 옮기고, 숨진 아내의 주검을 다시 집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그는 ‘검문소의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운명을 맡겨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절감했다. “없어도 그만인 그림자 같은, 최소한의 존엄도 없는 존재로 취급당하는 모멸감”을 겪으며 아내를 떠나보냈다.



2009년 1월 16일,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있었다. 아내가 숨진 지 몇달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스라엘 친구가 많은 팔레스타인 의사였기에, 이스라엘 방송에 매일 전화로 가자지구의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의 참상을 자국민들에게 감추려 했지만 진보적인 유대인 저널리스트 슐로미 엘다르는 아부엘아이시의 목소리를 TV에 내보내며 전쟁 소식들을 전했다. 


공습으로 아부엘아이시의 세 딸이 숨진 직후에도 전화는 연결됐다. 고통에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가 이스라엘에서 전파를 탔고, 유튜브를 통해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의 호소는 가자 침공의 참상을 알리는 상징이 됐다.


4년이 지났지만 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처지를 한탄하며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지만 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보복과 응징 대신 공존을 믿지만 왜 딸들은 죽고 나는 살아남았는지 궁금할 때가 종종 있다.”

 

책에는 '그 날'의 풍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 글 앞머리에 올린, 산산조각난 딸들의 몸과 그 방의 풍경이. 그걸 눈으로 보고도 어떻게 "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처음엔 '증오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책 제목을 보고 화가 났다. 왜 증오하지 않는가? 그런 짓을 당하면서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당신이 힘 없는 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마도 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같은 것으로 혼동했나보다. 아부엘아이시를 만났을 때,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얼마나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었으니 다른 이들도 다 (증오를 극복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부엘아이시의 책에 당시의 감정에 대한 설명이 한 구절 나와 있다. 딸들이 희생된 뒤 자신 앞에은 '어둠(증오)의 길과 빛(용서와 공존)의 길' 둘 중 하나로의 선택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를 증오가 아닌 평화의 전달자로 일으켜세운 것은 역설적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부상을 입은 채 살아남은 다른 자식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의사들이 도와줬다. 팔레스타인 테러로 딸을 잃은 이스라엘 아버지를 만나 마음을 나눈 경험도 있었다. 실상 이스라엘에도, 아부엘아이시처럼 '화해하고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다. 그들이 다수라고 할 수는 없어도, 아예 없지는 않다. 팔레스타인이 약하다보니 용서와 화해를 강요받는 것 아닌가, 하는 내 속좁은 의문은 거둬두기로 했다.


물론 딸들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에게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교류해온 경험이 있었다. 어릴 때 돈을 벌려고 유대인 농가에서 일했던 경험, 훗날 의사가 되어 찾아갔더니 그 농가 주인들이 아들처럼 따뜻하게 맞아주더라는 경험, 의사인 그가 불임치료 연구를 하고 석사,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이스라엘 의사들과의 만남 등등.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나눈 경험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유독 그만의 경험이라 할 수는 없다. 유대인(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유사 이래로 그 곳에서 공존해왔고, 지금도 실상 경제적으로 서로 얽매여 있는 처지다. 정치인들이나 군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교류는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이스라엘을 향해 “안전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호소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아들딸을 보며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잘 생각하라”고 말한다. 보복의 악순환으로는 아무것도 풀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코소보, 남아프리카공화국, 북아일랜드 분쟁이 모두 풀렸다”며 “중동 분쟁이라고 해법이 없을 리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의사다. 환자가 낫지 않으면 잠시 치료를 멈추고 환자의 상태를 다시 살피고, 치료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게 의사의 일이며,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다.”


생전의 세 딸의 모습. 사진 daughtersforlife.com 


 

그래서 그는 2010년 ‘생명의 딸들(Daughters for Life)’이라는 재단을 만들었다. 숨져간 세 딸, 베싼, 마야르, 아야를 기리며 팔레스타인 여성 교육과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는 재단이다. 


분쟁의 와중에도 두 나라 사이엔 풀뿌리 연대운동이 조금씩 퍼지고 있다. 평화캠프나 여름학교, 평화의 전화, 교육·의료 프로그램이 활발히 이뤄진다. 아랍계와 유대계가 함께 하는 농구 리그도 있다. 아부엘아이시는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여성에게 주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 지위향상은 팔레스타인 안에서도 민감한 주제이지만 그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평화를 앞당기는 길이라 믿는다. 


그는 “여성들을 가르치고 평화에 앞장서도록 하는 것이 내 딸들을 다시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팔 공존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노력으로, 그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고 싶을 뿐이다. 벨기에 정부는 2010년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아부엘아이시는 2009년 여름 아이들과 캐나다로 이주, 터론토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영구 이주는 아니며 가자지구로 조만간 돌아갈 예정이다. 아이들은 가자로 돌아가고 싶어하는지 물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에게도 엄청난 트라우마가 남아있을 터이니 말이다. "아이들 뜻은 아직 모르겠지만, 존중해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자로 돌아가는 시기를, 아이들이 원하는 시기에 맞추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자로 돌아가는 것은 그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분쟁이 벌어지는 바로 그 사회(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자가 그에게는 "대가족이 남아있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국방문에서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한신대학교,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등을 방문해 의료관계자와 독자들을 만난다. 1시간 반 정도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나는 "팔레스타인에 꼭 가보고 싶은데 아직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8월에 가자지구로 돌아가 잠시 체류할 예정이니 혹시 올 수 있다면 꼭 방문해달라"고 했다. 그럴 기회가 과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겪은 일은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증오와 불의의 하나일 뿐”이라며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분쟁의 현실을 이해함으로써 해줘야 할 역할들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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