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상] 맘들의 분노, 맘들을 향한 분노

딸기21 2018. 10. 2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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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유치원 원장들이 아이들에게 써야 할 돈을 멋대로 빼내 물건을 사고, 월급도 수당도 마음대로 정해 보너스를 챙기고 아들딸에게까지 줬단다. 엄마들이 충분히 분노할만한 일이다. 경기 김포에선 아이 엄마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아동학대를 했다는 소문이 돌아 학대교사로 지목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각 없는 젊은 엄마들, 제 아이만 귀한 줄 알고 헛소문에 휘둘려 ‘신상털기’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에 대한 분노가 쏟아졌다. ‘맘카페’는 온라인 적폐로 지목됐다.

 

엄마들의 분노, 엄마들을 향한 분노. 비난과 손가락질의 강도를 보면 후자가 훨씬 더 센 것같다. 근래 여론의 바로미터처럼 돼버린 청와대 청원을 보면 사립유치원 비리를 뿌리 뽑고 처벌을 강화하라는 청원에는 8000여명, 아동학대로 오인받은 교사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달라는 청원에는 13만여명이 동의했다. 김포 사건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한국의 엄마들은 패륜녀들, 일하지 않는 밥벌레, 애 낳은 게 벼슬인 줄 아는 사람들, 공존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헛소문 유포, 증거도 없이 지목해 신상털기. 그 잔혹한 행위는 충분히 분노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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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이든 어린이집이든 법규대로 안전하고 투명하게 운영된다는 믿음이 굳건하다면 애초에 없었을 일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아동학대를 봐오지 않았던가. 아이를 맡길 기관들이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의심이 ‘맘카페’라는 공간에서 이뤄진 신상털기로 이어졌고 사람의 죽음을 불렀다. 그런가 하면 유치원들의 투명성에 대한 불신은 널리 퍼진 관행이자 구조적 문제임이 밝혀졌다. 불신의 원인은 하나로 엮여 있지만 한쪽에선 분노의 주체인 사람들이 한쪽에선 분노의 대상이 된다. 엄마들뿐 아니라 그 누구도 이런 순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얼핏 생각하기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더 공분을 불러일으킬 것 같지만 성난 이들의 마음을 결집시키는 정도는 사안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올드미디어들이 다루는 뉴스와 소셜미디어의 폭발성이 겹쳐지는 범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다시한번 확인시켜줬다. 어떤 행위가 비난을 받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의’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경우는 적다. 사회의 여러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특정 존재에 대한 경험과 심상이 쌓여 집단적 비난으로 터져나온다. 제 아이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엄마들이라는 이미지가 쌓이고 쌓이면서 맘들은 버러지같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신도시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자영업 경쟁, 좋다나쁘다 품평하며 그들을 압박해온 몇몇 맘카페의 횡포,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노의 타깃으로 삼는 분위기 같은 것들이 밑바탕에 깔리면서 혐오의 홍수를 부른다. 정신과 의사 하지현 선생은 “예전에는 너그럽게 봐줬던 아이들이라는 존재들마저 ‘나를 번거롭게 하는 것들’로 여기게 만들 만큼 우리 사회의 여유가 없어진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아이들의 까불거림조차 더 이상 용납하기 싫어진 사람들에게, 교육열을 넘어 아이와 관련된 모든 것을 관리하는 극성스런 엄마들은 미움의 대상일 뿐이다.

 

극성스럽지 않은 엄마들은 자격 논란에 휩싸인다. 얼마 전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에 ‘남편 혼자 일해 200만원대 월급을 받지만 아껴가며 사니 그 돈으로도 행복하다’는 젊은 엄마의 글이 올라왔다. 세상 모르는 철없는 엄마라는, 제대로 키우지도 못할 거면서 아이의 불행은 신경쓰지 않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엄마의 자격은 돈으로 치환되고 젊은 엄마는 주제도 모른 채 아이를 셋씩이나 낳은 사회적 민폐가 된다.

 

분노와 비판이 제도와 시스템으로 향하려면 사유의 단계가 필요하지만 개인이나 특정 계층·집단에 대한 분노는 그 자체로 휘발성이 크다. 엄마를 욕하는 걸 들으면 ‘패드립’이라고 격분하는 사람들도 맘들에게는 가차없이 혐오를 쏟아내고 공격을 한다. 어째서 맘들뿐인지, 아빠들은 어디에 있는지, 왜 애당초 아동학대를 의심할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어오지 못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분노한 엄마들에 대한 공감보다는 경솔하고 이기적인 맘들에 대한 분노의 게이지가 더 높게 치솟는다. 익숙해진 모순에 대한 좌절감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사립유치원 비리를 보고 어느 후배는 “하나도 놀랍지 않다”고 했다. 썩은 구조에 맞서 행동에 나서는 것은 힘들지만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를 키보드로 표현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평생 아이를 낳을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맘이란 얼마나 멀고도 가벼운 존재인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누구누구 맘’으로 규정하고 올인하는 이들에게, 내 아이를 위협할 지도 모르는 모든 것들(혹은 사람들)은 얼마나 증오스러운 존재들인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아이에 대한 투자와 아이를 위한 노력은 어디까지가 적정선일까. 분노는 왜 이렇게 쌓여갈까. 임계치에 다가가버린 우리의 분노는 누구를, 어디를 향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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