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인샤알라, 중동이슬람

전쟁 7년, 이라크 사람들은

딸기21 2010. 8. 23. 18:02
728x90
유전지대로 유명한 이라크 남부의 나시리야. 지난 21일 나시리야에서 주민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과 부딪쳐 16명이 다쳤다. 병원으로 후송된 이들 중 10명은 시위대를 막으려던 경찰이었다. 주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온 이유는 ‘전기’였다.

바그다드에서 370㎞ 남쪽에 위치한 나시리야는 유프라테스강을 끼고 있는 유전도시다.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을 개시한 미군과 영국군이 전쟁 초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남부의 거점 타깃으로 삼았던 곳이 나시리야다. 부
상당해 이라크인들의 보호를 받던 미군 병사 제시카 린치 일병을 놓고 미군이 “반군에 납치된 여군을 구출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가 망신살이 뻗쳤던 곳도 나시리야였다. 

“전기를 달라” 이라크 남부 유전도시 나시리야 주민들이 22일 전력난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충돌로 경찰과 시위대 등 16명이 다쳤다. 나시리야 | 로이터뉴시스


2003년의 미군 지상작전과 2004년 시아파 마흐디 민병대 봉기 등 몇 차례 유혈사태를 거친 뒤 나시리야는 안정을 찾았다. 지난해 이라크 정부는 일본 기업컨소시엄과 나시리야 거대 유전 개발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 도시 주민들은 요새 또다른 생존 투쟁을 벌이고 있다. 전기와 수도를 비롯한 기본 서비스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번 시위에서 경찰에 체포·기소된 카밀 후세인(35)은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데도 정치인들은 헛된 약속만 하고 있고, 정부는 어떤 해법도 내놓지 못한다. 전기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주민들은 나시리야의 석유가 어디로 가는지, 그 이권은 누가 챙기며 자원대국인 이라크가 왜 사담 후세인 시절보다도 전력난에 허덕이는지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시위에 참가했던 라술 후세인(28)은 AFP통신 인터뷰에서 “이대로라면 계속 거리로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시리야 시위는 종전을 앞둔 지금 이라크인들이 안고 있는 불만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장 에너지가 모자라는데 인프라 재건은 갈길이 멀고, 무능한 정부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특히 에너지 부족은 ‘민심 폭발’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 사안이다. 이라크의 하루 전력생산량은 8000메가와트. 하지만 올해처럼 한낮 기온이 54도로 올라가는 무더위에선 1만4000메가와트는 필요하다.
무능한 정부, 석유를 빼내가는 외국 기업들에 대한 반감은 폭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시리야에서는 지난 6월에도 한 차례 에너지 폭동이 일어났다. 이라크 최대 석유수출항인 남부 대도시 바스라에서도 에너지난에 항의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후세인 시절 이라크는 에너지가 사실상 공짜였다. 의료·교육도 공짜였고, 기본 식료품도 배급제여서 공짜나 다름없었다. 미국과 유엔의 금수조치 때문에 인프라 유지·보수에 필요한 물품 반입이 안 되고 정보화가 더뎠지만 낙후된 북부의 쿠르디스탄 산지를 제외하면 비교적 전국이 고르게 개발돼 있었다.
사회주의 정책으로 민간부문 발달이 느렸던 대신 공공부문이 경제를 떠받쳤다. 전후의 민영화 조치들로 공공부문 일자리가 사라졌는데 빈틈을 메워줄 민간부문의 성장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전후 미국이 이라크에 재건비용을 쏟아부으면서 파괴된 인프라가 다시 세워지고는 있지만 이라크인들의 망가진 삶이 언제 정상화될 지는 알 수 없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2008년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20%인 640만명이 식료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나마도 2005년의 15.4%에서는 훨씬 낮아진 수치다. 중동에서는 떵떵거리며 살던 이라크인들이 하루하루 먹거리를 걱정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바그다드 이외 지역에서는 상·하수도 보급률이 급격히 떨어져, 2008년 콜레라까지 발생했다.

잦아드는 듯했던 테러공격도 미군 철군과 맞물려 다시 빈발하고 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글로벌 테러리즘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고, 이라크가 그 직격탄을 맞았다. 후세인 시절 억압통치에 밀려 일어나려 해야 일어날 수 없었던 이슬람 극단세력의 테러와 ‘종파간 충돌’이 물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라크 알카에다’는 2006년 미군이 지도자를 사살하면서 기세가 수그러들었으나 바트당 잔당과 수니 저항세력의 민간인 살상과 테러공격은 계속되고 있다.
수니·시아 민병대가 2006년 바그다드 북부의 고도(古都) 사마라에서 맞붙은 것은 이라크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천년 역사의 유서깊은 칼리프 모스크(황금돔 사원)가 종파간 분쟁으로 내려앉은 뒤 유혈충돌이 전국으로 퍼져 150만명이 일시적 난민이 됐었다.
지금도 국외를 떠돌고 있는 난민이 100만명에 이르고, 내부 유민(IDPs)들이 155만명에 달한다. 이들 내부 유민의 3분의1은 난민캠프 같은 임시 정착촌에서 구호품에 의존해 살고 있다.

전후 나아진 것이 있다면 정보통신(IT) 분야다. 전화 사용자수는 83만명에서 130만명으로 늘었고, 금수조치에 막혀있던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휴대전화 사용자 1950만명이 생겨났다. 인터넷 가입자는 전쟁 전 4600명에서 160만명으로 늘었다.


이라크전이 끝나간다.
내게 이 전쟁은, 그냥 '신문에서 보는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이 아팠고, 어떤 때는 잠이 오지 않았고, 어떤 때는 울었고, 어떤 때는 분노했다.

[카우보이가 파괴하는 바빌론 http://ttalgi21.khan.kr/3255]

이라크에 다시 가보고 싶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