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딸기21 2023. 6. 28.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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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 분열기의 중국 China Between Empires: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은이), 조성우 (옮긴이) 너머북스 
 


왕조 중심의 세계사 수업에서 중국을 배우면서 은주-(춘추전국)-진한-(위진남북조)-수당-송원-명청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각인돼 있다 보니, 남북조 시기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중국 드라마들 보면서 아주 약간 관심을 갖게 됐고, <하버드 중국사>를 순서대로 읽다 보니 두 번째 권에서 이 시대를 만났다.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중국인은 중국이 통일되고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시대를 중심으로 중국 역사를 서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한 제국이 무너진 이후 400년 역사는 소홀하게 다루어진다. 이 시대를 부차적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이 시대에 대한 합의된 명칭이 없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중국인 역사학자들은 왕조별로 시대를 구분하는 전통에 따라 이 시대를 '위진남북조’라고 부른다. 반면 서구 학자들은 '분열의 시대(the Age of Disunion)' 혹은 '초기 중세'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자는 중국이 단일한 정권 아래 통일되어야 정상이라고 상정하는 것이고, 후자는 중국 역사에 서양사의 시대 구분을 덧씌우는 것이다. 나름의 한계는 있겠지만 나는 중국식 명칭을 수정하여 이 시대를 '남북조’라고 부르려 한다. 첫째, '위진남북조'라는 중국식 용어보다 간결하게 이 시대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남북조'라는 용어는 후한 멸망 이후 4세기 동안, 중국 정치세계가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과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음을 반영한다. 두 번째 더 중요한 이유는 남북의 지리적 구분과 관련한 주요 변화들이 여러 면에서 이 시대의 역사적 의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한족 인구 상당수가 북에서 남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남중국의 낯선 자연환경 및 이민족들과 조우하였다. ‘남북조'라는 명칭은 정치적 분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용어이지만, 동시에 이 시대 중국 문화권이 확장되고 다양해졌음을 의미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 책 각 장에는 다양화와 관련한 다섯 중심 주제가 통합적으로 반 영되어 있다.
(1) 중국 내 지역 구조와 외부세계와의 관계 양측 모두에서, 중국에 대한 새로운 지리적 정의가 이루어졌다.
(2) 새로운 문화와 문학 경향에 따라 구분되는 새로운 사회지배층이 등장하였다.
(3) 종종 세습되기도 하는 별도의 군사 인구(병호)와 새로운 군사기구가 출현하였다.
(4) 이러한 군사력으로 지탱되는 제국 정부가 사회로부터 점차 유리되었다.
(5) 사회적 정치적 계층 구분에 더는 정확하게 부합하지 않는 대형 종교가 등장하였다.
-17-19
과도하게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4세기 남중국에는 군대 없는 왕조가 존재하였고 북중국에는 왕조 없는 군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십육국'이라 불리는 북중국 각지의 이민족 국가들은 부족연합을 토대로 성립하였는데, 부족연합에서는 최고 수장이 전투에 승리하여 추종자들에게 전리품을 분배함으로써 권위를 행사하였다. 이전의 흉노 제국이나 이후의 다른 부족연합과 달리 십육국은 중국 바깥에 기반을 두거나 고유의 정치적 전통을 지니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전사들의 일시적 집합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154


위 인용구는 좀 설명이 필요한데, 남중국에 '군대 없는 왕조'가 있었다고 한 것은 군벌 집단들과 왕조가 따로 놀았기 때문이다. 북중국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황하 유역 중부와 서부 지역에서 흥기한 군사 국가들과 중국 동북 지역의 국가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전자는 근본적으로 약탈을 통해 생존한 유목 군대였고, 이에 비해 후자인 동북 지역의 선비 모용부는 반정주민이었다. 이들은 복합적 성격을 띤 경제 활동과 중국과의 정기적 교역관계 덕분에 유목 군대와 중국식 행정을 능숙하게 혼합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이 시기의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동북 지역(현재의 만주 남부와 하북 북부)은 연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선비족의 네 국가(전연, 후연, 남연, 북연)가 연속하며 통치하는 다른 세계로 남아 있었다.
-155

모용부가 세운 연나라와 같은 일부 국가들이 중국적 통치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지속된 것과 달리, 4세기 말 탁발(타브가츠) 부족만은 부족장에 대한 충성을 왕조에 대한 충성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396년 모용부 군주가 죽고 모용부의 군대가 급속도로 약해지면서… 2년 만에 탁발부는 모용부의 영토를 병합하였고 탁발규는 황하 만곡부 이동의 북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162

400년에서 440년에 북위는 황하 유역 전체를 정복하였고 450년에는 양자강 북변까지 진출했다. 이때 탁발부는 북중국에 순전히 군사적 통제만을 행하고 있었다. 북위는 토착 한족 지배층과 유대관계가 없었으므로 전국에 퍼져 있는 군사 주둔지를 통해 지배하였다.
493년 효문제는 북위를 전형적인 중국식 국가로 바꾸려 하였다.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조정에서 중국식 복장과 언어를 쓰게 하였으며, 선비족 지배층과 한족 지배층 사이에 공통된 품급을 적용하고 통혼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중국식 지배 방식으로의 변화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165-166

 
탁발씨는 쫌 알지. <금수미앙>에 나옴.
 

여주가 하드캐리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금수미앙>. 미앙 역의 탕옌은 이 드라마 뒤에 고구마 역할 전문배우 뤄진과 결혼했다. 이 드라마에서도 역시나 뤄진은 고구마. 이거 볼 때 욘양이 초딩이었는데, 탁발여 역할로 나오는 우젠하오가 좋다고 해서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우젠하오=원조 유성화원 F4, 1978년 생이란 말이지 ㅎㅎ
 
암튼 북위 왕조는 중국 따라하려다가 탁발 부족이 오히려 푸대접을 받고 당초의 강점이 사라지면서 무너졌다는 스토리.
 

관중 지역은 흉노의 후예인 우문태의 지휘를 받는 병력이 장악하였다. 534년 북위 황제와 조정은 낙양을 탈출하여 우문태가 있는 장안으로 피신하였다. 이로 인해 북중국은 동위와 서위라는 두 국가로 분열되었다. 고환의 후계자가 동쪽에 북제를 세우는 550년까지 두 나라는 명목상으로는 각각의 북위 황실에서 나온 황제가 통치하며 서로 싸웠다. 7년 후에는 우문씨 정권이 관중 지역에 북주 왕조를 개창했다.
-168

북주의 정예부대는 당시 최강의 전투력을 갖춘 군대였다. 북주는 지역의 가용한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였고, 한족 실력자들을 초치하여 행정을 맡겼으며, 이전 모든 중국 제국들의 근거지였던 관중 지역에 안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577년, 반세기에 걸친 전쟁 끝에 북주는 경쟁국인 북제를 정복하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4년 뒤인 581년에 북주의 장군 양견은 제위를 찬탈하고 수 왕조를 세웠고, 8년 뒤인 589년에는 수의 군대가 남조의 진을 제압하여 거의 4세기 만에 처음으로 전 중국이 한 사람의 군주 치하에 통합되었다. 
-170

 
이 부분은 <독고천하>에 나오지 말입니다.
 

 

독고씨네 세 딸이 있었는데 첫째는 '반야', 둘째는 '만타', 세째는 '가라'다. 첫째는 북주 황자와 결혼해 (드라마 내용에 따르면) 고군분투 끝에 남편을 황제로 만든다. 하지만 이미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고... 세째 가라가 양씨 장군과 결혼해서 남편을 열심히 조련하여 성공하게 한다. 그가 바로 양견, 수 문제다.
 
둘째 만타는 악역인데, 이씨 상인과 결혼했다. 언니와 동생을 늘 시기질투하며 못된 짓을 일삼았지만 그저그렇게 인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으니, 만타의 아들이 이연(李淵)이다. 당나라를 세워 초대 황제 고조가 된 사람. 이연이 자기 엄마를 추서해 만타도 어쨌든 죽은 뒤에나마 황후가 됐으니 독고씨 집안 세 딸이 북주, 수, 당의 황후가 된 것이다. 
 
이 스토리는 워낙 유명해서 여러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특히 세째 딸 가라, '문성황후'는 당 태종 이세민의 부인 문덕황후 장손씨와 함께 현명한 황후로 꼽히는 인물이었다고. 
 

드라마에서 오드아이 '우문호'로 나오는 쉬정시.

 

북제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로는 <난릉왕>이 제일 유명할 듯. 

 

 

임의신 별로 안 좋아해서 그냥 그랬음...

 

"해 뜨면 거친 들풀을 정리하고, 달을 데리고 호미를 어깨에 멘 채 돌아온다"라는 구절에 드러난 것처럼 도잠의 시는 농민의 끊임없는 노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서양 목가시의 여유로운 정취나 동시대 다른 시들에 보이는 원림과 자연 속 즐거움과는 대조적으로, 도잠의 시에서 전원은 끊임없는 노동 조차도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곳으로 그려져 있다.
-274-275


도연명의 시들이 이상향을 얘기한다는 점에서는 이상주의적이지만 시골의 현실을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하지만 도연명의 시들을 읽을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음.
 

중국 제국이 통치하는 '문명의' 농경민들 그리고 선우가 통치 하는 '야만의' 유목민들이라는 두 양극화된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정주 농경민과 유목민 사이를 가르는 명확한 정치적 구분은 중국 내지에 유목민이 대규모로 정착하고 흉노 제국도 무너지면서 사라졌다. 이로써 이전의 생태환경에 따라 나뉘었던 양쪽 모두를 아우르는, 보다 넓고 포괄적인 세계질서가 나타날 수 있게 되었다. 당의 두 번째 황제 태종(재위 626~649)은 중국의 황제이자 돌궐의 칸으로서의 통합적 역할을 정당화하여 … 당 왕조 첫 세기에 거의 170만에 달하는 외국인이 당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한국인, 일본인, 소그드인, 그리고 다른 외국인들은 문무 양면에서 최고위층 관직을 받으며 정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실제의 힘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유목민 수장이 하나의 제국 안에서 한족과 유목민 양쪽을 통치한 것이다. 그 첫 번째 사례는 북위 하에서 나타났고 이후 중국 역사에서 되풀이되었다. 일부 문인들이 수 세기에 걸쳐 한족은 '오랑캐' 군주를 섬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중국의 지배층 대부분이 제대로 된 수도를 건설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고전 문화를 후원하며 관직과 급료를 제공하는 정복자라면 누구라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후대에 한족과 그 문화를 우선시하는 충절 관념이 나타나는 것은 제국 모델로부터 이탈하여 국민국가라는 근대적 관념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현상이었다. 
일본 학자들은 중국 역사에서 '정복 왕조'가 행한 중요한 역할과 제국 모델 내에서 지니는 정통성에 대 하여 상당한 연구를 축적하였다. 일본의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였다는 점에서 '정복 왕조'라는 용어에 문제의 소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용어는 모든 중국 왕조가 군대의 힘으로 세워졌고, 후한 이후로 비한족의 군대와 문화가 그러한 힘의 근원이었으며, 또한 중국 제국은 이렇듯 근대 국민국가와 같은 의미로서의 중국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294-295

 
이 시리즈 여섯 권 중에 두 권을 읽었는데, 왕조사에 치중하지 않고 철학과 사회와 문화를 두루두루 다룬다. 책임편집자 티머시 브룩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조너선 스펜스 같은 문장력이 없는 게 아쉽지만 아무나 스펜스를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아무튼 철학 종교 학문 같은 부분들이 꽤나 재미있다.
 

황실의 공주나 황제가 죽은 황후들의 출가를 통해 알 수 있듯 교단 종교 내의 여성의 새로운 위치는 훨씬 큰 권위와 명분을 누리는 것이었다. 종교적으로 활동한 것뿐 아니라 비구니들과 여관들은 저자로 이름을 남긴 최초의 여성들이었고 사후에 상당한 양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비구니는 여성이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선례를 확립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비구니들의 전기는 그들의 불심이 어떻게 가족의 모든 압박에 저항했는지 이야기한다… 후대에 묘선 공주나 진정고와 같이 잘 알려진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도 결혼을 거부하는 여성의 수호자로 등장하는 관음보살이 언급된 것은, 관음보살이 어쩌면 또 다른 여성의 역할 즉 여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58-59

한대의 우주론에서 하늘은 황제와 독점적으로 결부되어 도덕적으로 해석되는 신이었다. 서왕모는 민중이 직접 호소할 수도 있고 또 도움 청하는 자를 구제해주는 대안적인 상위 신격이었다. 이처럼 서왕모는 도교 신들뿐만 아니라 부처와 보살에 앞서 그들의 종교적 기능을 먼저 행한 셈이다. 따라서 서왕모 신앙은 도교 전단계의 종교 운동이며 중국 교단 종교의 직계 선조라고 볼 수 있다. 서왕모는 도교 신들의 위계 안에 받아 들여져 도사와 일반 신도에게 중요한 역할을 행하게 되었다.
-384

 
도교의 여관, 이라고 하니 다시 삼생삼세가 등장하는 수밖에. 설정 상으로는 남장을 한 거지만.
 

 

황건의 반란은 184년에 진압되었으나 오두미도는 사천 지방에 장씨 가문의 소위 천사들이 다스리는 도교 국가를 건립했다. 
장로 휘하에서 오두미도는 215년 조조에 항복하였고 신도 다수는 낙양과 업 그리고 화북 동북부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로 인해 도교가 중원 지방에 확산되었다. 3세기 말 서진이 붕괴하기 시작했을 때 이주당했던 신도들 중 이씨 가문이 이끄는 무리가 사천으로 돌아와 대성이라는 이름의 도교 신정 국가를 세웠다. 사천에 거듭하여 도교 왕국이 수립되자 산맥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은 중국에서 떨어져 있는 별세계가 되었다. 대성국은 4세기까지 존속했다. 
-385-386


너무 고퀄이라 나 같은 아둔이가 이해하기엔 엄청 복잡했지만 화면이 매우 멋있었던 <풍기농서>. 유비는 죽고 제갈량이 유선을 받쳐주고 있던 시기, 촉과 위 사이의 첩보전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천성장가>의 첸쿤과 <미미일소흔경성>에 괴상하게 나온 白宇가 두 주인공을 맡았다. 안젤라 베이비는 여기서도 연기력은 역시나... 



위나라와 결탁한 '오선도' 종교집단'이 줄거리에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게 오두미도다.
 

불로불사를 이루는 최고의 방법이자 갈홍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방법은 단약을 만드는 연금술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물질은 불멸의 물질인 금, 그리고 불타는 듯한 붉은 색 때문에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던 자연 광물인 주사였다. 자연 상태의 주사는 대개 황, 초석, 수은을 섞어 만든 합성물로 대체되었다. 이 합성물의 재료들은 화약의 성분이기도 해서, 결과적으로 연금술의 실험 덕분에 화약이 발명되었다. 
이러한 '외단'은 수행자에게 너무 많은 비용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점차 '내단'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 다. 내단은 주역의 특정 괘에 마음을 집중하면서 체내의 화로와 솥을 만들어내는, 호흡법과 밀접하게 관련된 명상수행법이었다.
-389

 
오오옷! 내단이 그런 거였구나. <진정령>에 온축류가 나오는데 얘 손이 닿으면 금단(내단)이 파괴된다.
 

온축류

 

2세기에 반란 집단이 품었던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로 시작한 도교는 6세기 초가 되면 지배층의 세계관과 국가의 종교적 수요에 부응하는 칠학적 종교가 되어 있었다. 노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당 황실은 도교를 국교로 확립하였고 주요 도시에 국립 사원과 출가 도사를 배치하였다.
교단 도교가 민중운동으로 시작하여 국가의 후원을 받는 종교 조직으로 마무리된 것과 달리 불교는 정반대 궤적을 보였다. 중국 지배층을 통해 들어왔으나 대중종교가 된 것이다.
-394

도교와 불교는 서로 기원을 달리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경계가 모호한 부분이 많다. 중요한 점은 이 시대에 나타났던 주요한 사상적 발전 몇 가지에 두 종교 모두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천년왕국적 신앙과 윤회전생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세계 혹은 구질서의 붕괴가 임박했고, 그 후에는 독실한 신자들이 다스리는 새롭게 정화된 세계가 출현한다는 천년왕국적 교리는 후한 말 반란을 일으켰던 도교 신도들의 종말론 교의와 남중국 유력 가문 가운데 도교 신자들이 상정한 변형된 종말론에서 보인다. 같은 시기에 세계가 파괴되는 대재앙이 임박했다는 관념은 불교 안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모든 세계가 결국에는 소멸할 것이라는 관념은 불교의 표준적 교의였으나 3세기 중국에서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홍수나 불과 같은 대재앙의 우려와 결합되었다.
-406-407

보다 널리 퍼져 있던 것은 미래불인 미륵과 보살인 월광동자에 관계된 천년왕국적 신앙이었다. … 미륵은 6~7세기의 몇몇 문헌에서는 종말론적 전투를 벌인 후에 새로워진 세계로 추종자들을 인도할 구세주로 바뀌어 있다. 불교 경전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관념은 도교로부터 온 듯하다. 
몇 종의 문헌은 세계를 파괴하는 대홍수가 일어나고 그 뒤에 월광동자가 신도들이 거주할 정화된 세계를 만들 것이라고 예언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인물이 인도에서는 아버지를 불교로 개종시킨 효성스러운 아들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종말론적 요소는 순전히 중국에서 만들어낸 부분이고, 종말론 전통의 주요 요소들은 도교로부터 비롯된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미륵, 월광동자와 관련된 종말론은 불교 승려와 신도가 연루된 정치적 봉기에서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409

 
여기서 화순 운주사가 나와줘야겠지. 사진은 거시기하지만...
 

 

‘지괴(志怪)’라는 장르는 역사에 대한 보완으로서 주변부'적인 것들을 강조하였다. 지괴는 대체로 동진, 남조 영역이던 지역에서 유통되었고 저자 대부분도 남중국 사람이었으며, 내용이 되는 기이한 사건의 상당수는 중국 남부와 서남부에서 발생하였다. 따라서 지괴는 중국 문명이 남쪽으로 그리고 산림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편입된 지역에 관한 문자기록을 제공하는 셈이다. 또한 지괴는 종종 중심과 주변부 사이 관계를 변화시키기도 하여 결과적으로 사회적 위계질서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 이처럼 세속에서 물러난 수행자가 우월한 존재라는 주제의식은 보다 명백하게 도교적 성격을 지닌 지괴들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한무제와 신선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문헌들에서 동방삭은 군주와 세계의 끝에서 온 존재들 사이를 중개하며, 군주가 아닌 이 중재자가 상황의 주도권을 쥔다.
지괴 장르의 주요 저작은 하늘과 인류에 대한 한대의 시야가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모두 포함하여 하늘과 땅 사이 모든 종류의 존재가 분명히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겉으로는 기이해 보일 수 있는 사건들 속에서 그 밑바탕에 깔린 안정적 관계와 양상이 나타났다. 결국 이들 문헌이 담고 있는 궁극적 메시지는 경계를 초월한 우주적 상호관계였다.
-474-475

 
남북조 다음 세 번째 권은 '당'이다. 이 시리즈에 '수'는 타이틀로 뽑히지 못했다는 뜻이다. 남북조의 뒷부분에 몇 장에 걸쳐 간단히 나와 있을 뿐이다.
 

한 제국의 계승 혹은 부활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실 수당 왕조는 5~6세기에 북중국을 지배했던 이전의 '오랑캐' 왕조 북위, 북주, 북제에서 발전한 많은 제도와 관행을 흡수하였다. 최후의 토지국유제였던 균전제를 시행하고, 최후의 세습군제였던 부병제를 실시하며, 조세를 곡식과 직물로 거두고, 도교와 불교 교단을 국가가 후원하며, 한대 이후 등장한 동방과 남방 먼 나라들과 정기적 대외관계를 맺고, 한족이 아닌 가문과 빈번하게 혼인 관계를 맺어 황실 내에 외국인을 받아들인 일 등은 모두 위진남북조 시대로부터의 유산이었다.
반면 장안과 낙양에 새로운 모습을 띤 수도를 건설하고, 이제 전체 인구의 40퍼센트가량이 살게 된 남중국을 통합하고, 이전 세기에 이룬 발전을 공고히 하며 아울러 이후 명청대에 지배적으로 나타날 양상을 예고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관계를 보여준 일 등 새로운 면모도 많았다.
-481-482

다른 신생 왕조처럼 수 왕조는 제국 지배에 필수적이라고 간주된 일련의 제도들을 확립했다. 유교 경전 학습을 국가에서 후원하겠다고 확인한 것에 더하여 문제는 불교와 도교도 지원하였다. 그리고 율령, 조세제도, 국가가 주관하는 토지제도, 북주의 부병제에 기초한 군사제도를 마련하였다. 마지막으로 수문제와 그 아들 수양제는 한대 이래 지속해온 한국과 중앙아시아 나라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지금의 동남아시아 및 멀리 떨어진 일본 열도 나라들과의 관계를 계속 키워나갔다. 
또 다른 혁신적 조치는 옛 장안의 동남쪽 위수 유역에 대흥성이라는 이름의 새 도성을 건설한 것이다. 이곳을 선택함으로써 수는 중국을 재통일한 스스로의 위업을 장기간 통일 중국을 유지했던 마지막 왕조인 한과 연결지었다.
한의 장안성은 북쪽이 강이 흐르는 모양을 따라 불규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장안성은 유가 경전의 내용을 따른 장방형 형태로, 한쪽 면이 6킬로미터에서 10킬로미터 사이인 거대한 도성이었다. 이는 중국 제국 수도 설계에 있어서 새로운 형태였다.
-485-486

양제는 한의 두 번째 정치 중심이었던 낙양을 재건하였다. 낙양은 후한의 수도였고, 수십 년 동안 북위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우주론적이고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그 위치가 정해진 대흥성의 시장들에 비하면, 낙양의 시장들이 실제 교역에는 훨 씬 적합하였다. 도시계획에 있어서 교역이 중시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운에 기초한 교역이 중시된 것은 주목해야 할 새로운 특징이었고, 중국에서 국가가 진화함에 따라 나타나는 중요한 발전이었다. 수운의 새로운 중요성은 수대의 더 중요한 혁신, 즉 대운하의 개통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489

양제의 과다한 지출로 인한 압박으로 수가 붕괴된 후, 중국 역사가들은 대운하 굴착을 무자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아 중국의 정치적 통일에 있어 대운하가 지니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남중국에 존재하고 있던 운하망과 더불어 대운하는 사천을 제외한 중국의 생산성 높은 모든 지역으로부터 수도까지의 수상 운송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대규모 건설 사업으로 조정을 파산에 이르게 했음에도 양제는 동북으로 고구려 침공을 거듭하여 감행했고, 결국에는 이것이 수가 붕괴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492

양제가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수가 붕괴한 것은 후대에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구조적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양제는 돌궐에 대해서는 분열과 지배라는 고전적 전략을 채택하면서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고구려에 대해서는 정복하기를 고집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아마도 유목민은 계속 이방인으로 남는 반면 정주민은 중국 영역 안에 속한다고 생각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정주적 혹은 혼합적 성격 덕분에 동북 지역 민족들은 북중국에 모용씨의 연을 비롯하여 북위, 북주, 북제 등의 국가를 건설하였고, 그들을 중국에 편입시키려는 반복되는 시도에 저항할 수 있었다. 이후 중국 전체 혹은 상당 부분을 정복한 왕조들- 요, 금, 청 -은 대부분 동북지역에서 등장하였다. 이들 민족과 중국 사이의 군사적 긴장관계는 동북 변경 근처에 있는 북경을 제국의 수도로 확립시키기에 이르렀다.
-495-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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