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민주주의거든
다카하시 겐이치로. 조홍민 옮김. 글항아리
2011년 3.11 대지진을 겪고 난 뒤에 저자가 아사히신문에 쓴 논평을 모아놨다. 이 사람 저 사람의 글, 이 책 저 책, 이런 영화 저런 다큐를 다 인용하고 있어서 좀 정신이 없긴 하지만 구구절절이 밑줄 그은 데가 많았다. 책의 물리적인 무게는 가볍지만 글들이 모두 재미있었다.
글쓴이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소설가이자 평론가다. 그가 인용하고 언급한 것들은 여러 장르를 전방위로 휩쓴다. 무엇보다 다카하시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의 작가다. 이 책은 명성을 들었을 뿐 읽어보지는 못했다. 이 평론집을 읽고 나니, 다카하시의 책들과 함께 좀 읽어봐야겠다 싶은 책들의 목록이 늘어났다.
책은 지진이 일본에 던진 충격으로 시작해, 거기서 비롯된 성찰을 쭉 펼쳐나간다. 학술 논문도 아니고 신문의 칼럼들을 모은 것이다보니 한 주제를 파고들기보다는, 거대한 사건이 일으킨 잔물결을 따라가는 쪽에 가깝다. 그러나 이렇게 화두를 던지고, 잔물결을 살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닐까. 저자는 이런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고 가다듬는 과정이며,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지진을 둘러싸고 나오는 수많은 말에는 몇 가지 분명한 특징이 있는 듯했다. 하나는 이 지진을 66년 전의 패전과 비교하는 것이다. 3.11이라고 하는 엄청난 ‘낙하’는 일본인이 잊고 있었던 과거 기억의 봉인을 푼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제2의) ‘전후’가 아니라 (제2의?) ‘전쟁 중’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있는 ‘전쟁’이란 무엇일까? (11~12쪽)
기노시타 다케오는 원전사고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노동조합 때문이라고 썼다. 노사 유착으로 인해 “감시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면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1950년대에 일어난 민간 대기업의 쟁의에서 산업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측은 패배했다. 그 결과 “노동자는 기업마다 횡으로 나뉘었고, 이어 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위로 상승하는 경쟁 시스템이 짜여졌다.” ‘노동자’가 ‘회사원’이 된 것이다. 기노시타는 도쿄전력의 한 사원이 “폐기물 처리는 피폭량이 많기 때문에 하청을 주는 게 좋겠다”고 한 말을 듣고 ‘기업적 통합’의 종착점을 보았다고 한다.
원전은 다양한 ‘피폭노동’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일 하나가 정기 점검 중에 하는 청소 작업이다. 이를 담당하는 하청 작업자는 농촌과 도시의 슬럼에서 동원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모습은 전력 소비지대인 도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19쪽)
마루야마 히토시는 포스트 3.11의 키워드로 ‘슬로라이프 정치’를 제창하고 있다. 투표 중심의 의회민주주의는 결국 얼마든지 속도를 올릴 수 있는 ‘패스트 민주주의’로 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의견은 깊은 사려를 통해, 또 다른 사람과의 진지한 토의를 통해서야 비로소 확고한 것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숙의민주주의(느린 민주주의)’라고 마루야마는 말한다. 원자력발전의 행방과 같이 우리 운명에 직접 관계되는 일을 극소수의 원전 마피아들에게 맡기지 않고 문민통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 마루야마는 이를 위해 정치적 입장을 뛰어넘는 ‘대화’를 ‘느린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23쪽)
인간은 논리로 세계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않다. 논리야말로 공동체를 닫아버릴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외부를 이해하는 별개의 원리를 필요로 한다. 그 탐구 끝에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깊은 생각과 충분한 논의’가 닫아버리는 소우주의 외부에 ‘연민의 바다’가 펼쳐지고, 네트워크와 동물성을 통해 임의의 공감이 여기저기서 발화하는 그러한 모델이다. (44쪽)
우에노 지즈코는 <케어의 사회학>에서 보살핌의 대상이 되는 다양한 약자들의 운명이야말로 앞으로의 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공조’ 사상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시장은 모든 지역을 커버하지 않고, 가족은 완전하지 못하다. 국가에는 한계가 있다.” 고령자나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들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개인을 기초로 한 완전히 새로운 공동성의 영역일 것이라고 우에노는 말한다. (37쪽)
건축가 겸 작가 사카구치 교헤이의 <독립국가를 만드는 방법>을 읽었다. 사카구치는 지난해 구마모토에 독립국을 만들어 그 나라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고 썼다. 사카구치는 이상한 사람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많은 젊은이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던가. 사카모토 료마 같은 사람 말이다.
헌법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지켜야’ 하거나 ‘개정해야’ 하는 것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있다. 바로 ‘제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다. ‘헌법’을 만든다는 것은 지금의 일본과는 다른 새로운 일본을 구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국적을 갖지 않은 일본 거주 외국인도 ‘주민’이라는 새로운 입장에서 정치에 전면 참가할 수 있다. ‘국민’과 ‘주민’을 똑같이 인정하는 그 나라는 외국인을 국회의원으로 뽑을 수 있을 정도로 개방적이 된다. (73쪽)
의심 많은 사람은 ‘시위로 사회가 변화할까’라고 묻는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답한다. “시위로 사회는 변한다. 왜냐하면 시위하는 것을 통해 ‘사람들이 시위를 하는 사회’로 바뀌기 때문이다.” 가라타니는 질문자가 상정하고 있는 답변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시위로 사회가 변할까’라고 묻는 이유는 ‘그것으로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대의제 민주주의 사회니까, 그 사회를 바꾸는 일은 선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78쪽)
마고사키 우케루 전 외무성 국제정보국장은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도 미국이 센카쿠를 지켜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센카쿠 열도는 예전부터 일본의 영토’라고 하는 전제에는 근거가 없다고도 한다. 마고사키는 영토 문제에 관해서는 전문가 중에서도 전문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패전 후 독일은 방대한 국토를 상실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암초가 아니었다.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사는 토지를 잃었다. 그러나 “독일은 역사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냈다.” “잃은 것은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유럽의 일원이 되어 지도적 입장을 쟁취하기로” 했다고 마고사키는 지적한다. (81쪽)
‘중의원 선거 도쿄 제25구의 후보자를 만나고 질문할 수 있는지 해보았다’라는 동영상을 보는데, 도중에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지려 했기 때문이다.
소심해 보이는 청년의 목소리, 거절당하고 만 후에 느껴지는 허무함. 어느 사무소 직원은 ‘언론이 아니니까’라며 거절의 이유를 차갑게 내뱉는다. 그래도 청년은 마음을 다잡고 또 다른 사무소를 홀로 방문한다.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은 갑자기 이 청년이 부딪히고 튕겨나가는 ‘벽’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실은 우리 모두가 그 벽에 부딪혀 튕겨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느끼게 된다.
미나마타병 4총사는 미나마타병과 반세기에 걸쳐 싸워온 의사 하라다 마사즈미, 사진작가인 구와하라 시세이, 환경과학자인 우이 준, 작가인 이시무레 미치코다. 그들은 원래 일면식도 없었다. 경력도, 전문 분야도 달랐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같았다. 이시무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분하지만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다 해도 기록해두자.”
‘벽’을 앞에 두고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가 처한 곳에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기록하려 했던 것이다. 왜? 언젠가, 미래의 누군가가 그것을 읽는 게 그들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냈다. (103~104쪽)
대만 학생들의 입법원 점거가 시작된 지 20일이 지나고 학생들의 피로가 한계에 달했을 즈음 입법원장으로부터 매력적인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단상에 올라가 “철수 여부에 대해 간부들의 의견만으로 정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후 학생들의 리더가 취한 행동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는 하루 꼬박 걸려 점거 농성에 참가한 학생들의 의견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물어봤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리더는 타협안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정식으로 표명했다. 그러자 전날 단상 위에 올라갔던 학생이 다시 한번 발언했다. “개인적으로는 철수 방침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제 의견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그 뒤 학생들은 이틀에 걸쳐 의회 구석구석을 청소한 뒤 운동의 상징이 된 해바라기를 한 송이씩 손에 들고 조용히 입법원을 떠났다.
학생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민주주의란 의견을 관철시키지 못한 소수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마워요”라고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사고방식이었다. (165쪽)
책장을 덮고 나니 펼쳐봐야 할 책들이 여럿 생겼다. 사놓고 읽지 않은 나오미 클레인의 <쇼크 독트린>, 어느 새 유행이 지나버린 느낌마저 드는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진 샤프의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그리고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 언제 다 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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