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소병국, <동남아시아사>

딸기21 2023. 6. 1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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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에 대해 통사로 쫘악 훑어보는 것은 근 20년만인데다 책이 너무 훌륭했다. 생각해 보니 태국과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를 여러 번 갔는데 대충 구경하고 오는 여행일 때가 많았다는 점이 아쉽다. 다음에 가게 되면 책의 내용을 떠올리면서 꼼꼼히 봐야겠다.
동티모르 라오스 필리핀 브루나이 미얀마 싱가포르는 안 가봤고 말레이시아는 리조트에 한번, 그리고 콸라룸푸르 1박이 전부라 가봤다고 할 수 없다. 담엔 라오스에 가봐야지. 미얀마도 늘 위시리스트에 있지만 지금 상황이 저 모양이니…

현대 부분은 슬슬 넘겼고 잘 몰랐던 옛날 얘기들 중심으로 스크랩.
 


동남아시아는 대륙부 반도 도서부로 이뤄져 있다. 그러한 지리적 구분에 따라 이 지역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을 포함하는 ‘대륙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동띠모르 필리핀을 포함하는 ‘도서 동남아시아’로 나누기도 한다. 말레이반도는 지리적으론 대륙부에 속하나, 도서부로 분류한다. 인종(말레이인) 언어(말레이어) 종교(이슬람교) 등이 대륙부보다 도서부인 말레이세계와 훨씬 밀접하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나라들은 싱가포르와 브루나이를 제외하곤 규모가 비교적 큰 국가들이다. 인도네시아의 면적은 190만 4569㎢(세계 15위)에 달해 내해를 포함하면 미국과 비슷하다. 라오스는 영국보다 약간 작은 정도(23만 6800㎢)이고, 미얀마(67만 6578㎢)는 프랑스보다 크다. 
-20쪽

대륙 동남아시아는 5~10월 습한 남서 몬순의 영향으로 우기를, 11~4월 건조한 북동 몬순의 영향을 받아 건기를 겪는다. 적도 이남에 위치한 도서 동남아시아에서는 몬순이 대륙부와 정반대로 불기 때문에 우기와 건기도 정반대다. 1월에 방콕은 날씨가 화창한 건기이지만, 자까르따에서는 비가 자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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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물이 풍부한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생선을 발효시켜 만든 어장을 소금 대신 널리 애용한다. 태국의 남쁠라, 라오스의 남빠, 캄보디아의 뜨레이, 베트남의 느억맘, 미얀마의 냥파예, 필리핀의 파티스, 말레이시아의 부두, 인도네시아의 께짭이깐 등이 그것으로, 나라마다 맛과 향이 조금씩 다르다. 도서 지역에는 기름에 볶거나 튀긴 음식(고렝)이 흔하며, 이 지역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단(manis) 음식을 즐겨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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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라 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동심원의 중심 세력과 주변 세력들이 후견인-피후견인 관계를 바탕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후견인-피후견인 관계는 일방적이기보다는 쌍무적인 성격을 띠었다. 피후견인은 후견인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대결보다는 회피하는 방식을 취해, 자신에게 유리한 새 후견인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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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동남아시아 국가의 영향권은 경계가 분명한 영토에 기반을 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피라미드 체제의 통치권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때로는 상징적인 종주권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달라 체제의 또 다른 특징은 관심의 대상이 땅보다는 '인력'이었다는 점이다. 전쟁의 목적이 사람을 생포해 인적 자원을 늘리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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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에선 현재 700종이 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종교 역시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를 다 모아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전략적인 지명으로 동남아시아란 명칭이 대중화함에 따라, 학계에서는 이 지역이 인위적인 집합체인가 아니면 유서 깊은 문화적 실체인가를 놓고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다.
면밀히 검토해보면 동남아시아는 다양성 못지않게 상당한 공통성을 지닌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역사언어학자들은 이 지역의 수많은 언어들을 네 집단, 즉 몬-크메르어족, 말라요-폴리네시아어족, 따이-까다이어족, 티베트-버마어족으로 크게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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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크메르어족의 대표적인 언어가 베트남어와 크메르어다. 이들 언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비롯해 미얀마, 라오스, 그리고 태국의 고산 지대에도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따이-까다이어족을 대표하는 언어는 각각 태국과 라오스의 국어인 타이어와 라오어다. 베트남과 미얀마의 고산지대에도 이 어족에 속한 언어가 분포한다.
미얀마의 국어인 버마어, 그리고 대륙 동남아시아 고산지대에서 사용되는 꺼잉어(까렌어)는 티베트-버마어족이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등 도서 동남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한 언어들 대부분은 말라요-폴리네시아어족에 속한다.
오늘날 동남아시아 언어 분포는 대략 13세기에 형성되었다. 학자들은 이들 네 어족의 언어 모두가 남부 중국 어딘가에 뿌리를 둔다고 믿고 있다. 이들이 이주할 당시에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의 경계가 현재보다 훨씬 더 북쪽에 위치했다고 학자들은 강조한다. 중국의 한족이 남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던 서기전 3세기 이전, 오늘날의 중국 양쯔강 이남부터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은 인종, 언어, 문화적으로 고대 황허 문명에 기초를 둔 중국 중원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문화권이었다.
말라요-폴리네시아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로네시아족은 중국 남동부 해안에 기원을 둔다. 이 집단은 대략 서기전 4000년 이전에 타이완을 거쳐 바다로 대규모 이주를 시작해 도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군도 대부분 지역, 그리고 멀리 서쪽으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까지 퍼져나갔다.
-36

모계와 부계 양(쌍)계를 잇는 전통과 이로 인한 성씨와 혈통 개념의 부재가 종종 동남아시아의 공통적인 토착문화 요소로 거론된다. 오늘날에도 동남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이 성씨 없이 살아간다. 미얀마의 초대 총리 우 누는 이름이 누이며 '우‘는 성씨가 아니라 남성 이름 앞에 붙는 존칭이다.
여성의 높은 지위도 이 지역 전체의 공통적인 문화 현상으로 간주된다. 재산 상속이나 이혼 후 양육권 등에서 동남아시아의 여성들은 인도나 동북아시아 여성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권한이 컸다. 오늘날에도 동남아 시아에서는 부부가 이혼하면 자녀를 외할머니나 외삼촌, 즉 모계 쪽에서 양육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러한 여성의 지위는 전통시대에 적극적인 경제적 역할로 나타났다…. 남성은 전쟁과 사원 건축 등 국가 부역에 자주 동원되어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토양이 무른 화산 지대에서 비교적 수월한 농사 일을 여성들이 도맡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32-33

인도화와 중국화, 두 과정을 논할 때 공히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창의적 융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수용하지 않았다. 또한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예술의 상징과 미가 동남아시아 세계관으로 해석되어 재탄생했다. 보로부두르 불교사원과 마따람의 쁘람바난 힌두교사원, 미안마 버강의 불교사원,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 등이 인도문명의 현지화를 통해 탄생한 대표적인 고대 동남아시아 유적이다. 베트남의 경우 중국과 비교해 볼 때 여성의 높은 사회적 지위, 촌락의 강한 자치권, 그리고 중국어로부터 많은 어휘를 차용해 쓰면서도 엄연히 비중국적인 베트남어 등이 그 증거다.
하지만 인도와 중국 문화는 전통 동남아시아 지배층의 통치이념에 영향을 미치며 이 지역에 더 체계적인 국가와 사회가 출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이 지역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깊이 배어 있다. 동남아시아 토착 지배층은 힌두 사제계급인 브라만으로부터 인도 법전인 <다르마샤스트라>와 정치 교과서 <아르타샤스트라〉, 그리고 힌두-불교의 이념과 의식을 전수받았다. 또한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문자 체계와 말레이세계의 고어에 사용되었던 문자는 대부분 인도의 브라흐미 문자에 기원을 둔다. 동남아시아 고전문학의 대부분은 인도 굽타왕조 시대(2세기 후반~6세기 중반)에 완성된 2대 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54-55

참파는 오늘날 베트남의 꽝남, 꽝응아이, 빈딘, 나짱, 판랑, 빈뚜안 주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영향권으로 약 1800년 동안 존속했던 동남아시아 최장수 국가다. 서기전 1500년경부터 말레이세계에서 계절풍을 이용해 배를 타고 인도차이나반도 중부 해안 지역으로 와서 정착하기 시작한 말라요-폴리네시아 인종집단의 한 갈래인 참인이 늦어도 2세기 말에 오늘날 후에 근처에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안을 따라 서로 다른 수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 왕들의 비문으로 보아 참파는 단일 국가가 아니었다. 8세기 중엽에 중부 베트남 꽝남 일대에서 아마라바띠(지금의 다낭)가 번성했다. 같은 시기 남부 지역에 까우타라(지금의 나짱)와 빤두랑아(지금의 판랑)를 중심으로 한 국가가 두 곳 더 존재했다. 또 아마라바띠와 까우타라의 중간에 15세기 말까지 존재한 비자야가 있었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빤두랑아는 베트남의 공격에 저항한 참파의 마지막 보루로 19세기까지 존속했다. 최소한 네 개에 이르는 독립적인 소공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참파는 이들의 집합적인 명칭으로서 참인들의 문화권이었다.
-62-63

첸라는 7세기 중엽 크메르족이 푸난을 압도하고 톤레삽 호수 부근을 중심으로 건설한 국가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깜부자'라고 불렀으며, 오늘날 캄보디아란 국명이 이 명칭에서 유래했다. 
-69

오랜만에 들여다 보는 동남아 책들.


자야바르만 2세를 비롯해 앙코르의 왕들이 고대 동남아시아 만달라 체제 국가에선 흔히 볼 수 없는 매우 웅장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왕권 신성화에 집착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드라바르만(재위 877~839) 때부터 앙코르의 왕들은 '바라이'란 인공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 생산을 획기적으로 증대하고자 했다. 저수지와 저수지, 그리고 강물과 호수는 거미줄 같은 수로로 연결되었다. 앙코르는 연 2~3기작의 쌀 생산이 가능하도록 복잡한 대규모 저수 체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전성기에 앙코르는 성곽도시인 앙코르 톰의 4대문 안에 거주하는 지배층을 포함해 약 100만 인구를 부양했다. 하지만 앙코르 톰과 그 중앙의 바욘불교사원을 건축한 자야바르만 7세 (재위 1181~12191)를 정점으로 앙코르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막강하던 제국이 몰락의 길에 접어든 까닭은 무엇일까? 전성기 앙코르의 주 수입원은 풍부한 농업 생산과 방대한 영향권에서 거두어들이는 공납이었다. 공납을 강요받고 저항하는 피후견국들과 자주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 재정이 고갈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거대 사원과 신전을 축조하고 유지하는 비용이 앙코르의 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왕권 신성화를 위해 앞다투어 거대한 사원 축조에 몰 입하는 동안, 만달라 체제 국가의 유연성이 훼손되어 복원력을 잃고 멸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정교하고 복잡한 대규모 수로 및 저수 체계가 역설적으로 몰락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인공수로 체계의 관리 부실은 곧 토양 침식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의 급격한 저하는 물론, 모기로 인한 말라리아의 창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앙코르의 멸망을 14세기 태국 중원의 정치적인 변화와 연관 짓기도 한다. 13세기부터 따이족의 므엉(소공국)들이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14세기 중엽 짜오프라야강 중류에 아유타야 왕국이 등장한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14세기 말부터 앙코르는 아유타야의 대규모 침공을 받기 시작했다. 1431년 앙코르가 타이인들에게 점령되었다. 결국 1434년 앙코르는 수도를 오늘날의 프놈펜으로 옮겼다.
-93-94

타이족은 다른 인종에 비해 비교적 늦은 13세기에 대륙 동남아시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타이족은 오늘날의 중국과 베트남 경계 지역이 본향이었는데, 서기 이후 다양한 집단으로 분화해 점차 남쪽과 서남쪽 방향으로 확산했다. 10~12세기경 그들은 대륙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호령하던 앙코르 북부의 주변 지역에 분산 정착해 므엉(소공국)을 이루고 있었다.
13세기 대륙 동남아시아 북부에 정치적 격변이 일었다. 앙코르는 13세기 초부터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253년 몽골 원정군이 난짜오를 정복하고 1283~1301년엔 버강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변화는 주변부에서 움츠리고 있던 따이인들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었다. 그 결과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13세기는 실로 '따이족의 세기'라 할 만큼 이 시기에 따이족의 여러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오늘날의 태국 영토에 그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주역이 바로 쑤코타이와 란나다.
-100

사이렌드라는 해상무역과 더불어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한 국가였다. 중부 자바의 비옥한 머라삐 화산지대가 농업 생산의 중심지였다. 사이렌드라는 같은 대승불교 국가인 스리비자야와 돈독한 동맹 관계를 유지했는데, 국제무역에 의존한 스리비자아와 풍부한 쌀 생산력을 갖춘 사이렌드라는 공생 관계에 있었다. 사이렌드라의 막강했던 국력은 776년 비슈누 왕 때 건설되기 시작해 825년 사마리뚱가 왕 시대에 완성된 보로부두르 사원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사이렌드라 통치자들은 보로부두르 사원을 힌두- 불교의 성지인 메루산(수미산)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이 사원은 인도의 대승불교 사원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축조되었다. 총 길이가 5킬로미터에 달하는 5층 기단의 회랑 벽면에는 1층부터 차례대로 욕계, 색계, 무색계를 표현한 부조가 무수히 새겨져 있다. 맨 상층부엔 종 모양 탑인 수투파 72개가 일련의 동심원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인도의 대승불교를 만달라와 융화적인 세계관으로 재해석해 탄생시킨 대표적인 유적이다. 
-114-115

856년에 산자야 가문의 삐까딴이 중부 자바의 지배권을 되찾아 마따람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힌두교가 다시 융성하기 시작했고, 마따람은 보로부두르 동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쁘람바난 힌두사원을 건설하며 번영을 구가했다.
19세기 초 영국의 식민지 행정관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1781~1826)가 보로부두르 사원을 발견했을 때, 중앙의 첨탑을 제외한 사원 전체가 화산재에 파묻혀 있었다. 이 사실을 근거로, 머라삐 화산의 폭발로 인한 화재 지진 역병 등 자연재해가 천도 이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치열해진 마따람과 스리비자야 간의 무역 경쟁 이 천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116-117

인도네시아 통합의 역사를 시작한 주역은 싱오사리의 마지막 왕 꺼르따나가라(재위 1268~1292)였다. 이때부터 영향권이 자바를 넘어 현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공간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꺼르따나가라는 1284년에 발리를 정복하고, 이어 서쪽으로 나아가 1286년 멀라까와 순다 두 해협 일대에 대한 영향권을 확보했다. 
1292년 쿠빌라이가 자바의 왕을 응징하기 위해 군함 1000척과 함께 10만 대군을 파견했다. 동부 자바에서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정치적 소요가 발생했다. 70년 전 싱오사리에 의해 멸망한 끄디리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외중에 꺼르따나가라가 살해되었다. 1293년 싱오사리에 도착한 원나라 원정군은 복수할 대상이 없는 황당한 상황에 처했다.
꺼르따나가라의 사위 라덴 비자야는 원정군을 설득해 끄디리 반란 세력을 진압했다. 그런 다음 비자야는 원정군을 자바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한 비자야의 승리는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 승리가 전통시대 도서부 동남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고 강력하며, 오늘날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원형을 제공한 국가의 출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국가가 바로 1294년에 비자야가 건설한 마자빠힛 왕국이다. 
-124-125

1539년에 버마와 아유타야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아유타야는 포르투갈 군대를 용병으로 고용해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때 포르투갈군은 태국군에게 군대 조직법과 훈련법을 전수해 주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후 포르투갈군이 버마의 바인나움을 지원했다는 점이다.
아유타야의 경제 기반은 농업과 무역이었다. 특히 짜오프라야강 유역의 미곡 생산은 국부의 원천이었다. 유럽 중상주의 세력이 동서 바닷길에 등장한 뒤에도 태국은 그들을 자신들의 교역 체제에 잘 순용시키며 활발한 교역 활동을 이어갔다. 외국인들이 왕국 내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나레쑤언 시대에 아유타야는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국이었던 중국 외에 일본 네덜란드 영국과도 무역 관계를 맺었다.
태평성대가 지속되는 동안 군사력 단련에 소홀해졌고,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실과 관료 사회가 분열되었다. 결국 1767년 4월 7일 아유타아는 버마(꽁바웅)의 공격을 받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1-192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이어진 쳉호의 원정은 내란으로 쇠약해진 마자빠힛의 지배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마자빠힛의 피후견국들이 중국 함대의 존재를 의식해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는 한편, 후견 세력과 관계를 단절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인도네시아 군도에 이슬람교가 유입되면서 마자빠힛의 영향권 내에서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무슬림 국가가 하나둘 출현, 점차 마자빠힛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특히 1403년 말레이반도에 멀라까왕국이 출현한 것은 마자빠힛에 결정타가 되었다.
-202

15세기 아랍 페르시아 인도의 무슬림 상인들이 주도한 국제무역 붐에 편승하기 위해 자바 북부 해안의 세습 귀족과 중국인 세금 징수원들이 점차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점차 독립적이고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다. 16세기 초에 이르자 북부 자바 해안의 주요 항시들을 중심으로 이슬람 왕조들이 등장했다. 그들 중 가장 막강한 세력이 데막이었는데, 시조인 라덴 빠따는 자바인과 결혼하고 개명한 첵콕포라는 중국인 무슬림이었다. 
1521년 라덴 빠따의 아들인 뜨렝가나가 데막의 새 술탄으로 등위했다. 야심찬 정복 군주인 그는 1527년 마자빠힛의 심장부를 점령했다. 이로써 동남아시아 최대 힌두 왕국인 마자빠힛이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 많은 왕족과 귀족이 발리로 피신해 그곳에서 이슬람교의 침투에 대비해 힌두 체제를 유지 강화해 나갔다.
1294년부터 1527년까지 230여 년 동안 이어진 마자빠힛 시대에 현 인도네시아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 단일한 정치체가 되었다. 이 왕국은 20세기에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면서 인도네시아 공동체의 선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역사 인식에 따라, 만약 네덜란드의 식민지배가 아니었다면 1만 4000여 섬으로 이뤄진 인도네시아공화국의 탄생이 불가능했을 것이란 주장은 식민사관으로 일축된다.
-203-204

1546년 뜨렝가나가 사망하면서 데막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그 영향권에 속해 있던 세력들이 하나둘 이탈했다. 1570년경 그중 자바 중남부 지역의 마따람이 가장 괄목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 왕국은 1619년 바타비아에 무역 거점을 세운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와 정치, 경제적으로 경쟁하며 인도네시아 전통시대의 대미를 장식했다. 마따람은 17세기 전반에 과거 마자빠힛의 영향권 대부분을 차지했다.
서부 자바는 상황이 달랐다. 반뗀이 여전히 독립 왕국으로 남아 있었고, 1619년 VOC가 바타비아에 무역, 군사 기지를 건설하고 마따람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마따람과 VOC 간에 200년 이상 지속된 분쟁의 막이 올랐다.
-214

16~17세기 남부 술라웨시에서는 고와의 마까사르족과 보네의 부기스족이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두 종족은 인도네시아군도 전체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조선술과 포격에 관한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17세기 전반 남부 술라웨시 전 지역이 이슬람권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1640년대에 고와는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술탄 왕국이 되었다.
VOC는 종교적 알력으로 빚어진, 고와에 대한 보메의 적대감을 이용했다. VOC가 인도네시아군도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하나둘 정복해나가는 과정을 보면, 한 왕국의 영향권 안에서 후견 세력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피후견 세력에게 접근해서 합세해 후견 세력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곧잘 사용했다. 즉 만달라 체제의 특성을 이용해서 주변 세력과 새로이 후견 관계를 맺어 중심 세력을 분쇄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222


스리비자야의 왕자 빠라메스바라는 1403년 오늘날의 서부 말레이시아, 즉 단일한 말레이반도 정치공동체의 원형인 멀라까왕국을 건설했다. 멀라까는 전통시대 말레이세계에서 스리비자야를 계승한 대표적인 해상무역 왕국이었다.
말레이세계에서 해상무역을 지향한 통치자들은 교역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국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빠라메스바라는 통치 말기에 개종해 '이스깐다르 샤'란 왕호로 이슬람 군주인 술탄이 되었다.
-231

무역 발전을 위한 멀라까 자체의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멀라까는 해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오랑 라웃(바다 유목민)과 후견인-피후견인 관계를 맺었다. 또한 교역 관련 법과 행정 체계를 효율적으로 구축했다. 3대 술탄인 무함마드 샤(재위 1424~1444) 때부터 5대 술탄인 무자파르 샤 (재위 1446~1450) 때까지 거듭해서 개정, 편찬된 <멀라까법전>은 해상 교역에 관한 상세한 법령을 담고 있다. 국제도시 멀라까에는 상인뿐 아니라 노동자 기술자, 종교인도 모여들었다. 각 집단을 출신 지역별로 묶어 항구의 수장인 ‘샤반다르'가 통제했다. 통상 샤반다르를 4명 두었는데, 그중엔 인도인과 중국인도 있었다.
-232-233
 


대농장이 개발되면서 필리핀 사회에 계층 분화가 시작되었다. 처음 대농장에 투자할 수 있었던 사회계층은 세 부류였다. 국왕령이었던 토지를 매입해 보유한 스페인인, 교회, 그리고 중국인이나 중국인과 현지인 혼혈(메스티소)인 상업 자본가들이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대농장을 직접 경영할 수 없는 부재 지주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주에게서 토지를 임차한 후 그것을 다시 농민에게 임대하는 임대차농이 등장했다. 임대차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서 토지를 사들여, 대규모 환금작물 농장을 직접 경영하는 재지 지주층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이들 새 지주층은 교육에 열성적으로 투자해 마닐라뿐 아니라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로, 자녀를 유학보냈다. 훗날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의 주체가 되는 계몽지식인층 '일루스트라도스'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의 많은 수가 메스티소 가문 출신이다. 현지인과 중국인 혼혈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필리핀의 메스티소는 다른 지역의 혼혈인과 달리 유난히 필리피노라는 정체성이 강했다.
-256-257

19세기 후반 ‘일루스트라도스’라 불리는 신지식인 집단은 스페인에서 태어나 식민지로 이주해서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던 페닌술라레스에 맞서 정치, 농업, 교육의 개혁과 스페인 사제 추방 등을 요구하는 ‘프로파간다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프로파간다주의자로 호세 리잘, 그라시아노 로페스 하에나, 마르셀로 델 필라르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인종에 관계없이 필리피노(필리핀인)'라 불렀고 이로써 필리피노의 현대적 의미가 탄생했다.
-325


프랑스군은 1859년 사이공을 점령해 1862년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고, 1867년 남부 전체를 장악했다. 1893년에는 중부와 북부까지 손에 넣었다. 결국 1884년 파트노트르 조약이 체결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잃었다. 황실은 유지되었으나, 중부와 북부 지역은 보호령으로서 각각 안남과 통킹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고등주재관의 감독을 받는 황제의 명목상 지배지가 되었고, 남부는 코친차이나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총독이 직접 지배하는 식민지가 되었다. 
-274

타이식 표현으로 양쪽의 눈치를 살편다 해서 ‘머리 두 개를 가진 새’에 비유되는 캄보디아 왕실이 200여 년 동안 두 이웃나라에 시달려왔던 악몽에서 벗어나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두앙은 1853년 프랑스에 보호를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아들 노로돔(재위 1860~1904) 때인 1863년 프랑스 해군 장교들이 캄보디아를 방문했고, 노로돔은 그들에게 다시 보호를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278

1860년대부터 라오스로 밀려들기 시작한 태평천국 잔당은 1870년대에 들어서는 수도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싸얌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압력에 대처하느라 라오왕국을 보호할 여유가 없었다. 1888년 루앙프라방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를 새 후견국으로 선택했다. 1893년 10월 프랑스-싸얌 조약이 체결되었고, 싸얌은 루앙프라방에 대한 종주권뿐 아니라 메콩강 좌안, 즉 동부 전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루앙프라방은 비록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지만 중대한 실익도 거두었다. 베트남의 속지였던 쩐닌 지역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라오의 합법적이고 유일한 왕실로 인정받았다. 이 무렵에 처음으로 '라오스'라고 하는 정치적 실체가 만들어져 오늘날의 독립국가로 이어지게 되었다.
-282


라마 1세와 2세(재위 1809~1824), 3세(재위 1824~1851) 재위기까지 '초기 방콕 시기'로 불리는 약 반세기 동안 왕권의 안정은 싸얌의 경제적 번영으로 이어졌다. 불교경전들이 새롭게 번역되었고, <라마야나>와 중국의 <삼국지연의>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의 고전이 타이어로 재창조되었다. 특히 <라마야나>의 태국판인 <라마끼엔>은 총 102권으로 가장 길고 가치도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290

태국의 독립 유지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적 역량, 특히 밀려드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위험에 직면해 타이 왕들이 발휘한 대처 능력의 결과다.
몽꿋, 라마 4세(재위 1851~1868)가 즉위한 다음 해인 1852년 영국은 버마와 전쟁을 시작했고, 마침내 승리했다. 여세를 몰아 영국은 홍콩 총독인 존 보링을 사절로 보내 싸얌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항들이 담긴 조약 문안을 내밀었지만 1855년 몽꿋은 보링 조약에 저항 없이 서명했다. 조약으로 인한 왕실과 귀족들의 경제적 손실을 기꺼이 감수하는 대신, 어떤 형태로든 손실을 보상받을 방안을 강구했다. 예컨대, 아편 술 복권 판매와 도박장 운영 등에 대한 징세 청부제를 강화하여 세수를 늘리는 방침을 세웠다. 그 후 라마 4세는 프랑스 독일 미국 이탈리아 벨기에 덴마크 등과도 조약을 체결했다.
몽꿋에 이어 라마 5세로 즉위 한 쭐라롱꼰(재위 1868~1910)은 개혁 군주로 유명하다. 그는 노예제도와 자유민의 강제 노역을 폐지하고 군대, 세제, 법 체제 등을 현대식으로 개편했다. 보통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방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철도를 부설하고, 증기선을 도입했다. 근대화 개혁 정책이 군주의 자발적 노력으로 적극 추진된 것은 적어도 당시 아시아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개혁을 위한 왕권을 강화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들은 쭐라롱꼰의 형제인 왕자들이었다. 그들 중 여러 명이 서양에 유학해 전통 교육과 서구 교육을 겸해서 받고, 왕실 보호와 싸얌 근대화에 대한 사명감 과 책임감을 진지하게 공유한 젊은 세대였다. 이들은 국가의 행정, 사법, 문학, 군대,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근대 역사학의 발전에 공헌한 담롱 왕자, 외교 분야에서 활약한 데바웡지 왕자, 근대법 도입을 주도한 라비 왕자가 대표적인 예다.
이 시기에 태국은 판도가 가장 넓었던 라마 3세 시기 영토의 반을 서구에 양도했지만 엄밀한 의미의 영토 할양이 아니라 만달라 체제의 영향권에 대한 종주권의 포기였다. 태국은 ‘살을 내주고 뼈를 지키는 전략’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292-293


19세기 초반 아쩨는 세계 후추 공급량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고 있었다. 1871년 11월 체결된 영화조약에서 영국은 수마뜨라에서 손을 떼고 네덜란드에게 지배권을 넘기기로 했다. 이는 곧 아쩨전쟁(1873~1881)으로 이어졌다. 이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군도에서 이슬람교 이데올로기가 확고하며 막강한 무장도 갖춘 적을 본격적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1903년경 많은 울레발랑(전통 귀족 계층)의 협조로 아쩨에 안정적인 식민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아쩨 무슬림은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울레발랑이 식민정부에 협조함에 따라 그들과 이슬람 세력 간에 심각한 갈등이 일었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기(1945~1949), 즉 독립전쟁 초기에 울레발랑에 대한 집단적인 학살극으로 이어졌다.
아쩨를 끝으로 1910년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모든 지역이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지배권으로 편입되었지만 아쩨인의 마음속에서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재정복하려 했을 때, 아쩨는 그들의 재진주를 허용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었다. 
-305-307

1824년 3월에 체결된 영화조약은 오늘날의 멀라까를 포함한 말레이반도,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군도를 각각 영국과 네덜란드의 영역으로 구분했다. 그 결과 영국령 말라야와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두 식민지 세력권이 형성되었다. 이 조약은 뒤에 말레이세계가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두 국민국가로 나뉘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315

1851~1866년 네덜란드 국고 중 32~34퍼센트가 인도네시아의 송금으로 충당되었다. 이 재정으로 네덜란드는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으며, 암스테르담은 커피 설탕 등 열대 농산품을 세계에 공급하는 주요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강제 경작 제도의 성과는 자바 농민의 체력과 생명을 희생시킨 결과였다. 농민이 병으로 쓰러지고 아사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참상이 네덜란드 본국에도 알려졌다. 1860년, 전 식민지 관리였던 에뒤아르트 다우어스 데커르가 소설 <막스 하벨라르>를 출간했다. 결국 강제 경작제도는 1870년에 공식 폐지되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이른바 ‘윤리정책'이 등장했다. 골자는 인도주의와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20세기 들어서 인도네시아는 원유와 고무 생산으로 세계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1883년에 네덜란드인 사업가 지이커르가 북부 수마뜨라 랑깟에서 석유 시추를 시작해, 1888년 경제성이 충분한 질 좋은 원유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1890년 그는 네덜란드왕국석유회사를 설립했다. 1907년에 이 회사와 영국 셸사가 합병해 '로열더치셸‘'이라는 당시 세계 최대의 다국적 석유기업이 탄생했다. 고무 산업도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 편승해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식민정부는 1864년부터 서부 자바와 동부 수마뜨라 해안에서 토종 고무나무의 플랜테이션 재배를 시험했다. 하지만 고무 산업이 본격화한 것은 1900년 브라질이 원산인 개량종 고무나무 재배에 성공하면서부터다.
-358-359

20세기 들어 풍부한 목재가 북보르네오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떠올랐다. 1885년 2월에 원목이 처음 오스트레일리아로 수출된 뒤, 당시 중국에서 진행되던 철도 확장사업으로 갱목 수요가 급증하면서 목재 수출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원시림 개발은 중국인 노동력의 이주로 이어졌다. 1907년 북보르네오 전체 노동력의 50퍼센트 이상을 중국인이 차지했다.
1920년 이후 목재가 북보르네오에서 가장 중요한 수출 상품이 되었지만 북보르네오의 경관을 전반적으로 지배한 것은 고무였다. 
-385
 


노예무역은 VOC와 발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1641년에 VOC가 장악한 멀라까가 말레이세계 노예 시장의 중심이 되었다. 발리 왕국들은 아편, 각종 사치품, 특히 무기 구입을 위해 멀라까에 노예를 수출했다. 그 결과 식민지 시대 전야에 발리는 힌두문명을 지닌 이국적인 섬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야만적인 노예 무역의 본고장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230

1906년과 1908년 두 차례 일어난 뿌뿌딴(집단 자살 저항)을 무릅쓰고 네덜란드는 발리를 정복했다. 네덜란드는 1920년대 초에 이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네덜란드는 뿌뿌딴의 잔학성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에 직면해 있었다. 식민정부는 한편으로는 관광산업을 통해 발리의 안정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식민정부는 당시 자바와 아쩨에서 각각 개혁주의 이슬람 단체인 무함마디야와 빠드리운동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이슬람 개혁운동이 발리로 번져 오지 못하게끔 발리의 힌두 전통문화를 보존,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힌두교는 발리 전통문화의 토대이자, 이슬람의 확산을 막는 방패인 동시에 관광산업을 위한 상품이었다. 관광은 발리를 대표하는 이미지이자 주요 경제수단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유럽 문명에 염증을 느낀 서구 부유층 사이에선 이른바 ‘미개'의 이채로운 문화를 보고 체험함으로써 피폐한 정신을 치유하는 여행이 유행했다. 네덜란드 왕립해운회사(KPM)는 ‘미개'를 연상케 하는 폭포 화산 계단식논 열대우림 등의 자연 경관과 힌두교 사원 같은 전통 문화유산을 결합해 관광코스를 개발했다. KPM은 이 관광코스를 따라 박물관을 건축하고, 관광객이 묵는 호텔에서 발리의 전통춤을 공연했다. 찰리 채플린이 휴가 여행으로 발리를 관광했고, 석유 재벌 넬슨 록펠러도 신혼여행으로 발리를 다녀갔다. 이 시기 서구에서 발리의 문화는 책 영화 여행 상품으로 유행했다. 
-362-363

1931년엔 독일인 빅토어 폰플레센이 <악마들의 섬〉이란 영화를 찍어 이른바 원숭이 춤이라는 '께짝 댄스'를 유럽인들에게 소개했다. 멕시코 작가인 미겔 코바루비아스가 1937년에 쓴 책 <발리섬>은 가슴을 드러낸 소녀, 야지수, 굽이치는 파도와 해변의 사진을 전면부에 내세우며 남태평양의 낙원과 같은 발리의 낭만적인 인상을 굳혔다.
하지만 발리인들 역시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변화하는 상황에 적절히 대처했다. 특히 왕족들은 정치적인 힘을 상실했지만, 종교 의식과 예술 공연 등을 후원함으로써 지위와 권위를 유지하고, 전통의 보존에도 기여했다. 식민지 시대에 관광을 목적으로 추진된 '발리화' 과정은 비록 식민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 시기에 발리 힌두문화는 식민지배라는 외적 동학과 발리인들의 창의적인 대응이란 내적 동학의 결합을 통해 발리인의 정체성으로 뿌리를 내렸다. 
-364-365


미국은 1902년 7월 필리핀 정부재구성법을 통해 필리핀군도를 여러 주로 나누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그 주들 중 하나가 민다나오와 술루 군도를 아우르는 모로주였다. 미국 식민지배하에서 필리핀의 한 주가 된 모로랜드에서는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고, 비무슬림 교과 과정을 가르치는 현대식 공립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서구식 법 제도가 도입되었다.
1913년 모로 저항세력이 미군에 무참히 진압된 버드박삭 전투를 기점으로 그들의 기세가 현저히 약해졌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민다나오에 기독교도 필리핀인들의 정착지를 건설한 것이었다. 이 정책으로 1918년에 이미 민다나오에서 모로와 기독교도 인구 비율이 같아졌다. 1939년에는 기독교도가 모로 인구를 두배 가량 앞질렀다. 
-389-390

중부 루손에서 발생한 훅발라합(훅스) 소요는 1954년 진압될 때까지 약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공화국 행정부는 훅스 세력의 기세를 꺾으려고 그들의 가족을 대거 민다나오로 이주, 재정착시켰다. 본래 재정착 프로그램은 전쟁 전 미국의 식민지배 시기에, 민다나오에 기독교도를 이주시켜 농업 정착지를 개발하려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훅스 가족의 이주는 전후 대규모로 진행된 재정착 프로그램의 일부에 불과했다. 독립 후 새 공화국 행정부가 식민지 정책을 답습한 것이었다.
-665

중앙 정부는 교육도 국가 통합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탄생한 모로 신지식층들은 '모로 민족' 개념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단일한 모로 민족에 속하며, 나아가 더 큰 이슬람 공동체, 특히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무슬림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에 중앙정부 장학금을 받고 모로 학생 수백 명이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알제리 리비아 등 이슬람 세계에서 수학했다. 그들은 남부 필리핀의 작은 공동체를 넘어 더 큰 이슬람 세계를 보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다른 이슬람 지역에서 온 동료들과 접촉하면서 국제적인 연계망을 형성해 나갔다.
1968~1970년 반정부 저항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 라나오 출신인 다뚜 라쉬드 루크만은 남부 필리핀의 모든 투쟁 세력을 망라한 모로민족해방기구(BMLO)를 결성했다. 1971년 루크만을 포함한 모로 지도자들이 리비아를 방문하여 카다피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민다나오에서 무슬림과 기독교 사회의 긴장이 마침내 1970년 중반 폭력 사태로 분출되었다. 이 사태는 단순히 무슬림 민병대와 기독교도 자경단 간의 싸움을 넘어, 한쪽이 다른 편의 마을을 공격하고 불태우면 공격을 당한 쪽이 즉각 반대편 마을을 파괴하는 복수의 악순환으로 치달았다. 
-666-667


베트남 근대 민족주의 운동은 20세기 초에 이른바 '신서 세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신서란 1900년 전후에 중국의 두 근대화 사상, 즉 양무와 변법자강에 관한 책을 일컫는다. 베트남 신서세대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책으로 서구의 저작을 한문으로 번역한 루소의 <민약론(사회계약론)>과 스펜서의 <진보: 그 법칙과 원인>, 동양의 저작으로는 캉유웨이의 저술과 량치차오의 <무술정변기>를 비롯해 <신민총보> <일본유신삼십년사>, <영환지락>, 〈중동전기본말> 등을 꼽을 수 있다.
신서 세대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의 두 주역은 판 보이 쩌우와 판 쭈 찐이다. 판 보이 쩌우는 1904년 4월 유신회를 결성하고, 베트남 최초의 혁명적 역사서 <월남망국사>를 저술했다. 또한 그는 청년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그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이들의 유학을 가리켜 '동유 운동'이라고 한다.
-394

1920년 5월 그들은 ISDV를 '동인도공산주의자연합'으로 개칭했고, 1924년 인도네시아공산당(이하 PKI)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렇게 해서 1921년 창당된 중국공산당보다 1년 일찍 아시아 최초의 공산당이 인도네시아에서 탄생했다. 1926~1927년 PKI가 기획한 봉기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 1308명은 이리안자야의 악명 높은 보벤디굴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 후 PKI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20년대에 종교나 사회주의 색채를 띠지 않은 세속적 민족주의 단체들이 나타났다. 모함마드 하따(1902~1980), 수딴 샤흐리르(1909~1966) 등 네덜란드에서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주축을 이룬 한 집단은 1908년에 유학생들이 결성했던 동인도협회를 1922년 인도네시아협회(PI)로 개칭하고 민족주의 정치단체로 변모시켰다. PI는 식민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동인도'를 대신해 '인도네시아'란 새로운 민족정체성 개념을 창안했다.
국내에선 수까르노(1901~1970)가 세속적 민족주의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바의 공립학교 교사인 아버지와 발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1년 수까르노는 반둥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반둥은 이슬람 개혁주의 운동과 PKI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수까르노는 이슬람-마르크스주의-민족주의 세 요소의 결합을 주장했다. 교도민주주의 시기(1957~1965) 수까르노 정치체제의 핵심 이념인 나사꼼NASAKOM(민족주의nasionalisme-종교agama-공산주의komunisme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조어)이 이렇게 잉태되었다.
-419-420

연합군의 승리가 임박한 가운데, 1945년 3월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은 인도네시아독립준비위원회(BPUPKI)를 설립하고 독립을 향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5월 말 첫 번째 회합이 자까르따에서 열려 라지만 웨디오딩랏 의장을 포함해 수까르노, 하따 등 민족주의 지도자 62명이 참석했다. 그들은 이슬람과 세속적 민족주의를 둘러싸고 독립 인도네시아 국가 이념에 관한 논의를 벌였다. 후자를 선호한 수까르노는 1945년 6월 1일 연설에서 현대 인도네시아공화국의 핵심 국가이념인 '빤짜실라'를 발표했다. 이는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가 세속적인 국가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헌법에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조항을 명문화하자고 주장한 무슬림 집단이 빤짜실라 다섯 원칙에 첫 번째로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넣는 방안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461

일본군은 연합군의 명령대로 질서를 유지하지 않고, 혁명 세력에 무기를 넘겨주고는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 후 연합군이 몇몇 도시 중심부를 점 령하려 하면서 혁명 세력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동부 자바의 수라바야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이 지역은 인도네시아 혁명기에 '저항의 아이콘'이 되었다. 
영국군은 3일 내에 수라바야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이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기까지는 3주 이상이 걸렸다. 인도네시아인이 최소한 6000명 희생되었지만 그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 전투를 통해 영국은 혁명에 대한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확인하고, 인도네시아를 조기에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도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이 단지 일본의 부추김으로 급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1945년 말까지 인도네시아의 초기 혁명은 다양한 혁명 세력에 의해 자발적으로 펼쳐졌다. 이 시기에 혁명은 사회계층 간의 끔찍한 살육전 양상을 띠었다. 공화국을 지지하는 혁명 세력이 일제 부역자, 식민지 관리. 암시장의 중국인 상인 등을 공격했다. 또한 아쩨에서 공화국을 지지하던 울라마들이 네덜란드와 일본의 조력자로 낙인찍힌 울레발랑들을 살육했다. 미낭까바우에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빠드리 세력이 귀족 집단인 뻥훌루를 공격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
-524-525

네덜란드는 공화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필사적인 시도를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무력 행동은 국제 사회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네덜란드에 대한 원조를 연기하고, 마셜 플랜에서 제외하겠다고 압박했다. 1949년 12월 28일에 네덜란드는 이리안자야를 제외하고 모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독립 국가로 인정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인도네시아와 베트남만이 혁명을 통해 독립을 달성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네덜란드 재점령에 대항한 무장 투쟁과, 냉전에서 비롯된 우호적인 국제 환경의 결합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내부에 혁명을 이끌 동력이 부재했다면 효과가 미진했을 것이다. 그들에겐 교육받은 민족주의 지도자들, 이슬람 지도자들, 독립을 열망하는 정치의식을 갖춘 청년층, 그리고 정예 군대가 있었다. 또한 외세의 지배를 다시는 허용할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공화국 정부를 필사적으로 지지한 민중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인도네시아인의 결단, 무장 투쟁, 공화국 정부를 중심으로 한 혁명 세력의 결집, 유리한 국제 환경과 효과적인 외교의 결합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인 인도네시아를 탄생케 한 것이다.
-531-532


프랑스 비시 정부(1940.6~1944.8)의 등장은 1938년 10월 광둥을 점령한 후 인도차이나를 노리던 일본에게 호재였다. 1940년 6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에게, 중국-베트남 국경의 통관을 차단하고 그곳을 감시할 군사 사절단 입국을 허가하라고 요구했고, 이를 관철했다. 이어 7월에 일본은 중-베트남 국경을 침공하고, 8월에 하노이에 입성했다. 9월에 프랑스와 맺은 군사협정으로 일본은 비행장 3곳의 사용권, 그리고 2만 5000명 이내의 일본군이 북부 베트남을 경유해 중국으로 진주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받았다. 이로써 일본은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을 차단했을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점령의 전진기지로서 인도차이나를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지배를 대체할 인력도 부족했고 독일의 동맹국으로서 독일과 프랑스가 체결한 정전협정을 존중해야 했기 때문에, 1945년 3월 초까지 프랑스 식민정부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인도차이나에서는 이처럼 기이하게 두 식민 세력이 공존했다.
드골 정권이 친독 비시정권을 대체함에 따라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와 일본의 갈등이 더욱 증폭되었다. 1945년 3월 9일 일본은 베트남에서 쿠 데타를 일으켜 4년 반에 걸친 두 식민 체제의 불편한 동거를 청산했다. 그 결과 베트남에서 80여 년 동안 이어졌던 프랑스 식민 통치가 막을 내리고, 일본군 사령관이 지배하는 군정이 시작되었다.
-441-445


아웅 산은 1947년 2월 12일 샨주의 뻥롱에서 샨, 까친, 친족 등 소수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협상을 시도했다. 그는 샨주와 까친주의 자치 요구를 수용하고, 통합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최대 소수민족인 꺼잉족(까렌족)은 협상을 인정하지 않고 1947년 4월 9~10일 실시된 총선을 거부했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을 지원하면 독립국가를 세우게 해주겠노라는 약속을 영국의 일부 고위 관료에게서 받은 터였다.
새로 구성된 의회는 버마가 영연방에 합류하지 않고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헌법안을 의결했다. 이로써 버마는 영국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신생 국가 중 영연방 합류를 거부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독립을 눈앞에 둔 시점에 갑자기 아웅 산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1947년 7월 19일 아웅 산과 각료 6명이 각료 회의실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515

꺼잉족을 필두로 식민지배 기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친, 샨, 까친족 등 소수민족의 반란은 이후 버마 현대사의 중심을 차지했다. 소수민족들은 처음부터 버마가 독립하면 버마족을 위주로 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의 분리주의 운동은 전후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긴 내전이었다. 1950년대 중반 여카잉(아라칸) 로힝자족 무슬림의 반란도 정부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603

식민지배 이후 외부에서 닥친 가장 큰 위협은 중국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군대의 이주였다. 1949~1950년 국민당 잔당 약 2000명이 샨주로 들어왔다. 1952년에는 약 1만 2000명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지원을 받으며 버마 국경 안에 머물며 아편 밀무역자나 무기상으로 활동했다. 버마 정부는 샨족 지역 33곳 중 22곳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1961년에 가서야 버마 군대가 PRC와 합세해 국민당 잔당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607

1962년 3월에 우 누의 문민정부를 종식한 네윈 장군(1911~2002)의 혁명평의회는 불교사회주의를 폐기하고 '버마식 사회주의'를 새 국가이념으로 도입했다. 양이 정책으로 외국인 기자의 입국 및 체류가 금지되었다. 심지어 양공의 외교관들조차 여행할 때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외국인의 체류는 관광 비자를 통해 최고 일주일로 제한되었다. 
혁명평의회는 외국 기업과 대규모 국내 기업을 모두 국유화했다. 1963~1964년 수천 명에 이르는 인도인과 파키스탄인이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남아시아로 돌아갔다. 쌀을 포함한 모든 생필품의 국내 유통은 물론 국제 무역도 정부가 독점했다. 모든 토지가 공식적으로 국가 소유가 되면서 농업도 정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692

네윈 정권은 소수민족 문제와 공산주의 세력의 무장 봉기에도 강력하게 대응했다. 1980년대 중반 꺼잉민족해방군(KNLA)과 버마적기파공산당(CPB) 모두 심각한 시련에 직면했다. 꺼잉민족해방군이 여러 해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태국과 버마 사이의 밀수 창구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버마로 밀수입 되는 모든 상품과 버마에서 밀수출되는 가축 목재 보석 등에서 관세 10퍼센트를 징수했다. 하지만 1985년 버마와 태국 정부가 협력하면서 양국 경계 지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큰 재정 수입원을 상실하고 힘을 잃어갔다.
독립 후 버마의 외교 정책은 일관되고 철저하게 중립을 표방하며 유엔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국가 연합체나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는 버마의 지정학적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버마는 태국 라오스 중국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기에, 냉전의 와중에 그 이웃들 중 하나와 동맹을 맺는다면 분명 다른 이웃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예컨대 버마는 1997년 까지 아세안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695

1989년 초 몇몇 소수민족의 소장파 군인 집단이 노쇠한 반정부 지도자들에게 반기를 들고, 정부군과 정전 협상에 돌입했다. 1990년대 중반에 17개 소수민족 세력이 정부군과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소수민족 집단 중 가장 세력이 강한 꺼잉민족연합(KNU)만이 협상 타결에 실패했다. 평화가 정착된 지역에는 상당한 수준의 자치가 허용되었고, 경제적인 지원도 제공되었다. 도로와 교량 등 기반시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빈곤이 만연한 반군 지역에서는 아편이 가장 비중이 큰 환금작물이었다.
-699


고무보다 주석이 정부의 세입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한 까닭에, 기반시설을 포함한 발전에 주석 산업이 더 많이 기여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말레이반도의 주요 도시들은 주석 산업에 힘입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고무 농장이 들어선 지역에서 도시의 발전은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고무나무 플랜테이션과 주석 광산 개발은 말레이반도에 중국인과 인도인의 대대적인 유입을 초래했다. 오래전부터 중국 인도 아랍 상인들이 빈번히 드나들었지만 오늘날 말레이시아 다인종 사회의 형성은 20세기 초 30여 년에 걸친 영국 식민지배의 유산이다. 영국인들이 보기에 ‘게으른 말레이인'은 경제적 활용 가치가 적었기에, 더 '근면한 인종'으로 생각되는 중국인과 인도인의 이민을 적극 장려한 결과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다인종 사회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식민정부는 ‘말레이인 우대 정책' 명목하에 술탄의 형식적 의례적 지위를 보장하고, 말레이 귀족층의 자제를 하급 관리로 등용하고, 전통 사회와 문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말레이인 대부분을 농촌에 머물게 하는 방침을 취했다. 그러는 동안 말레이인 사회가 근대화의 흐름에서 소외되어 '화석화'되었던 반면, 이민족 집단들은 근대화에 편승해 식민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하부 담당자가 되었다. 그 결과 식민지배하에서 세 인종집단이 각기 다른 경제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375-376
 
말라야연방(1963년 이후 말레이시아연방)은 온건한 보수 정당들의 동맹이 영국과 협상을 벌여 비교적 평화롭게 독립을 획득했다. 그 결과 이 신생 국가는 자연히 식민지배의 여러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세 인종집단을 대표하며 탄생한 친영국 성향의 연합말레이민족기구(UMNO), 말라야중국인협회(MCA), 말라야인도인의회(MIC)로 구성된 동맹당이 독립 말라야연방을 이끌게 되었다. 세 기구의 지도자들은 영국의 말레이인 우대 정책 즉 '말라야는 말레이인의 나라'라고 하는 말레이인의 역사적인 권한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각각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 사회의 권익을 협상하고 대변하며 국가 정책 을 수행했다.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미봉적으로 합의한 채 연방이 출범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식민지배가 남긴 가장 뿌리 깊은 유산이었다. 독립 후 치러진 1959년 총선에서 동맹당은 연방의회와 주의회에서 모두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동맹당 구성원들이 독립 당시 합의했던 인종집단 관련 정책들은 별다른 도전을 받지 않았다.
-636-637

말라야의 독립을 위해선 중국인 사회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다또 온, 압둘 라만과 마찬가지로 MCA의 의장인 탄쳉록 역시 인종통합 의지가 강했다. 다인종 사회에서 전통 세력일 뿐 아니라 다수 인종인 말레이인 사회를 대표하는 UMNO가 소수인종 대표들을 포용하지 않았더라면 말라야 독립 과정은 더 험난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타협과 협상을 통한 말라야 독립 과정은 말레이인의 융화적인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545

연방정부는 인종집단 간 유혈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970년 8월 31일에 선포된 '루꾸느가라(국가의기둥)’란 국가이념에 명시된 바와 같이 새 정부는 인종집단에 대한 기존의 이원적인 분리 정책과 동화 정책을 대신해, 다인종 사회의 다양한 문화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단일 말레이시아인 사회로 전환하고자 하는 통합 정책을 세웠다. 1970년에 공식적으로 출범한 라작 정부(1970~1976)는 이 같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1974년, 독립 협상의 산물인 동맹당을 해체하고, 국민전선이란 새 정치 조직을 통해 신질서를 구축했다. 부미뿌뜨라(말레이 원주민) 우대 정책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민통합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가장 괄목할 만한 정책은 경제 분야에서 나왔다. 라작 정부는 1971년부터 1990년까지 20년에 걸쳐 진행될 장기 경제발전 계획인 신경제정책(NEP)을 발표했다. 첫째 인종집단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의 소득 수준을 향상해 궁극적으로 빈곤을 퇴치하는 것, 둘째 인종집단의 인구 구성비를 바탕으로 고용구조와 국가 자산 소유 비율을 1990년까지 말레이인 30퍼센트, 비말레이인(중국인과 인도인) 40퍼센트, 외국인 30퍼센트로 재편하여 인종집단 간의 경제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전문직 분야에서 인종집단 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1971년 헌법 수정을 통해 국공립 고등교육기관에 인종집단의 인구 비례별 입학정원 할당제도를 도입했다.
-728-731

마하티르 정부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법 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8년 수정 헌법은 "고등법원과 하급법원은 샤리아법원의 사법권 내에 있는 어떤 문제에도 사법권을 갖지 않는다"고 규정함으로써, 독립 이후 처음으로 샤리아법원의 독립적인 사법권을 인정했다. 샤리아법원에도 하급법원-고등법원-상고법원의 3심제가 도입되어, 샤리아법 행정체계의 현대화가 이뤄졌다. 또 하나 눈에 띄는 변화가 금융 분야에서 일어났다. 1982년 이슬람은행법이 통과되어 공식적으로 이슬람은행 설립의 길이 열렸다.
-735

브루나이 술탄은 석유 세입 배분 문제로 말레이시아연방에 합류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브 루나이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남았다. 말레이시아연방 결성에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강하게 반발했다. 수까르노 대통령은 신식민주의 음모라며 대결을 선언했고, 필리핀은 예전에 북보르네오가 술루왕국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
유엔 실사위원회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주장을 일축했고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연방이 출범했다. 사라왁과 이 때 사바로 개칭된 북보르네오가 싱가포르와 함께 연방에 합류하면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545


1970년 5월 미국과 남베트남 연합군이 동부 캄보디아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몰아내려고 침공하면서 베트남전쟁이 캄보디아로 확대되었다. 이 여파로 1970년에 약 3만 5000명이던 캄보디아 정부군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2년 후 약 20만 명으로 늘었다. 또한 미 공군은 1970~1973년 크메르 루주 세력을 괴멸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2875회 공습을 감행하며 폭탄 24만 톤을 투하했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투하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 세력은 약화하지 않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피난민이 양산되었을 뿐이었다. 
1975년 4월 1일 론 놀은 인도네시아를 통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4월 17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했다. 실권은 크메르 루주 지도부 3인방인 폴 포트, 키우 삼판, 이엥 사리가 장악하고 있었다. ‘앙카’라는 비밀위원회가 대중 선동을 이끌었다. 앙카는 노동자 농민의 지도자임을 자처하는 전위대였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면 폐지되면서 시장 전화 전보시설 사유재산 임금노동이 사라졌다. 학교는 폐쇄되었고, 서적의 80퍼센트가 혁명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다. 사원은 쌀 창고로 바뀌었다. 가족 단위는 1000가구를 한 단위로 한 농업생산 연대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핵심 정책은 ‘범 국가적인 농업화’였다. 정권은 4개년 발전 계획을 수립했는데, 중국을 본떠서 이 계획을 ‘대약진운동’이라고 불렀다.
-587-588

베트남전쟁이 가열되면서 라오스의 중립은 이제 사실상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쟁 기간 내내 라오스는 외국이 통제하는 세 지역- 호찌민 통로를 포함해 북베트남이 통제하는 동부, 미국과 태국이 통제하는 메콩강 우안 즉 서쪽 기슭, 그리고 중국의 도로 건설단이 공사를 하고 있는 북부-으로 분리되었다. 라오스의 우파와 좌파 모두 어쩔 수 없이 각각 미국과 북베트남 간 전쟁의 부속 도구가 되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10년 동안 라오스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남부 베트남으로 침투하는 호찌민 통로와 북동부 씨앙쾅의 항아리평원에 대한 지상전과 공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동안 가장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미엔, 몽, 따이족을 비롯한 고산지대의 소수민족들이었다. 미국, 북베트남 또는 빠텟 라오는 이들을 편 갈라서 전쟁에 동원했다. 전쟁이 격해지면서 미국이 동원한 소수민족은 생필품 수급을 오로지 미군 수송기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은 '식량이 하늘에서 온다’고 믿으며 생존을 위해 미국 편에 서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라오스의 전쟁은 한편으론 2차 인도차이나전쟁의 부속에 불과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 미국이 국내 사정으로 인도차이나에 더 이상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쑤완나품과 쑤파누웡은 즉각 싸왕왓타나 왕을 접견하고 퇴위를 요구했다. 왕은 받아들였고, 45명으로 구성된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가 1975년 12월 2일 왕의 퇴위를 공식 의결했다. 이로써 6세기 동안 지속된 라오스의 군주제 시대가 막을 내렸고,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598-600

정권 초기의 심각한 정치, 경제적 위기 상황에도 정부는 이웃 캄보디아와는 대조적으로 최근까지 라오스를 흔들림 없이 통치해왔다. 역사학자 그랜트 에번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주변부 사회주의'에 입각한 당의 '유연한’ 정책을 꼽았다. 1978년에 정부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1979년부터 신경제정책 도입을 결정했다. 골자는 사회주의 체제 이행의 감속과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점진적 도입이었다. 정부는 집단농장화에 대한 농민의 반발이 거세지자, 그 정책을 강제로 시행하지 않고 사적인 이익을 보장하는 자유 영농 방식을 도입했다.
까이손은 베트남의 도이머이(쇄신) 정책 도입과 비슷한 시점인 1986년 11월 LPKP 전당대회에서 '찐 따나깐 마이(신사고) 정책을 내세웠다. 이 정책은 사회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국영기업 민영화, 외국인투자법 제정, 가격통제 폐지와 유통 자유화, 환율 조정, 각종 보조금 폐지 등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하는 자유화와 개방화를 골자로 했다.  
학자들은 LPRP 정부가 장기간 존속한 또 한 가지 원인으로 베트남과의 우호협력 관계를 꼽는다. 라오스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중국. 소련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강화해나갔다. 1980년대 중반부터 동서 냉전의 기류가 점차 약해짐에 따라 라오스는 외교 관계의 다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태국과 중국은 물론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국가와도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685-687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남부 태국에서 반정부 무장투쟁에 가담했던 젊은 세대는 이슬람의 대의를 실천하고자 아프가니스탄이나 다른 격전지로 발길을 돌렸다. 1990년대 중반 그들이 태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1995년, 빳따니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웠던 전사들이 '빳따니이슬람전사운동(GMIP)을 결성했다.
남부 태국 지역에 GMIP가 등장한 때, 북부 말레이 반도의 끌란딴에서 끌란딴무슬림운동(KMM)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둘 다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 유학해서 훈련받은 경험을 공유하고,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알카에다와 교류한 말레이 무슬림 청년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709

신질서에서 중국인 사회와 군부의 관계가 극적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부패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바바 알리’라 불린 정경유착 관계를 통해 중국인 사업가들은 부패한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 축재를 중개하고 위장하는 앞잡이가 되었다. 가장 유명한 중국인 사업가가 '소도모 살림'으로 알려진 리엠 시오 리옹이다. 그는 수하르또와 사적인 관계를 맺고 인도네시아에서 최고 부자가 되었다.
-716

쿠데타 과정에서 군부를 도와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새 정권 창출에 앞장섰던 이슬람 세력이 보상 차원에서 정치적 지분을 요구했다. 부담을 느낀 수하르또는 이슬람의 탈정치화를 추진했다. 신질서하에서 양대 이슬람 조직인 무 함마디야와 NU는 주로 선교와 복지 활동에 주력하는 종교, 사회단체로 바뀌어 인도네시아 사회의 이슬람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신질서 시기의 괄목할 만한 변화로 인도네시아 사회 전반에 이슬람 기풍이 강해진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변화는 외적으로 1970년대부터 서아시아에서 시작된 이슬람 부흥운동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비롯되었으나, 내적으로 이슬람 단체들의 탈정치화에서 말미암은 측면이 크다. 그 결과 공공장소의 이슬람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 이면에는 이슬람 급진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는 1990~2000년대에 발발한 테러리즘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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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 VOC는 서부 띠모르의 꾸빵을 점령했다. 이후 VOC는 백단향 무역을 둘러싸고 또빠세 세력과 치열한 경쟁을 벌었고, 이는 1749년 VOC의 승리로 끝났다. 18세기 초부터 꾸빵 인근 리파우에 상관을 두고 무역 활동을 펼치던 포르투갈은 입지가 좁아진 또빠세 세력과 불화를 빚게 되자, 1769년에 동부 띠모르의 딜리로 본거지를 옮겼다. 오늘날 띠모르가 동서로 나뉘게 된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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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살라자르 정부는 동띠모르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원주민'과 '신원주민'으로 분류했다. 신원주민은 포르투갈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그리고 가톨릭을 신봉하고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을 말한다. 신원주민은 포르투갈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받았고 본국 국회의원과 지방의회의원 선거권도 주어졌다. 주로 가톨릭 교회의 교육을 통해 탄생한 신원주민 정치 엘리트 집단은 오늘날에도 국가의 지도층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교회 세력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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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띠모르는 독립 즉시 포르투갈어와 테툼어, 두 언어를 국어로 채택했다. 국민 대부분은 토착어인 테툼어와 인도네시아어에 더 익숙했다. 그럼에도 동띠모르 초대 정부가 인도네시아어 대신 포르투갈어와 테툼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것은, 포르투갈어는 지식인인 지도자들의 언어이고 테툼어는 독립투쟁을 하는 동안 민중을 교육하고 반인도네시아 선전을 전파하는 중요한 소통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동남아시아의 '작은 중국'을 지양하고 국제적인 '싱가포리언' 정체성을 창조하기 위해 중국어가 아닌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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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연방에서 탈퇴한 싱가포르 인민행동당(PAP) 정부는 1967년 국민개병제를 도입하고,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민방위부대를 창설했다.
독립 싱가포르는 경제적 생존의 길을 추구하는 한편, 정치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이스라엘' 내지는 '동남아시아 제3의 중국’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했다. 대부분의 신생국에서 문화적 민족주의가 강조된 것과 달리, 싱가포 르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거부했다. 중화 쇼비니즘에 경도된다면 싱가포르 국민으로서 정체성이 형성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말레이세계 안에서 생존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중언어 정책으로 중국계 주민 가운데 영어 세계(영어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는 현대화의 수혜를 누린 계층이자 지배계급으로 자리를 굳혔고, 중국어 세계(중국어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는 탈중국화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경제적인 이유로 영어 세계에 흡수되거나, 화교에서 싱가포르인(싱가포리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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