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로그인] 난민은 우리의 미래다

딸기21 2015. 9. 1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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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난민들을 받을 수 없다고, 지나가게 해주는 것조차 싫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저들은 난민이 아니라 이민자”라고 했다. 시리아에서 생존의 위험을 피해 온 난민이 아니라 독일식으로 살고 싶어하는 이민자들이며, 유럽 ‘기독교 복지국가들’에 해가 될 존재들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무슬림’ ‘복지 축내는 무임승차자들’이라는 못되고 진부한 시각의 전형이다.

 

오르반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은 이리저리 떠도는 난민들을 ‘망명지 쇼핑객(asylum shopper)’이라고 비아냥거린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이 “복지수당을 받아 리무진을 굴리는 미혼모들이 있다”고 주장하며 복지예산을 삭감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미국 보수 언론들이 ‘복지 여왕’이라고 불렀던 그런 존재는 세상에 없었고, 순전한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해변에 떠밀려온 아일란의 모습이 더할 수 없는 충격을 줬음에도 여전히 저런 시각은 존재한다. 게다가 우린 헝가리를 욕할 처지가 못된다.

 

시리아 이슬람국가(IS)의 끔찍한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난민 엑소더스에 정당성이 생겼고, 거기에 아일란의 죽음으로 인도주의와 온정이 덧칠됐으나 여전히 그들은 내쳐진 채다. 난민에게 방 한 칸을 내주자며 따뜻하게 맞으려는 이들도 있지만 유럽에서도 난민, 특히 무슬림 난민을 배척하는 기류가 적지 않다. 논쟁의 핵심은 저들이 ‘난민이냐, 이주자냐’ 하는 것이다. 시리아 엑소더스에 대해서는 최소한 난민이라고 보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으나, 프랑스 칼레의 유로터널 입구에 몰려 영국으로 가려 한 중동·북아프리카 출신들에 대해서는 유럽 언론들도 대부분 이주자(migrant)라는 표현을 썼다. 그 속에는 저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가져갈 것이고, 우리 재정을 좀먹을 것이라는 경계심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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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난민과 이주자의 경계선은 원래 희미하다.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자기 나라를 떠났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난민과 이주자의 구분은 없어진다. 아일랜드 대기근 때 미국으로 갔던 사람들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난민일 수도 있다. 존 F 케네디도 아일랜드계 이민자 후손 중 하나였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 엄마처럼 아르헨티나나 미국으로 간 이탈리아인들도 많았다. 인종주의를 다룬 학자들의 글을 보면, 20세기 초반만 해도 미국에서 아일랜드인과 이탈리아인은 ‘백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국경 넘는 이들을 인종주의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지만 그 잣대는 고무줄이다. 반만년 역사의 단일민족을 주장하다가 어느새 탈북자와 중국동포들에게까지 인종차별적 시선을 던지는 우리 스스로를 보면 그 잣대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절감하게 된다.

 

결국 난민은 누구인가. 지구적인 경쟁에서 내몰린 사람들이다. 나고 자란 곳에서 살 수 없어 다른 땅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나의 경쟁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인 대 만인의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에게는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이 요구하지도 않은 ‘혜택’을 가지고 마치 그들이 금수저라도 물게 됐다는 듯 고함 지르던 이들이 꽤 되지 않았던가. 난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나보다 형편이 못한 이들에게 돌을 던지고 빗장을 닫아거는 사회는 아귀다툼의 사회다.

 

지금 우리가 난민들보다 더 가진 게 있다면 ‘국적’뿐이다. 언제 경쟁에서 밀려나 경제적 변경, 사회적 변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우리는 알량한 국적을 무기로 저들을 밀어내려 한다. 하지만 변경은 유동적이며 한없이 확장되고 있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무한경쟁만 남아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잠재적 난민들이며 저들이 우리의 미래다. 다행히 우리에겐 아일란의 모습을 보고 눈물 흘릴 공감의 능력이 있고, 연대의 목소리가 있다.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서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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