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현대판 노예제와의 전쟁’

딸기21 2015. 4. 2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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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남성들과 여성들, 멀리 있고 가까이 있는 모든 이들, 민간기구의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 오늘날에도 이뤄지는 노예제의 채찍질을 목도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이 악(惡)의 공범이 되지 말아 주십시오.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긴 우리 형제자매들, 우리의 형제 인류가 겪는 고통에 등돌리지 마십시오.” 


지난 4월 14일(현지시간) 바티칸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하나가 개설됐다. ‘노예제를 끝내자(www.endslavery.va)’는 이름의 이 사이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줄곧 제기해왔던 인신매매와 아동노예·성노예 등 21세기에도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늘어가는 노예 문제를 다루고 있다.


‘노예제를 끝내자(www.endslavery.va)’는 이름으로 바티칸이 개설한 웹사이트.


교황은 2020년까지 인신매매를 종식시키자며 세계에 호소했고, 지난해 말 세계 종교지도자들과 힘을 합하기로 다짐했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를 비롯해 유대교·이슬람교·힌두교·불교 지도자들과 바티칸에서 만나 인신매매와 강제노동, 성매매, 인체조직·장기밀매 같은 반인도적인 범죄에 맞서자는 ‘종교지도자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4개월여 만에 웹사이트를 열었고, 트위터 계정(@nonservos)도 개설했다. 교황청 산하 과학·사회과학아카데미는 인신매매와 노예제 문제에 대해 이달부터 잇달아 회의와 세미나를 개최한다. 오는 17일부터 21일까지 인신매매 범죄 문제에 대한 회의를 여는 데 이어, 27일에는 교황청 주재 스웨덴 대사관 등과 함께 인신매매의 ‘특수한 희생자’인 어린이 노예노동에 대한 세미나를 열 계획이다.

흔히들 노예제가 지난 세기에 근절된 것으로 여기지만 노예는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 학자 케빈 베일스는 저서 <일회용 사람들> (1999)에서 ▲자신의 선택이 아닌 강요나 사기에 의해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의 보수를 받지 못한 채 ▲강제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를 ‘노예’로 규정했다. 베일스와 조 트로드, 알렉스 켄트 윌리엄슨은 공동저서 <끊어지지 않는 사슬>에서 노예제를 철폐하기 위한 싸움의 역사를 소개하고, 현대 노예제의 다양한 형태를 살핀다. 이들에 따르면 가장 대표적인 노예노동 중의 하나는 ‘성노예’다. 아직 어린 소녀들을 포함한 여성들은 때로는 포주에 의해, 때로는 자신들을 ‘사간’ 남성들에 의해, 때로는 마을에 쳐들어온 점령자들에 의해 노예가 된다. 여성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고통은 특히 심하다.

벤저민 스키너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더부살이’라 불리며 주인집 종 노릇을 하는 아이티의 어린 가내 노예, 냉전이 끝난 뒤 사회안전망이 무너진 동유럽에서 서유럽을 거쳐 세계로 팔려나가는 여성 성노예, 무슬림 부족집단에 조직적으로 학살당하고 노예로 전락한 수단 남부 아프리카계 기독교도 등의 사례를 추적한다. <엉클 톰스 캐빈>이 무색할 정도로, 스키너가 뒤쫓은 사건들은 참혹하고 잔인하다.

지난해 11월 국제 노동인권단체 워크프리는 “세계 인구의 0.5%에 해당하는 3580만명이 노예 상태에 있다”고 봤다. 워크프리의 ‘세계노예지수’에 따르면 노예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인도이고, 인구 중 노예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아프리카 모리타니다. 모리타니의 경우 무장한 부족군벌집단이 특정 지역 주민들을 예속시켜 착취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그러나 노예는 머나먼 아프리카나 남아시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난해 영국 내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노예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영국에만 최대 1만3000명이었다. 보고서에는 루마니아와 폴란드, 알바니아 출신 노예 사례가 여럿 포함됐다. 터키 등을 거쳐 성노예로 팔려가는 여성들, 스페인을 비롯한 남유럽에 예속노동자로 팔리는 남성들 사례도 보고됐다. 루마니아 어린이들이 이탈리아 등지의 범죄조직에 ‘구걸을 위한’ 노동력으로 인신매매되기도 한다.

영국 정부가 현대의 노예에 대해 공식 보고서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영국 인권·노동단체들은 불법 이주해온 제3세계 출신들이 노예노동을 강요받고 있다며 정부의 대응을 촉구해왔다. 영국 범죄수사국은 이런 지적에 따라 2013년 2744명 이상이 노예노동에 시달려왔다고 밝힌 바 있다. 공식 보고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숨겨진 노예들’임을 보여줬다.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동유럽처럼 갑작스런 정치·사회적 격변 때문에 흔들린 곳도 있고, 남수단이나 모리타니에서처럼 오랜 계급·부족·종교 갈등이 조직적 노예사냥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에서는 낮은 카스트의 못 배운 빈곤층이 노예가 되고, 미얀마에서는 군부 정권이 소수민족을 정글로 몰아 벌목과 댐 공사를 시키며 노예로 부렸다. 스키너의 책에는 한국도 동유럽 성노예들의 기착지 중 한 곳으로 언급돼 있다.

가장 최근 사례는 이라크와 시리아다.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는 소수 공동체 ‘야지디’ 남성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은 잡아가 노예로 삼았다. 야지디뿐 아니라 이라크의 젊은 여성 수백~수천명이 성폭행과 집단 성폭행에 시달렸고 ‘성노예’로 전락했다. IS는 “무슬림이 아닌 여성은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지침까지 내렸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중동미디어연구소(MEMRI)가 공개한 IS의 ‘지침’에는 “노예들은 자산일 뿐이므로 선물하거나 팔아도 된다”는 구절도 있다.

민간기구와 학자들은 현재 노예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수가 유사 이래 가장 많다고 지적한다. 물론 세계 전체의 인구 규모가 크기 때문에, 노예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과거보다 적다.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경제의 규모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몫도 미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노동이 횡행하는 것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노예를 부리는 비용이 낮아진 탓이다. 18~19세기 미국의 백인 농장주들이 노예를 사고 먹이고 유지하는 데 쓴 비용과 비교하면 지금은 유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고 베일스 등은 지적한다. 이제는 노예를 먹이고 건강하게 유지할 필요조차 없어졌으며, 노예가 죽으면 얼마든지 새로 사들일 정도로 ‘사람값’이 싸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 현실과 결합돼 있기 때문에 노예제와의 싸움은 지난하다. 세계는 그동안 이 문제를 거의 중시하지 않았다. 2013년 3월 프란치스코가 즉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로마 가톨릭이, 그것도 교황이 직접 나서서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선두에 설 것으로 예상한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 

교황은 즉위 뒤 처음으로 바티칸 밖으로 나가는 외출 때 이탈리아 남부의 ‘난민섬’ 람페두사를 첫 행선지로 정했고,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온 난민들을 만났다. 그들 중 일부는 인신매매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말의 종교지도자 공동선언에 이어 교황은 2월 8일을 ‘세계 인신매매 반대 기도의 날’로 정했다. 

며칠 전 지중해의 몰타 섬 부근에서 700명 가량을 태운 난민선이 전복됐다. 28명만 구조됐고 나머지는 모두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 뒤 교황은 물론이고 유엔과 인권단체들은 유럽의 대책을 촉구했으며 유럽연합은 긴급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유럽의 책임은 '구조를 하지 못한' 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복된 난민선에서 살아나온 한 방글라데시인은 "300명 정도는 밖에서 잠긴 지하 선실 안에 감금돼 있었다"고 말했다. 떼죽음을 당했을 이들 300명은 인신매매로 팔려가 노예가 될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이 사고 뒤 "새로운 노예제"를 강력 규탄했다. 

이전에도 노예노동을 막기 위한 인증제도나 공정무역, 스웨덴의 ‘성 구매 불법화’ 같은 움직임은 있었다. 교황은 이런 흐름을 세계에 확산시키기 위해 나섰다. 프란치스코의 호소에 21세기 세계시민들의 ‘양심’은 어떻게 응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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