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상]아고라와 유치원···국회의원들을 벌 주려면

딸기21 2018. 12. 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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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이 아고라 서비스를 중단한다고 한다. 다음 뉴스는 사이트에 “그동안 ‘대한민국 제1의 여론광장’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다양한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이제 15년간의 소임을 마치고 물러납니다”라는 안내글을 올렸다. 여론광장의 큰 축이던 게시판들은 ‘게시물 백업’이라는 최후의 서비스와 함께 사라진다. 아고라도, 한때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미네르바’도, 이젠 지나간 이름들로 남게 됐다. 싸이월드나 프리챌처럼 한 시절 사람들을 끌어모으다가 쇠락하는 인터넷 서비스들이 적지 않지만 아고라의 소멸은 ‘빛이 바래기 마련인 추억’을 넘어선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기자 초년병 때, PC통신이 막 유행하고 있었다. “나우누리 아이디 @koje***는 무엇무엇이라고 지적했다”는 식으로 유저 반응이 기사에 인용되곤 했다. 신문들은 곳곳에서 이 새로운 여론 탐지기를 활용했다. 그 시절 그것이 어떻게 민심의 고른 잣대가 될 수 있었겠냐마는, 최소한 기자들이 지나가는 시민을 붙잡고 두어 마디 코멘트를 받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언론이 새로운 미디어 도구를 활용해 시민들의 생각을 전하는 초창기 방식이었던 셈이다. 미디어 자체가 원래 그런 중개자이고 여론의 도구다. 소셜미디어가 매스미디어를 누르는 시대가 되면서 신문방송이 끌어다 쓰는 여론탐지기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바뀌어갔지만 최소한 10년 전 무렵의 어느 국면에 아고라가 한국 사회에서 공론의 각축장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Agora of Tyre. 위키피디아


 

지금은? 누구나 금세 떠올리겠지만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 앞의 수식어일 뿐인 ‘대의’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국민투표나 국민소환이나 국민발안 같은 것을 구경할 수 없었던 나라에서 청와대가 국민들과 직접 소통한다며 게시판을 열었더니 난리가 났다. 

 

이런 게시판 청원 혹은 온라인 청원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건 영국 뉴스를 보면서였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영국에서 청원운동이 벌어졌다. 도널드 트럼프가 영국에 오면 입국을 금지시키자는 청원이었다. 영국에선 청원인 수가 10만명이 넘으면 의회가 공개토론 안건에 올려야 한다. 2016년 1월 이 문제로 런던 웨스트민스터홀에서 열린 의회 토론은 3시간 넘게 진행됐고 실시간 중계됐다. 의원들이 막말쟁이 트럼프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지만 입국금지가 이뤄졌을 리는 없다. 그래도 시민들 속은 시원했을 것 같다. 워싱턴포스트는 영국 의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모욕적인 단어들을 동원해 트럼프를 묘사’했다고 보도했었다.

 

미국에선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백악관 웹사이트에 ‘위더피플(We the People)’이라는 청원섹션이 생겼다. 글을 올린다고 다 올라가는 게 아니라 30일 안에 150명이 서명해야 공식 게시되는 식으로 문턱을 뒀다. 게시되고 30일 안에 10만명이 넘으면 백악관이 답변해야 하지만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코멘트하지 않는다는 비공식 룰이 있었다. 정권이 교체된 뒤 청원은 ‘아카이브화’됐다. 즉, 죽어버렸다.

 

청와대 게시판이든, 아고라든 사람들에겐 공론장이 필요하다. 모여서 이야기해야 사회가 움직이고 세상이 바뀐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나 독재정권 혹은 켕기는 게 있는 권력자들은 공론을 막았다. 지금 한국은 아고라가 필요없을 정도로 공론의 홍수다. 청와대가 직접소통을 한다 하고, 정부 부처들은 정책마다 공론화를 얘기한다. 콱콱 막힌 대의민주주의에 ‘직접’과 ‘참여’의 비타민을 투약하는 효과가 적지 않다. 하지만 대개는 ‘위로부터의 공론화’로 틀이 짜인다. 사실 ‘위로부터의 공론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모순이다. 여론은 아래에서 흘러넘쳐 위로 향하는 것이지, 위에서 던져주고 밑에서 토론하는 게 아니니까.

 

원래는 국회가 그 자체로 공론의 무대이자 도구다. 현실은 갑갑하다. 법과 제도와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여론은 저수지의 부유물일 뿐이다. 사립유치원 회계비리를 놓고 여론이 들끓었지만 특정 정당의 고집에 시민들의 분노는 무기력해지고 있다. 국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국회의원이 문제를 폭로했고 민심을 한데 모았고 여의도에서 여러 차례 토론회가 열렸고 법안이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발목을 잡혔다. 시민의 대리인이라는 자들 중 일부에게. 

 

여론이 광장을 찾아 헤매는 건 그저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라는 결실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국회가 저 모양이니, 정부가 그냥 시행령을 바꿔 일단 사립유치원들에 회계시스템부터 적용하겠다고 한다. 국회에 여론이 없는 게 아니라, 여론에 국회가 없다. 시민들 마음에서 의회가 사라져간다. 

 

시민의 대리인이 제 역할을 하지 않고도 징벌을 당하지 않는다면 그 대리인과 대리시스템의 존재는 무용지물을 넘어 사회의 해악이 된다. 아고라가 사라지고 페이스북이 노령화되고 포털사이트 댓글은 난장판이 될 수 있겠지만, 여론은 언제나 존재한다. 시민들의 생각과 마음이 그릇된 대리인과 그릇된 시스템을 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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