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로그인] 아이티와 네팔, 재난의 미래

딸기21 2015. 4. 3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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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게 만든 일 중 하나는 2001년의 ‘미스터리 왕실 살인 사건’이었다. 왕세자가 친부모인 비렌드라 국왕 부부를 비롯한 가족 9명을 총기로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못 선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엽기 살인극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 후 숨진 국왕의 동생 갸넨드라가 왕좌에 올랐으나 이 사람은 국민들에게 통 웃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마오주의 반군이 농촌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정부는 늘 위태로웠다. 말 많고 탈 많던 왕정은 240여년 역사를 뒤로한 채 2008년 종말을 맞았다. 마오주의 반군에 눌려 왕정을 폐지한 인물은 기리자 프라사드 코이랄라 총리였다. 수실 코이랄라  총리의 사촌이다. 네팔 정치는 코이랄라 집안의 역사나 다름없다. 그 집안 사촌들이 수실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 총리를 지내고 있다. 국왕이 살해되고 쫓겨나고 공화정이 됐어도 네팔에서는 “달라지는 게 없다”는 자조가 많았고, 이번 지진 뒤 서방 언론들이 지적한 대로 숙명주의가 정치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다. 


Savador Dali, Caravan


네팔이 다시 세계의 관심사가 됐다. 지진 참사 뒤 세계는 히말라야 소국에 대한 연민과 인류애로 가득하다. 사실 지난 10여년 동안 세계 재난구호 시스템은 엄청나게 진화했다. 중국과 파키스탄, 아이티와 일본에서 초대형 지진이 잇따른 탓이다. 특히 2004년 말의 인도양 쓰나미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연재해에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줬고, 세계 전체가 나서야 한다는 자각이 뒤따랐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이 주도하는 글로벌 재난구호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각국은 비극을 겪은 나라에 돈과 구호품과 구조팀을 보내는 일에 익숙해졌다. 세계시민들의 연대의식과 책임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한국에서도 네팔 지진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고 도움을 주려 애쓴다. 


동시에 네팔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책임감과 관심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묻게 한다. 5년 전 참사로 최소 10만명에서 최대 31만명이 숨진 카리브 섬나라 아이티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아이티는 정정불안 와중에 지진을 맞았다. 국제사회가 지원과 관심을 보냈다. 지진 뒤 이곳에 들어간 돈이 60억달러에 육박한다. 하지만 현지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해 외부 기금들이 재건을 맡았다. 결과는 아이러니하다. 아이티는 재난 뒤 ‘NGO(비정부기구) 공화국’으로 전락했다. 도우러 들어간 유엔 평화유지군은 오히려 콜레라를 옮겼다. 지진 이듬해 큰비가 오는 바람에 아이티의 또 다른 별명은 ‘콜레라 공화국’이 됐다. 


물론 돈은 시중에 풀렸다. 최근 포브스 기사를 보니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요새는 지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도로는 포장됐고 건물 잔해들도 거의 없어졌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메리어트 호텔이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민 4분의 3이 실업자이고 대부분은 극빈층이다. 일회성 관심이 그치는 순간 그 나라는 다시 예전의 악순환으로 돌아간다. 


아이티와 네팔의 가장 큰 공통점은 빈곤이다. 가난은 늘 무언가의 원인이자 결과다. 정정은 불안하고, 행정은 부패했고, 이것이 숙명이라는 패배감이 팽배해 있다. 가난이 피해를 부풀리고, 다음번 피해를 막지 못하게 만든다. 가난과 건강문제를 파헤친 하버드대 출신의 의사 폴 파머는 저서 <권력의 병리학>에서 아이티를 가리켜 “급성이자 만성인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개발·구호 전문가들은 재앙 뒤 열악한 지역을 ‘전보다 낫게(build back better)’ 복구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재건이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제도와 시스템을 새로 만드는 과정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팔은 또 하나의 아이티가 될까, 아니면 전보다 나은 곳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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