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정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중동 불안정의 '원죄' 격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입니다. 통칭 '중동분쟁'이라 하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가리키죠. 사실상 이스라엘이 서방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고 때리고 죽이는 것이니 '분쟁'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만. 그간의 일들을 연대 순으로 살펴봅니다.
열강에 의해 결정된 '유대국가 수립'
1917
발단은 영국의 이른바 '밸푸어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는 당연히 팔레스타인 사람들(!) 즉 아랍계 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만, 영국은 자기네가 점령하고 있던 이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게 해주겠다고 유대인들과 약속을 합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 등 동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귀환'이 시작된 바 있죠. 2000년 전 자기네들이 살았다고 주장하던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소위 '귀환' 때문에 시끄럽던 차였습니다.)
1920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따라 일부 지역을 위임통치 지역으로 만들고, 그 외 아랍 지역에는 '요르단 왕국'을 세우기로 합니다. 다만 요르단도 영국의 보호령으로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1929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겠다는 유대계 이주자들과, 원주민들인 아랍계 주민들 간 유혈충돌이 일어납니다.
(훗날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령,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땅이 됩니다만 이스라엘이 끝내 무력 점령해버리죠. 지금도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하에 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귀속문제'라는 겁니다)
1936
나치를 피해 독일 유대인들의 팔 이주가 늘어나면서 역내 유대인 인구비율은 8%에서 30%로 급등합니다.
1939
2차 세계대전(유럽전선) 발발. 영국은 아랍계 지원을 얻기 위해 '유대 독립국가 건설을 유보한다'는 입장을 발표합니다.
알 나크바, 이스라엘의 건국
1946
강경파 시오니스트 메나헴 베긴(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되죠)이 이끄는 유대 테러집단 이르군이 예루살렘 시내 다윗호텔에 차려져있던 팔레스타인 영국 위임통치당국을 공격해 91명이 사망합니다.
1947
1948
이스라엘이 마침내 정부수립을 선언합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건국', 팔레스타인인들 입장에선 '알 나크바(대재앙).' 이스라엘은 유엔이 중동분할계획에서 아랍계 영토로 정해놓은 지역까지 공격, 점령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내쫓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에는 거대한 팔 난민촌이 형성돼 수십년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팔레스타인 땅인 가자지구는 그 자체로 거대한 난민촌이라 할 수 있는데요. 오늘날의 이스라엘 땅에 살던 이들이 이집트 국경에 맞댄 가자라는 좁은 땅으로 쫓겨나 엄청난 인구밀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죠. 이제 그들은 한번도 '아버지의 고향'에서 살아보지 못한, '난민 2세대, 3세대'가 대부분이 되었겠지만요.)
1949
1950
팔 난민 96만명이 유엔 구호캠프에 등록됩니다. 이로써 난민촌 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됩니다.
1956
[구정은의 '수상한 GPS']이 운하가 막히면? 이집트의 무기, 수에즈
1957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철수하고, 가자지구는 유엔 통치령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1964
아랍연맹의 지원 하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창설됩니다.
1967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점령과 6일 전쟁(3차 중동전쟁)
1968
PLO의 투쟁과 오슬로 평화협정
1969
1970
(참고로... 요르단은 나라도 크지 않고 변변한 자원도 없는 나라입니다. 후세인의 통치시절 개인적 역량에 크게 의존했더랬죠. 후세인 국왕은 이른바 '줄타기 외교'의 달인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들을 억압하고, 이스라엘과 협상하고, 그러면서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내는. 그렇다면 요르단 국민들에겐 '좋은 국왕'이었던 것으로 보이죠? 실제로 지금도 요르단에서는 후세인을 칭송하는 이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후세인이 숨졌을 때 빌 클린턴이니 누구니, 세계 쟁쟁한 지도자들이 발벗고 달려와 조문한 것도 그의 외교력을 방증했달까요. 문제는, 요르단에서 '팔 난민들을 탄압한다'라는 것의 의미입니다. 요르단은 국민의 55% 이상이 팔레스타인계거든요. 과거엔 한 나라 한 민족이었으니까요. 심지어 후세인을 계승한 압둘라2세 국왕의 왕비인 라니아도 팔레스타인계입니다.)
1971
가자지구 난민촌 지도자 셰이크 아흐마드 야신(아래 사진)이 PLO의 세속적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나섭니다. 여러 신체적 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아버지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야신은 훗날 가자지구에서 무장정치조직 '하마스'를 창설하죠. 그리고 2004년 이스라엘의 표적암살로 무참히 살해됩니다.
1972
1973
1974
"지금 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를,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다. 내 손이 올리브 가지를 놓지 않게 해 달라"
1975
(이로써 레바논 내전이 벌어지고, 이스라엘-시리아의 개입으로 이어집니다. 레바논 땅에서 사실상 대리전이 벌어진 거죠. 30년 가까이 레바논은 사실상 시리아의 점령하에 들어갑니다. 이 관계는 2004년 레바논의 '백향목 혁명'에 와서야 끝나죠. '백향목 혁명'은, 시리아 사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괴한들이 탈 시리아 노선을 추진했던 라피크 하리리 전총리를 암살한데 대해 국민들이 분노하고 나서면서 촉발됐습니다. 혁명 뒤 2년여에 걸쳐 시리아군은 레바논에서 철수합니다.)
1977
이집트의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점점 밀착되더니 마침내 예루살렘을 방문, 크네세트(이스라엘의 의회)에서 연설합니다. 아랍권 전역에선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에 거센 반발이 일었습니다.
1978
사다트-메나헴 베긴(이스라엘 총리)-지미 카터 3자가 미국 캠프데이비드의 대통령 별장에서 손을 잡습니다.
1979
이집트·이스라엘이 마침내 평화협정을 체결합니다.
1981
사다트가 이집트 군부 내 이슬람 과격파에 암살됩니다.
1982
레바논 남부 시아파 조직 헤즈볼라가 무장투쟁을 선언합니다. 레바논 전쟁이 시작됩니다.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군대를 보내 남부 레바논을 침공합니다. 악명높은 친이스라엘 기독교 민병대 팔랑헤는 이스라엘의 지원을 등에 업고 샤브라-사틸라 난민촌 학살을 저지릅니다.
(당시 샤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군인이었던지, 아랍권에선 우는 아이에게 '샤론이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쳤다지요. 샤론은 샤브라-사틸라 난민촌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나중에 주택장관이 됩니다.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팔레스타인 땅 안의 '유대인 정착촌'들이, 샤론 주택장관 시절 만들어진 겁니다. 무력으로 땅따먹기를 해서 불법점령한 뒤 유대인 마을 만들고, 그곳들 지킨다며 군대 집어넣어 팔레스타인 억압하고...
나중에 샤론은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데요. 2000년대의 일입니다만. 결자해지하고 싶었는지 정착촌 해체에 직접 나섭니다. 아쉽게도 하필 그 때에 샤론이 뇌졸중으로 쓰러져버리고, 이-팔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습니다)
1985
1987
1988
1993
1995
오슬로 협정에 이은 오슬로II 협정이 체결됩니다만, 라빈은 유대극우파 카흐네차이에 암살됩니다.
[일란 파페, '팔레스타인 현대사']
1996
아라파트가 PA수반으로 선출됩니다.
(지금은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입니다만, 여전히 국내 일부 언론들은 아라파트의 뒤를 이은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을 '자치정부 수반'이라 표기하곤 합니다. 그러면 안되는데... )
2차 인티파다와 이스라엘의 막가파식 전횡
2000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철군합니다.
샤론이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사원을 일부러 방문해 팔레스타인계 주민들을 자극합니다. 그렇게 해서 샤론은 팔레스타인 2차 인티파다를 촉발시키고, 자국 내 우파들을 결집합니다.
알 아크사 모스크
2001
2003
2004
2005
2008
2009
2010
2014
6월 2일 7년간의 분열을 끝내고 파타와 하마스가 통합정부를 구성합니다.
7월 8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하고, 며칠 뒤 지상군까지 투입해 침공합니다.
2015
7월 31일 유대인들이 서안의 마을을 습격해 18개월 아기 알리 다와브셰를 산 채로 불태워 죽였습니다. 이 사건 뒤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대도시 등지에서 서로를 노린 흉기 공격과 총격 등이 잇따랐습니다.
2016
양측 민간인들 사이의 공격과 충돌이 1년 내내 계속됩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는 계속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들을 확대합니다.
12월 23일 유엔 안보리는 이스라엘에 정착촌 건설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합니다. 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이스라엘에 불리한 안보리 결의안을 비토하지 않고 기권해버립니다.
2017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팔 '두 국가 해법'까지 무위로 돌리려는 행보를 계속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하고 있는 동예루살렘을 포함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하고 주이스라엘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로 12월 5일 결정합니다. 하마스는 "지옥 문을 연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습니다.
2018
5월 14일 미국이 예루살렘에 대사관을 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제 2의 '알나크바', 재앙의 날입니다. 이스라엘군이 발포해 팔레스타인 사람들 50여명이 숨졌습니다.
예루살렘 미대사관 문 연 날 팔레스타인 시위 ‘유혈사태’
7월 19일 크네셋(이스라엘 의회)가 이스라엘을 ‘유대 국가’로 선언하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이스라엘 인구 900만명 가운데 유대인은 74.2%, 아랍계가 20.9%, 그 외 4.8% 정도로 구성돼 있는데 인구의 4분의 1을 배제하는 법안을 만든 겁니다. ‘인종주의’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2019
3월 25일 트럼프는 시리아 남서부 골란고원에 대해 이스라엘의 영토 주권을 인정하는 선언문에 서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불법점령한 뒤 유엔이 반환을 촉구해왔고 미국조차 반세기 넘게 골란고원 문제에서는 이스라엘을 노골적으로 편들지 않았는데 트럼프가 뒤집었습니다.
트럼프 사위 재러드 쿠슈너의 주도 하에,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배제한 이·팔 평화계획도 만들었습니다. 6월 22일에 그 중 경제부문을 가져와 ‘번영으로 가는 평화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발표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정치적 해법 없이 돈 얘기나 하자는 이 계획에 반발했습니다.
2021년
5월 동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가 벌어지자 이스라엘이 강경진압했습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보복으로 로켓포를 발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공습하고 지상군을 들여보냈습니다. 미국의 중재로 휴전을 했지만 15일간에 걸친 충돌로 가자지구에서 유엔 추산치로만 250명 이상이 숨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무장조직원 200여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서안지구에서도 시위가 일어났고 이스라엘군에 의해 20여명이 숨졌습니다. 팔레스타인인 7만2000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2023년
10월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으로 이스라엘과 전례 없는 규모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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