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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에게 ‘종파’는 없다” 레바논 부부의 용감한 도전

딸기21 2013. 11. 28.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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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에게는 어떤 파벌도, 종파도 없다. 순수한 아기일 뿐이다.”


종교적, 민족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레바논에서 두달 전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 이름은 가디. 겉보기엔 귀엽고 평범한 사내아기이지만 레바논에서는 ‘역사적인 아기’라 불리며 대통령의 축하인사까지 받았습니다. 이유는, 처음으로 ‘종파 없이’ 출생신고를 한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아기 엄마 콜루드 수카리에는 영어강사이고, 아빠인 니달 다르위시는 회사원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지난해 1월 레바논에서 처음으로 ‘시민 결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도 레바논에서는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역시 ‘역사적인 결혼’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시민 결혼이라고 하니 거창하게 들리는데, 그냥 공식적으로 결혼하는 것 즉 공공기관에 혼인신고를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행정기관에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를 낳아 출생신고를 하는 극히 평범한 과정이 레바논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된 것은 이 나라의 독특한 구조 때문입니다. 


수카리에와 다르위시 부부. 사진 알자지라 방송

Lebanon civil marriage raises hope for change / Aljazeera


레바논은 인구 413만명의 작은 나라이지만 국민들의 구성은 매우 복잡합니다. 민족으로 보면 아랍계가 95%에 아르메니아계(4%)등 소수민족이 나머지를 차지합니다. 언어는 공식언어인 아랍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영어, 아르메니아어가 쓰입니다. 


종교적으로는 무슬림과 기독교가 6대4의 비율이지만 여기에 ‘종파’가 끼어듭니다. 시아파와 수니파 외에도 레바논·시리아 일대에 소수 거주하는 드루즈파와 이스마일파, 주류 무슬림들이 이단시하는 알라위파와 누사이리파가 있습니다. 


기독교도의 경우도 다른 나라들에서와 달리 레바논에만 유독 존재하는 마론파와 그리스정교, 멜크가톨릭, 아르메니아정교, 시리아정교, 시리아가톨릭, 아르메니아가톨릭, 칼데아파, 콥트기독교, 개신교 등으로 갈립니다. (동방기독교라고도 불리는 '정교'는 말하자면 로마가톨릭과 갈라진 비잔틴의 후신 격인데, 나라마다 조금씩 교리와 전통이 달라 각기 그나라 정교들이 있더라고요. 레바논엔 여러 민족들이 혼재하고 있어서 여러 정교가 있는 거고요)


가디를 안고 있는 아빠 다르위시. 사진 다르위시 트위터


엄마 수카리에와 아기. 사진 수카리에 페이스북


레바논에서 ‘결혼’은 신랑신부가 속해 있는 종파(sect)의 종교법정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는 공식 절차를 가리킵니다. 레바논 법에 따르면 모든 개인이 16개 종파 중 어딘가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두 사람의 종파가 다를 때입니다. 신부인 수카리에는 이슬람 수니파, 신랑인 다르위시는 시아파였습니다. 이럴 경우 한 쪽의 종파를 따르거나, 아니면 외국으로 나가서 혼인신고를 해야 합니다. 


수카리에와 다르위시는 당초 키프로스로 가 혼인신고를 하려했다가, 레바논 인권운동가·변호사들과 만나 의논한 뒤 마음을 바꿨습니다. “레바논의 역사를 바꿔보기로” 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지난해말부터 치밀한 법정 싸움을 준비했고, 종교법정이 아닌 행정기관에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당국은 이들의 혼인신고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두 예비부부의 용감한 도전은 레바논 사회와 정계에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셸 술레이만 대통령은 “이들이 레바논의 역사를 바꾸고 있다”며 예비부부의 편을 들었습니다. 힘겨운 싸움 끝에 부부는 ‘시민 결혼 1호’로 기록됐습니다. 혼인신고가 받아들여진 것은 1년이 훨씬 지난 올 4월이었습니다.


수카리에가 트위터에 올린 가디의 출생신고서. 사진 수카리에 트위터


올 8월 부부의 아기 가디가 태어났습니다. 부부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섰습니다. 출생신고서에 의무적으로 기입하게 돼 있는 ‘종파’ 란을 비워둔 것입니다. 부부는 지난달말 트위터를 통해 아기의 출생신고서를 공개했습니다. ‘종파 없이 태어난 아기’의 사연이 레바논 언론들은 물론 알자지라방송, 이스라엘 하레츠 등 중동 언론들에 일제히 보도됐습니다.


수카리에는 27일 방송된 미국 CNN방송 인터뷰에서 “가디는 그저 레바논의 시민으로 태어났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특정 종교나 종파로 태어난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수카리에는 자신들의 혼인신고와 가디 출생신고에 대해 “더 나은 레바논을 위한 한 걸음이자 오랜 싸움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가디라는 이름은 아랍어로 ‘나의 미래’를 뜻한다고 합니다.


CNN은 이들의 도전을 계기로 오랜 종파분쟁에 시달려온 레바논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며 “종파를 기본전제로 한 법률들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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