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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이시 '슈퍼자본주의'- '민주적인 자본주의'는 가능하다

딸기21 2009. 3. 23.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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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자본주의  
Supercapitalism: The Transformation of Business, Democracy, and Everyday Life 

로버트 B. 라이시 저/형선호 역 | 김영사 



주주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를 넘어 라이시는 1970년대의 자본주의를 ‘슈퍼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이 자본주의에 ‘슈퍼’라는 형용사가 붙는 것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침공해 들어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우리들은 거기 공모해서 시민으로서의 존재의식을 잊고 소비자·투자자로서의 권리만 중시하게 되었다. 우리의 공모 속에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가치는 퇴색했다. 정치는 로비에 물들어 슈퍼자본주의에 결탁했다. 


이 과정은 레이건 때문에, 대처 때문에, 신자유주의 때문에, 냉전 종식 때문에, 세계화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슈퍼자본주의는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지면서 ‘우리의 공모 덕에’ 발전해왔던 것이다. 기업들은 점점 치열해져가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고, 소비자들은 이 경쟁 속에서 값싼 제품과 서비스를 찾아다녔을 뿐이고, 너나없이 펀드에 돈을 넣으며 내가 투자한 것이 조금이라도 이익을 가져다줬으면 하고 바랬을 뿐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슈퍼자본주의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이 과정이 ‘옳은 것’ ‘바람직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지만, 불공평하고 잔인한 과정이었다. 


생각 있다는 사람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을 얘기하며 “나쁜 기업들을 좋은 기업들로 바꾸자”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게임의 룰을 바꾸는 것’이다. 이 자본주의의 규칙을 바꾸어야만, 즉 법과 규제를 통해서 룰을 바꿔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쁜 월마트, 착한 월마트’는 없다. 


월마트는 저임금 노동자들을 고용해 소비자들에게 값싼 물건을 파는 경쟁력 있는 기업일 뿐이다. 기업은 원래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있는 조직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기업의 자선행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민적 각성을 통해 정부를 움직여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갈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라고, 이제는 자본주의에 침공당한 민주주의에 다시 숨통을 틔워줄 때가 되었다고 라이시는 말한다. 요는 ‘민주적인 자본주의’를 만드는 방법인 것이다. 


꼭 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는 ‘좋은 기업’들의 실패담을 종종 듣는다. 더바디샵이 몇 해 전 로레알에 넘어갔을 때를 생각해보라.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낸 그라민 은행도 요즘 흔들린다 하는 판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들이 바로 그 책임을 다 하는 동안 ‘무슨 짓이든 하는 기업’들에 경쟁에서 밀리는 일은 허다하다. 아니, 이는 경쟁 구조의 본질에서 나온 필연적인 귀결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참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데, 그렇다고 부인하기엔 너무 씁쓸한 진실을 담고 있다. 못된 기업이 착한 기업을 이기는 것은 우리 안의 ‘투자자’가 ‘시민’을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시민이 힘을 갖게 하지 않는 한 착한 기업이 나쁜 기업을 이길 도리는 없다. 착한 기업 이야기가 나오면 냉소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성공할 리가 없다’며 ‘합리적인 소비자들의 선택’을 들먹인다. 착한 소비자는 많지 않다고. 여기서도 문제는 ‘착한 소비자’가 아니다. 기업과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책의 내용은 상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가자는 얘기를 진실성 있게 전하기 때문이다. 나도 주주다. 나는 여러 언론사의 주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적립식 펀드에도 투자를 해놓고 있다. 


캘리포니아 공무원 연금인 ‘캘퍼스’ 만이 제 3세계에서 악명을 떨치는 악덕 기업들에 투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돈을 집어넣은 펀드가 지구 반대편 사람들에게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을 강요하고 있는 줄 누가 알랴. 우리는 알려 하지 않고, 알아도 모른 체 한다. 사회적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면에서라면 이 금융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 자유로울 자 누구인가. 


"우리가 다루는 변화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기업은 도덕성과 무관하다. 실상을 말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소비자이자 투자자이며, 그런 맥락에서 슈퍼자본주의에서 엄청난 덕을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공정한 게임을 이상으로 여기는 시민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소비자와 투자자뿐 아니라 시민으로서 우리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규칙 말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적절한 경계선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의 게임과 그 룰을 만드는 방식을 구분해서 양쪽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업은 시민이 아니다. 기업은 계약들의 묶음이다. 기업의 목표는 경제의 게임을 가능한 한 치열하게 수행하는 데 있다. 시민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업들이 룰을 정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22쪽) 


중요한 것은 법과 제도라는 점. 라이시와는 통 인연이 없어서 <부유한 노예>도 몇 장 펼쳐보다가 말았는데 이 책은 생각보다 소박해서 순식간에 읽었다. 자유시장 만능론 같은 것과 ‘딱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자본주의의 개량을 이야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개량은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끊임없는 개량만이 희망일지도 모른다. 



▶ 대기업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는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발전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제기되었고 산업화되어가던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주요 이슈로 부상했다. 

결국에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만드느냐가 관건이었다. 일부 가능해 보이는 해결책이 유럽과 러시아에서 나왔다. 하나는 독점기업과 거대기업을 국가가 소유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말하는 사회주의였다. 이보다 더 과격한 방식은 공산주의였는데,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에 기반한 것이었다. 세 번째 해결책은 거대기업을 정부의 일부로 만들고 한 사람에게 정부의 권한을 집중하는 것. 그러니까 파시즘이었다. 세 가지 모두 시도되었고 세 가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이 선택한 길은 일련의 실용적인 방법들을 결합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지나치게 큰 독점기업들을 더 작고 경쟁적인 단위들로 쪼개준 것이었다. 1890년의 셔먼법 Sherman Act은 미국 최초의 반反독점법이었다. 스탠더드오일과 아메리칸 담배가 대법원의 명령으로 해체되었다.  그후 수십 년의 기간에 걸쳐서 US스틸,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제너럴 일렉트릭, 그리고 AT&T가 반독점 기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반독점 법은 효과적인 무기가 되지 못했다. ‘독점’을 입증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37쪽) 


▶ 1950~60년대에 정치학자들은 미국 민주주의의 특성을 규정하고자 애쓰면서 ‘이익집단의 다원주의’ 같은 추상적 용어들을 사용했다. 이 말은 예전의 교과서에 나오는 직접 민주주의나 대의 민주주의에 합치하지 않으면서도 대다수 시민들의 욕구와 희망에 나름대로 부웅하는 그런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들이 볼 때, 민주주의적인 정부는 서로 경쟁하지만 서로 얽힌 집단들 간의 지속적인 협상이었다. 이런 집단들은 서로 연합해야 무언가를 이룰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시스템은 탄력성과 적응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 결과는 다수의 지배도 소수의 지배도 아닌 ‘소수들의 지배’ 였다. 

연방정부는 간헐적으로 경제적인 힘의 새로운 중심들을 만들어 거대기업들의 힘을 상쇄시켰다. 노조와 소매업자, 소기업, 소액투자자들의 저항에 따른 이와 같은 상황은 경제 전반에 걸쳐서 일어났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이것을 ‘대항력 countervaillng power’이라고 표현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민간의 시장 지배력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대항력의 증가는 경제의 자율적인 규제 능력을 강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정부의 불가피한 통제나 계획의 양을 감소시킨다”고 그는 썼다. (62쪽) 


▶ 스스로 ‘업계의 정치인’을 자임했던 이 경영자들은 지주 의회에 나가 증언을 섰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이 좋은지에 대해 의견과 시간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들이 경영자로서 업계의 정치인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들이 보기에 자기 회사의 소비자와 주주들의 이익보다 전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과점 체제가 그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쟁자가 치고 들어올 수도 있다는 걱정 없이 생산직 근로자들에게 푸짐한 임금과 복지혜택을 줄 수 있었던 것처럼, 자신들이 다른 곳에 관심을 쏟는 동안 경쟁자가 시장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걱정 없이 워싱턴에 가서 마셜플랜을 지지할 수 있었다. (68쪽) 


▶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시스템을 떠받치던 거대 과점 기업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매출과 수익, 고용은 훨씬 더 취약해졌다. 그리고 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주 큰 회사들이 점점 더 약해진 것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소비자들과 투자자들이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규모는 더 이상 진입 장벽이 아니었다. 2006년 평균적인 ‘포천 500’ 기엽은 1980년에 비해 (실질적인 기준으로) 3배나 커졌다. 그러나 가격을 높이거나 품질을 낮추는 기업들은 똑같은 것을 더 싸게 혹은 더 잘 제공하는 경쟁자의 침공을 당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의 증거는 경제의 중심에서 거대기업들의 가격설정 능력이 꾸준히 감소했다는 것이다. 과점 체제와 그것이 지탱하는 계획 경제의 논리적인 근거 자체가 점차 약해졌다. 이와 같은 변화는 1970년대에 시작된 생산성 하락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변화의 이야기에는 영웅도 없고 악당도 없으며, 그 줄거리는 상당히 직선적이다. 이것은 1970년대에 새로운 기술들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 신기술들은 (내가 앞에서 얘기했듯이) 국방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신기술들이 차츰차츰 퍼져나가 여러 방면으로 확산되어 때로는 국경을 넘기도 하면서,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단위당 원가를 낮추는 생산 체제들 속으로 들어간다. (83쪽) 


▶ 세 가지 상황 변화를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 모두 냉전 혁신들의 간접적인 산물이었다. 첫 번째는 이른바 말하는 세계화 globalization 이다. 두 번째는 새로운 생산 방식의 출현이다. 세 번째는 탈규제 deregulation 이다. 이것들 모두 규모의 경제와 20세기 중반의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88쪽) 


▶ 1980년대의 적대적 인수, 기업 사냥꾼, 정크 본드, 위임장 쟁탈전, 그리고 차입 매수를 촉발시킨 것은 욕심이 아니었다. 2000년대의 헤지 펀드, 사모 투자 회사, ‘소수파 행동가들’, 그리고 또 한번의 차입 매수와 위임장 쟁탈전을 유발시킨 것도 욕심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동기 유발의 요인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기회들이었다. 욕심과 기회를 혼동하는 것은 욕망과 가능성을 혼동하는 것과 같다. 대학생들의 욕망은 40년 전에 비해 더 많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기능성은 훨씬 더 커졌다. (106쪽) 


▶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은 우리 대부분의 안에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즉,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우리는 더 좋은 거래를 원한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우리는 그런 거래에서 비롯되는 많은 사회적 결과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는 균형의 수단이 없다. 대개 소비자와 투자자로서의 우리의 욕망이 우세를 보인 다.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가치관은 사실상 적절한 표현 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30쪽) 


▶ 슈퍼자본주의는 수익을 악화시키는 착한 기업의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기업도 경쟁자들이 함께 하지 않는,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행동을 ‘자발적으로’ 할 수는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슈퍼자본주의에서는 규제만이 기업들이 수익에 해가 되는 일을 하도록 유도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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