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20세기 :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
The Long Twentieth Century : Money, Power, And the Origins of Our Times
조반니 아리기 저/백승욱 역 | 그린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세계체제를 다룬 책들은 어쩐지 구미에 맞는달까. 이 책도 재미있었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재미있다고 하면 뜨악한 눈으로 보는 친구들도 많지만, 아무튼 이 책은 재미있다.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 이런 부제가 달려있는 책인데 재미없을 리 있나. 재닛 아부-루고드의 <유럽 패권 이전>과 안드레 군더프랑크의 <리오리엔트> 등을 이미 읽은 탓인지 논리 구조도 낯설지 않아 어렵잖게 책장을 넘겼다.
이 기나긴 책의 내용에 대한 학문적 평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고 내가 그 이상을 아는 것도 아니니 생략하고, 그냥 책을 읽고 남은 의문만 적어놓고 넘어가려 한다. 요는, 지금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과연 ‘장기 20세기(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시대)’의 끝을 의미하는 것인가하는 점이다.
이 ‘위기’가 과연 ‘체제의 위기’인지 아니면 그냥 경기가 하강하고 주가가 떨어지는 그렇고 그런 위기의 하나인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의 저 대공황도 ‘장기20세기’의 위기라기보다는 순환적 국면에 해당됐었는데, 이번 위기는 과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평가’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대안으로 어떤 시스템이 부상할 것이냐에 달려 있을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지금 보고 겪고 있는 것이 진정한 시스템의 위기라면, 이것은 ‘장기 20세기’라는 자본주의의 한 국면의 위기 즉 ‘교체기’일까, 아니면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일까? 지금도 사회주의를 꿈꾸고 있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이길 바랄 것이고, 그냥저냥 착한 사람들이라면 신자유주의의 위기 국면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둘 중 어느 쪽도 아니고 못되어먹은 사람들이라면 “위기를 기회로 삼자”며 이 참에 없는 자들 것을 더 빼앗아 양손에 거머쥐려고들 할 것이다. 한국의 천민자본가들처럼 말이다. 못되어먹었지만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저런 논리를 들먹이면서 “자본주의는 영원하다”며 위기 국면을 거쳐 자본주의가 체질개선을 해 더욱 탄탄해질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참에 구조조정 내지는 경제개혁을 하여 생산성 효율성을 높이자고 소리치면서 말이다.
아쉽게도 <장기 20세기>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심지어 ‘중국의 세기’ 이전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작금의 위기에 대해 직접적인 힌트를 주지는 않는다. 역자의 해설과 저자의 개정판 서문을 보니 저자가 일본을 과대평가한(이 책은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에 들어가기 전에 쓰였다) 것이 약점이라고 하는데, 뭐 그리 ‘치명적인’ 약점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좀 섣부른 예측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 자본주의의 ‘섬들’(일본을 필두로 한 아시아의 용들)을 너무 칭찬해놓은 것 등등을 보면 아시아 경제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안다 싶지는 않다.
나중에 다른 저작에서 일본 대신 중국을 부각시켰다고는 하는데, 이 부분에서도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일본이냐 중국이냐- 이것은 자본주의의 시대구분에서 본질적인 구분일까, 아니면 금융중심지가 바뀐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변화일까? '팍스 자포니카'가 이미 물건너간 얘기가 된 상황이라고 치면, 이 문제는 '중국이 이끌어가는 자본주의(이런 시대가 정말로 올지는 모르지만)'가 어떤 모양과 내용이 될 것인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중국이 어디로 갈지는 참 궁금하고, 또 굉장히 중요한 문제일 것 같다. 아리기에게 물을 일은 아닌데, 앞날을 과연 누가 알리오마는 그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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