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에리코 말라테스타, '국가 없는 사회'

딸기21 2016. 4. 1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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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좀 편하게 먹고 싶은데. 분명 우리 사회에는 기아, 무지, 전쟁, 범죄, 전염병, 끔찍한 재난 같은 많은 악이 있어. 그래서 어쨌는데? 왜 네가 관심을 갖는 거지?"


질문의 마지막 문장을 "왜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지?"라고 바꾼다면, 저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에리코 말라테스타의 <국가 없는 사회>(하승우 옮김. 포도밭)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의 부제는 '카페에서 만난 어느 아나키스트와의 대화'다. 조르조라는 이름의 사회주의자가 치안판사, 카페 주인, 돈 많은 부르주아, 노동자,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등 여러 사람들과 카페에서 만나 아나키즘을 설파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짧고 선명한 책이라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펼쳐들고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다. 


말라테스타는 1853년 생이고 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역자 후기에서는 2년 전의 세월호 사건을 언급한다. 대체 정부는 왜 필요하며, 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사건. 공교롭게도 내일은 4월 16일이다. 어제오늘 계속 세월호와 관련된 뉴스들을 접하면서 마음이 무겁고 눈 앞이 뿌옇다. 이런 날 아나키즘에 대해 읽는 게 내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굳이 세월호를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지도 모르겠다. 글머리에 옮겨놓은 것은 책 중에서 '유식한 부르주아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나오는 프로스페로의 말이다. 빈곤의 나락에 빠진 사람들,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고 나서 슬그머니 마음 속에 고개를 내미는 질문이 저것이다. 좀 편하게 살자, 세상에 나쁜 일이 한두 가지니. 그래서 어쨌는데, 왜 네가(내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냐고.


이 책이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답은 사실 다 알고 있지만 무력감이 느껴질 때, 세상 모든 고통 중에 내가 짊어질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회의가 들 때에 터져나오는 생각일 뿐이다. 


프로스페로는 또 말한다. 


"내 마음도 아프다고. 마음이 아프다니깐. 그런데 심각한 사회문제들은 감정으로 해결되지 않아. 자연법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위대한 연설이나 눈물을 흘리는 감상으로는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할 수도 없어. 현명한 사람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무의미한 꿈을 좇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지." (17쪽)


그러나 프로스페로의 말은 거짓이다. 세상은 '감정'을 지닌 사람들, 자연법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 위대한 연설을 하는 사람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눈물을 흘리는 감상'을 전파하는 사람들, 운명을 거부하고 무의미해 보일지언정 꿈을 좇는 사람들이 만든다. 


치안판사 암부로조(암브로조인데 번역을 '암부로조'라고 해놨네)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자의 고통을 가능한 많이 덜어주고 싶다면, 그들에게 운명을 받아들이고 따르라고 말하시오. 왜냐하면 참된 행복은 만족에 있으니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있어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반드시 부유하게 사는 사람은 아니란 말이오." (46쪽)


권력의 시스템, 법의 강제력을 상징하는 자는 이렇게 '마음의 행복'을 설파한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한다. 나쁜 일은 '자연적으로' 일어난다고.


"인류를 괴롭히는 건 빈곤만이 아니라 전염병과 콜레라, 지진 등도 있어요. 당신이 그런 자연에 맞서 혁명을 지휘하고 싶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죠. 나쁜 일은 자연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이니까요." (33쪽)


암부로조의 말도 거짓이다. 나쁜 일은 자연적으로 일어나지만 그걸 더 나쁜 일, 가장 나쁜 일로 만드는 것은 잘못된 제도와 권력이다. "세월호는 교통사고였다"는 말이 왜 나쁜 말인지 우리는 안다.


역시나 역설적이게도, 법이 이름을 한 암부로조는 "인간의 의지나 능력보다 우월한 원리들,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몇 가지 윤리적인 원리들, 어떤 도덕 같은 것"을 주장한다. 아나키스트 조르조는 이렇게 맞받아친다. 


"인간의 의지보다 우월한 그 도덕이란 뭘까요? 누가 그걸 정하나요? 어디서 그 도덕이 내려오나요? 도덕은 시간과 지역, 계급,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당신의 도덕은 준법, 즉 당신 계급이 누리는 특권에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이고, 우리의 도덕은 억압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모든 이의 행복을 찾으라고 요구하지요. 우리에게 모든 도덕적인 규범들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05쪽)


"내가 말하는 규범은 연대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모든 이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져야만 한다는 점을 고려한 실천적인 관습이니까요. 이 규범은 소수가 만들어서 모든 사람에게 힘으로 강요하는 법과 다르답니다. 우리는 법이 아니라 자유로운 협약을 원해요." (81쪽)


세월호에서 숨져간 아이들, 그 부모들의 대리인인 박주민 변호사가 이틀 전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누군가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뻤던 적은 없다. 유가족들이 동물인형 탈을 뒤집어쓰고 춤을 추며 선거운동을 했다고 한다. 박주민 변호사는 당선되자마자 분향소를 찾아가고 유가족들을 만났다 한다. 


누구 하나 괜찮은 사람이 의회에 진출했다고 해서 당장 뭔가가 이뤄질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없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다고 정치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아파 하는 사람과 함께 눈물 흘릴 수는 있다. 행동하는 사람을 응원할 수도 있다. 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인지, 큰 소리로 외쳐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쁘다.


아나키즘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너무 멀리(아니, 너무 조금) 흩어져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연대의 정신에 바탕을 둔 규범'을 만들어야 하며 '억압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모든 이의 행복을 찾는 도덕'을 말해야 한다는 것. 국가는 무엇이고 정부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지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국가 없는 사회를 늘 상상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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