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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의 '운전 시위', 압둘라 국왕의 개혁 시험대

딸기21 2013. 10. 2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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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의 엄마인 마이 알사위얀(32)은 26일 차를 몰고 시내에 나갔습니다. 옆자리에는 지역방송의 여성 리포터가 앉아 있었습니다. 리포터는 운전하는 알사위얀의 모습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무사히 운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알사위얀의 가족들은 환호습니했다. 다행히도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알사위얀이 살고 있는 곳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공식적으로 여성들의 운전은 물론이고 ‘남성 보호자와 동행하지 않은’ 여성들의 외출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입니다.


‘운전할 권리’를 향한 사우디 여성들의 싸움에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여성운동가이자 대학교수인 아지자 유세프 등의 주도 아래 60여명의 여성들이 이날 리야드와 제다 등 대도시에서 거리에 차를 몰고 나갔으며, 유튜브와 트위터 등에 자신들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올렸습니다. 이미 몇달 전부터 예고된 시위였습니다. 이들이 추진한 ‘10월26일 운전캠페인’ 사이트(Oct26driving.com)는 이날 해킹당했지만 지금까지 이들의 서명운동에 1만6600명이 동참했다고 알자지라방송 등은 전했습니다.


동영상을 보면, 지나가던 남성운전자들이 엄지를 올려 보여주는 모습이 잠깐 비치는군요 ㅎㅎ


내무부는 이날의 시위에 앞서 웹사이트에 “법을 어기는 자들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글을 올렸고, 내무장관인 나이프 왕자의 측근들이 몇몇 여성운동가들에게 직접 전화해 경고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트위터로 여성운전을 독려한 에만 알나프잔이라는 운동가는 지난 13일 리야드에서 운전 중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곧 석방돼, 이번 시위에 다시 참여했지만요.


사우디 여성들의 ‘운전 시위’는 1991년 리야드에서 처음 벌어졌습니다. 당시 운동을 주도한 것은 1970년대 이전에 서구식 교육의 혜택을 받고 운전면허를 딴 나이든 지식인 여성들이었습니다. (1980년대에 아랍권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호주 저널리스트 제랄딘 브룩스의 Nine Parts of Desire: The Hidden World of Islamic Women 은 사우디와 이집트, 혹은 팔레스타인 등에서 ‘나이든’ 여성들이 오히려 현대적인 여성관을 가졌던 반면 이후의 세대는 보수화된 사회 분위기와 교육권 박탈 때문에 오히려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이고 종교적인 감성에 젖어있는 현상을 잘 묘사하고 있지요.)


2005년 점진적 개혁파로 알려진 압둘라 국왕(89)이 즉위한 뒤 여성권리운동이 다소나마 활발해졌습니다. 2008년의 여성운전 허용 서명운동에는 1000명이 서명했습니다. 여성운동가 와제하 알후와이데르는 당시 자신의 운전 모습을 유튜브와 페이스북에 올려, 인터넷을 이용한 캠페인에 불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2010년 ‘여성 전용 전국 버스망을 만들겠다’는 엇나간 대응책을 내놔, 본질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2011년 제다에서는 여성운전자가 태형을 선고받아 다시 논란이 일었습니다.


여성들의 운전에 반대하는 보수파는 이슬람 성법(샤리아)을 근거로 들지만, 1300년전 형성된 이슬람 율법에 여성 운전 금지조항이 있을리 없지요. 현대에 생겨난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은 이슬람권 내에서도 각 사회의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이슬람국가에서 여성들의 운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란의 호메이니는 쿠란의 해석을 멋대로 확장하는 것을 경계해, 쿠란에 금지규정이 없으면 허용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신정국가인 이란에서도 여성들은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aljazeera.com


그런데 유독 사우디에서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이슬람 수니파 중에서도 보수적인 와하비즘의 영향과 부족문화의 잔재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우디에서도 가족이 아닌 남성과의 접촉을 엄금하고 여성운전을 공식 금지한 것은 1979년 이후였다고 합니다. 이란 이슬람혁명의 여파가 사우디까지 미칠까 두려워한 왕정이 사회통제의 고삐를 죄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이란 여성들이 1990년대 이후 사회운동의 중심에 서고 이집트 ‘아랍의 봄’ 혁명에 여성들이 나서는 사이, 사우디 여성들은 운전을 해도 되느냐 혹은 남성의 ‘보호’ 없이 외출을 해도 되느냐 등을 놓고 싸우는 처지가 됐습니다.


운전은 뭐 사실 작은 문제라고도 할 수 있지요. 본질은 여성을 ‘인격체’, 남성들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우디에서 여성들이 ‘국민’으로 인정받은 것은 2008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 해 여성들도 ‘신분증’이라는 게 생겼거든요. 신분증이 없으니, 그 전까지 여성들은 자기 이름으로 무언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호텔에 가서 자기 이름으로 방을 빌리는 것도 불가능. 하지만 어차피 외출이고 여행이고 다 마음대로 못 하니... 


사우디 여성들은 모두 ‘남성 보호자’를 둬야 합니다. 45세 이하 여성의 결혼과 이혼, 여행, 교육 등은 남성 보호자가 결정합니다. 남성 보호자의 동행 없이는 외출과 여행도 할 수 없습니다. 남성 보호자는 아버지(여성이 미혼일 때), 남편(결혼한 뒤), 아들(남편이 죽은 뒤), 오빠(아버지나 남편이나 아들이 없을 경우), 삼촌 등등 다양합니다. 나어린 아들이 ’보호자’가 되어 어머니의 인격을 통제하고 법적 권리를 가져가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지지요. ‘나무스(명예·평판)’라는 관념이 있는데, 여성의 행동이 집안의 명예에 해가 되지 않도록 남성 보호자가 통제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무스는 명예에 누를 끼친 것으로 간주되는 여성을 가족들이 살해하는 ‘명예살인’의 근거가 되곤 합니다.


국민들의 인식이나 교육수준도 주변 어떤 나라들보다 낮습니다. 심지어 사우디 여성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반여성적인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나곤 합니다. 2008년 로우다 유세프라는 여성이 사우디 여성들을 상대로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는 내 보호자가 가장 잘 안다”는 서명운동을 벌여(이런 서명운동 자체가 여성들의 각성 움직임에 따른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겠지만요) 50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고 하고요. 그보다 앞선 2006년의 조사에서는 사우디 여성 80%가 “여성은 정치적인 일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이슬람권 내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의존적인 의식구조입니다.


물론 사우디 ‘남성’들이라고 해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우디인들은 전근대적 왕정체제에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기회, 사회문화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유독 여성운전이 부각된 것은 사우디의 전근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성인권 문제는 서방의 반아랍, 반이슬람 정서를 부추기는 요인이며 사우디 여성운전 문제는 이제 국제적인 이슈가 됐습니다.


7월의 아랍뉴스(www.arabnews.com) 기사에 올라온 압둘라 국왕.
10년도 더 전의 사진 같군요. 압둘라 국왕이 이제 많이 늙어서 그런지 사진을 옛날 것으로 올리니.
사진에 달려 있는 'Custodian of the Two Holy Mosques' 는 
메카와 메디나 두 곳에 있는 신성한 모스크의 수호자, 즉 사우디 국왕의 호칭입니다.


또한 이 문제는 압둘라 국왕의 개혁의지를 가늠하는 시험대로도 여겨집니다. 압둘라 국왕은 2005년 즉위 뒤 미국 ABC방송 바버라 월터스와의 인터뷰에서 “내 어머니도 여성이고, 누이도 여성이다. 내 아내도, 딸도 여성이며 그들이 운전할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I believe strongly in the rights of women. My mother is a woman. My sister is a woman. My daughter is a woman. My wife is a woman. I believe the day will come when women will drive. In fact if you look at the areas of Saudi Arabia, the desert, and in the rural areas, you will find that women do drive. The issue will require patience. In time I believe that it will be possible. I believe that patience is a virtue.


외로운 압둘라는 즉위 뒤 사우디를 개혁하려 애썼지만 왕실 일가와 이슬람진영의 거센 반발에 번번이 부딪쳤습니다. 개혁은 너무 느리거나 좌초되기 십상이었습니다. 2011년 여성들에게 애써 참정권을 내줬지만 그 실행은 2015년으로 미뤘습니다. 올초에는 명목상의 의회인 슈라위원회에 여성 위원 30명을 임명했으나 슈라의 권한은 크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어떨까요. 외신들은 일제히 10·26 운전시위를 보도하며 사우디 왕정의 대응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례적으로 사우디 영자신문 아랍뉴스도 이 시위 사실을 보도해,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했습니다. 몇몇 여성들은 체포됐고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여성 운전자들을 물리적으로 막기도 했지만 큰 충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여성운동가들은 앞으로도 운전시위를 계속할 것이라며, 달력에 없는 날짜인 ‘11월31일’을 다음 시위의 상징적인 날짜로 정했다고 합니다. 미국 CNN방송 리야드 특파원 모함메드 잠줌은 “이제 더이상 사우디가 여성들의 운전을 막기는 힘들어 보인다”고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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