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인샤알라, 중동이슬람

어느 테러용의자의 8년 세월

딸기21 2010. 8. 1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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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모로코, 폴란드, 관타나모.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붙잡혀 8년간 세계 곳곳의 ‘비밀 구금시설’을 전전해온 한 테러용의자의 심문 동영상이 17일 공개됐다. 물고문 등 가혹행위로 지탄받아온 CIA의 심문 방식, 국제법과 현지 법을 모두 어긴 채 운영된 해외 비밀 구금시설의 실태, 심문 자료를 보관해 놓고도 모두 폐기했다고 주장한 거짓말 등이 총체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람지 빈 알 시브(38)가 CIA 요원들에게 체포된 것은 9·11 테러가 일어나고 꼭 1년 뒤인 2002년 9월 11일. 예멘의 하드라마우트에서 태어난 알 시브는 수단 출신 난민임을 가장, 95년 독일 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그곳에서 알카에다에 포섭된 알 시브는 아프간 칸다하르의 알카에다 캠프에서 테러리스트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9·11 때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항공기 납치범 모하마드 아타와 함부르크에서 함께 살며 같이 테러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알 시브는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해 테러에 직접 가담하지는 못했다.

CIA는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그를 체포한 뒤 곧바로 아프간 바그람 미군기지 옆에 있는 비밀시설로 옮겼다. 하드록 음악에 가려진 다락방에 감금돼 며칠간 조사를 받은 알 시브는 걸프스트림 제트기에 실려 북아프리카 모로코로 옮겨졌다. 모로코 수도 라바트 교외의 교도소에는 CIA가 이용하는 비밀 심문실이 있었다. AP통신에 따르면 이 교도소는 공식적으로는 모로코 정부에 의해 운영되지만 실제로는 운영예산 대부분을 CIA가 낸다.
하지만 알 시브는 2003년 3월 암호명 ‘쿼츠(Quartz)’로 불리는 폴란드의 CIA 비밀시설로 다시 이송됐다. 당시 폴란드 우파 정부는 원조를 대가로 미국의 대테러전에 적극 협력하면서 아프간에 대규모 파병을 하고 비밀 구금시설을 두는 것까지 허용해줬다. 
CIA는 9·11 테러모의 주범으로 지목된 칼리드 셰이크 모하마드를 파키스탄에서 붙잡아와 쿼츠 안에서 알 시브와 대질심문을 했다. 하지만 알 시브가 협조하지 않자 유동식을 강제로 먹이는 가혹한 심문을 했다. 하지만 다른 용의자들과 달리 알 시브에게 물고문, 이른바 ‘워터보딩’으로 알려진 고문은 하지 않았다.


CIA는 알 시브와 모하마드에 대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알카에다 테러조직원들이 영국 런던 히드로공항과 금융중심가 카나리워프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알 시브는 다시 모로코를 거쳐 쿠바 관타나모 미군기지 내 테러용의자 수용소로 이송됐다. 
이곳에서 알 시브는 군사재판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인권단체들과 법률가들의 비판에 부딪쳐 관타나모 군사재판 자체를 둘러싼 소송이 제기됐다. 대법원이 알 시브 등에게 변호사 접견권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릴까 우려했던 CIA는 그를 다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로 옮겼다. 

2006년 9월까지 알 시브는 루마니아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의 CIA 비밀 구금시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판이 들끓었다. 재판도 없이 테러용의자라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을 납치해 가둬두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기에, 여기 협력해 구금시설을 허용한 각국 정부들은 곤혹스런 처지가 됐다. 
결국 CIA는 루마니아와 리투아니아의 시설을 폐쇄하고 알 시브를 다시 관타나모로 옮겼다. 이렇게 8년을 끌려다닌 알 시브는 아직도 언제 재판을 받을지, 군사법정에 서게 될지 민간법정에 서게될 지도 모르는 상태다.

알 시브의 심문과정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2개와 녹음테이프는 2007년 미국 버지니아주 랭리의 CIA 본부에서 발견된 것으로, 2002년 모로코 교도소에서 벌어진 알 시브 심문 장면을 담고 있다. 
AP통신이 입수해 보도한 비디오테이프에는 명백한 고문행위는 찍혀 있지 않지만 알 시브가 정신적으로 몹시 불안정한 상태임이 나타나 있다. 알 시브의 변호사인 토머스 더킨은 “그를 정상인으로 판정하고 재판을 할 수 있을지부터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CIA는 “원래부터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다”고 주장했지만, 변호인들은 “비디오테이프 영상으로 미뤄볼 때 CIA 심문 과정에서 정신분열증이 나타났거나 악화된 것 같다”며 의료기록 공개를 요구했다. 

CIA는 2005년 또 다른 테러용의자 아부 주바이다와 아브드 알 나시리를 물고문한 사실이 드러나 거센 비판에 부딪치자 이 두 사람의 심문 내용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92개를 폐기했다. 2007년 CIA는 미 연방법원에 제출한 기록에서 “테러용의자 심문 비디오테이프는 모두 없애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했는데,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난 셈이다. 
수사요원들이 알 시브 비디오테이프만 없애지 않은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가혹행위가 드러나 있지 않아 굳이 폐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알 시브 비디오테이프들은 ‘그레이스톤(Greystone) 프로그램’이라 불린 CIA의 해외 비밀 구금시설 실태를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AP는 전했다.

인권단체인 미국 시민자유연맹은 “여전히 정부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테러용의자 심문 정책에 대한 정보들을 숨기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며 정부에 구금자 관련 정보공개를 촉구했다. 조지 리틀 CIA 대변인은 “(심문과정을 둘러싼) 모든 조사에 앞으로도 협력하겠다”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미국인들과 미국의 미래를 위해 수사를 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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