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무도한 독재자나 테러범이 아닌 다음에야, 부음에는 애도가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거릿 대처는 영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분열과 양극화’라는 유산을 남긴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와 사망 뒤 반응도 극도로 양극화돼있다.
[경향신문] 세계 지도자들, 대처 애도
[경향신문] 신자유주의 효시 ‘대처리즘’ 영국병 치유·양극화 폭발 상반 평가
각국 지도자들은 일제히 대처를 추모했다. 하지만 영국 가디언이 지적한대로 “생전의 적들은 대처가 숨진 그날부터 비판을 쏟아냈으며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는 기쁨을 드러낸 의견도 적지 않았다.”
‘폐광 도시’로 변해버린 영국 북부 더럼 광부협회의 데이비드 호퍼 사무국장은 8일 “대처는 우리 공동체와 마을과 사람들을 파괴했다”며 “(대처가 숨진 날은) 내 생일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올해 70세인 호퍼는 대처 때 일자리를 잃었다.
대처는 주요산업을 민영화하고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했는데, 특히 대규모 탄광폐쇄로 광부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BBC가 보도한 통계에 따르면 영국의 실업자 수는 1979년 약 150만명에서 대처 집권 5년째인 1984년에는 320만명으로 늘었다.
‘붉은 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유명 좌파 정치인 켄 리빙스턴 전 런던시장은 “대처는 200만~300만명을 내쫓아 산업을 살리겠다고 했던 인물”이라고 혹평했다.
대처는 영국이 점령통치하던 북아일랜드를 가혹히 탄압한 바 있다. 북아일랜드 자치운동을 이끌어온 신페인 당의 당수를 지낸 게리 애덤스는 가디언 지에 “대처는 아일랜드와 영국 사람들 모두에게 큰 상처를 줬던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정치·경제·외교 모든 면에서 강경보수파였던 대처는 또한 동성애자들을 에이즈 확산의 주범으로 봤으며 동성애를 범죄시했다. 동성애자 권익운동가 피터 태첼은 “대처 정부는 동성애자들을 악마화하고 수시로 체포했다”고 비난했다.
런던 시내에서는 대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축하’를 하며 맥주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런던 외곽 브릭스턴에서는 대처 시대의 반 노동 정책을 규탄하는 즉석 시위가 열렸고, “매기, 매기, 매기(대처의 애칭)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라 쓰인 포스터가 나붙었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는 300여명이 시내 중심가에서 “마녀는 죽었다”며 샴페인을 들고 행진했다.
영국 밖에서 대처를 가장 미워한 것은 1982년 포클랜드(아르헨티나 이름은 말비나스) 섬 영유권 전쟁을 치른 아르헨티나다. 당시의 패전으로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이 실각한 바 있다. 포클랜드전 참전군인 에르네스토 알론소는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이나 대처나 똑같은 사람들”이라며 “수많은 이들을 죽게 했을 뿐 평화를 지키는 데에 한 일이 무어냐”고 일갈했다. 아르헨티나 언론들은 “우리에게 패배를 안긴 대처가 죽었다”고 대서특필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반응도 싸늘했다. 대처는 남아공 백인정권의 편을 들었고, 국제사회의 백인정권 금수조치에 협력하지 않았다. 또 흑인들의 조직이자 현 남아공 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전형적인 테러집단”으로 몰아붙였다. 넬슨 만델라의 동지로 ANC 의장을 지낸 올리버 탐보의 아들 달리 탐보는 “대처가 천국의 문에 들어가려 한다면 ANC가 보이콧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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