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얼마 전 비정제유에 대한 수출 금지를 40년 만에 완화했습니다. 이번 조치를 계기로 원유 수출의 빗장도 풀릴 지 주목되고 있습니다. ‘비정제유 수출 금지 완화’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쉽게 감이 오지 않으실 텐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비정제유란 정제된 기름은 아니지만, 원유도 아닌 상태의 것으로 스플리터라는 단순한 설비로 가공한 액상 탄화수소, 즉 콘덴세이트를 의미합니다)
40년간 원유 수출을 금지해 온 미국
지난 6월 24일, 미국 상무부는 텍사스에 본사를 둔 기업 2곳이 낸 허가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초경질유(콘덴세이트) 수출을 허용했습니다. 콘덴세이트는 천연가스 개발과정에서 나오는 액상 탄화수소를 1차로 가공한 것을 말하는데요. 일반 정유시설보다 단순한 ‘스플리터’라는 설비로 가공을 하면 등유나 프로판, 부탄, 나프타 등으로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정유소에서 정제된 기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땅 속에서 파낸 상태 그대로의 원료도 아닌 거지요.
이런 이유로 미국 정부는 콘덴세이트를 ‘원유’에 포함시킬 지를 고심해 오다 얼마 전, ‘원유가 아니다’라는 판단 끝에 수출을 허용한 것인데요.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렇게 콘덴세이트를 원유에 포함할 지, 안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한 것일까요? 바로 ‘미국의 원유 수출 금지 정책’ 때문입니다.
미국은 텍사스와 멕시코만, 알래스카 주 등에 대규모 유전들을 여럿 보유한 산유국입니다. 뉴욕 석유 선물시장에서 ‘WTI(서부텍사스중간유)’라는 이름으로 거래되는 유종(油種)은 영국 런던 시장에서 거래되는 북해산 브렌트유와 함께 국제유가의 기준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미국은 중동 발 오일쇼크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975년, 에너지 정책 보호법을 재정하며 외국으로의 원유 수출을 금지했습니다(오직 캐나다만 예외로 둬서, 캐나다와 미국은 에너지 구조상으로는 사실 한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이후 40년 가까이 원유 수출금지 정책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죠.
콘덴세이트 수출이 재개된 이유?
이런 분위기에 변화를 불러온 것은 ‘셰일가스’입니다. 바다 밑에는 진흙이 퇴적돼 굳어진 암석층, 즉 ‘혈암층(shale)’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안에 포함된 천연가스를 셰일가스라 부릅니다. 셰일가스는 넓은 지역에 얇게 분포돼 있기 때문에, 과거에는 추출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다 밑 암석층을 뚫고 그걸 꺼내는 것이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별로 욕심 나는 일은 아니었던 거지요.
하지만 ‘수평시추기술-수압파쇄공법’이라는 것이 개발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수평시추기술은 셰일층에 수평형태로 삽입한 시추관을 통해 물, 모래, 화학약품 혼합액을 고압으로 분사해 암석에 균열을 일으키는 채굴방법으로 가스 저류층과의 접촉면을 넓혀 분출된 가스를 더욱 많이 회수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수압파쇄공법은 흔히 프래킹(fracking)이라고도 부르는데, 미국인 채굴업자 조지 미첼이 1998년 상용화에 성공한 공법으로 모래와 화학 첨가물을 섞은 물을 높은 압력으로 혈암층에 분쇄, 바위를 뚫고 천연가스를 뽑아내는 방식입니다.
아시다시피 2003년 이라크전 이전만 해도 배럴 당 20달러 대였던 원유 가격이 지난 10년새 크게 올라갔지요. 유가가 오른 데다, 새 기술이 나오면서 셰일가스를 파내는 게 경제성이 있게 됐습니다.
앞서 미국이 수출을 허용한 콘덴세이트와 셰일가스가 무슨 관계냐고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 셰일가스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 멕시코만 일대인데, 셰일가스를 파낼 때 콘덴세이트가 따라 나옵니다. 즉 콘덴세이트는 셰일가스의 부가 생산물인데요. 지난해 미국에서는 콘덴세이트 생산량만 하루 100만 배럴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자 콘덴세이트를 해외에 내다팔 수 있게 해달라는 기업들의 목소리가 줄을 이은 것입니다.
미국은 여전히 자국 내에서 소비하는 석유의 절반 가까이를 수입하는 나라입니다. 그럼 콘덴세이트를 가공해서 자기네 나라에서 쓰지 왜 수출을 하려 하냐고요?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정유설비와 원료의 ‘미스매치(mismatch)’ 때문인데요. 멕시코만에 있는 정유공장들은 콘덴세이트같은 경질유가 아닌 중유를 정제하는 설비들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연유로, 미 정부는 콘덴세이트 수출을 허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버락 오바마 정부는 앞으로도 ‘원유 수출 금지정책에는 변화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유는 여전히 전략적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콘텐세이트 수출에 따른 석유 업계의 반응
정확히 말하면 이번 조치는 ‘원유 수출금지’를 풀었다기보다는, 콘덴세이트를 원유가 아닌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정책을 다소나마 완화한 것으로 봐야 하며, 또 얼마 전 미국 상무부에서 콘덴세이트 추가 수출에 대해서는 보류하겠다는 의견을 비치며 무기한 검토를 중단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현황 속 콘덴세이트의 수출이 지속해서 이어질지, 이를 통해 원유 수출까지 연결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답안이 없으며, 이런 조치가 시장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진단 또한 엇갈리고 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올해 콘덴세이트 수출량이 하루 30만 배럴에 이를 것이고, 내년에는 최소 그 2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로이터통신은 “이번 조치가 상징적인 것에 그칠지, 세계 석유시장의 변화를 부르는 ‘게임체인저(결정적인 변수)’가 될지는 알 수 없다”고 보도했으며, 시장분석가 퍼스 해먼드는 로이터에 “아직은 첫걸음에 불과하다”며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어떤 전문가들은 “문이 열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의미를 부여합니다. 미국의 원유 수출금지 정책은 앞으로도 계속 완화될 것으로 보는 거지요. 미국은 여전히 석유소비량의 45%를 수입하는 나라이지만 셰일가스 덕에 산유량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미국의 원유생산량은 금융위기가 강타했던 2008년 말 저점을 찍은 뒤 갈수록 늘어, 지난 3월에는 하루 820만 배럴을 기록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입니다. 재래식 유전에서 나온 원유에 셰일가스까지 합치면 1일 1,100만 배럴로 늘어납니다.
미국은 지난 3월, 24년 만에 처음으로 전략비축유를 일부 방출하기도 했는데요. 크림반도를 병합한 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해 유가를 낮추려는 조치였으나, 그 이면에는 석유가 너무 많이 쌓여 있다는 속사정도 있었습니다.
미국 콘덴세이트 수출이 국내에 미칠 영향
그렇다면, 이러한 미국의 콘덴세이트 수출이 국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사실 아직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단계는 아닙니다. 다만, 국내 정유사 입장에서는 중동에서 주로 수입하던 콘덴세이트를 미국으로까지 공급처를 확대하게 되면 가격 경쟁력 및 원료의 안정적인 확보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는 정도인데요.
지난해 국내 석유제품 소비량은 전년 대비 0.1%가 줄어, 2008년 이후 5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나프타 소비는 0.5% 늘었습니다. 이는 콘덴세이트 같은 ‘비(非) 원유’ 석유류의 생산과 소비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러한 분위기로 비춰볼 때 미국 콘덴세이트 수출이 활성화 되면 국내에는 적지 않은 긍정적인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입니다.
따라서 이번 미국의 콘덴세이트 수출이 일회성에 그칠지, 지속적으로 이어질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며, 이러한 미국의 에너지정책 변화는 국내에서도 쭉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빅 이슈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원문: SK에너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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