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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에 관하여

딸기21 2017. 5. 2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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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안아키'라는 게 유행한다고 하는데, 마침 그 문제와 직접 연결된 책이 보여서 손에 들었다.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김명남 옮김. 열린책들)다. 


재미있었다. 아이를 낳은 엄마가 몸에 대해 생각하고 면역과 백신과 사회에 대해 이것저것 뒤지고 공부하며 생각한 것들을 쭉 풀어놓은 일종의 에세이다. 백신을 접종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거부감의 근원과 역사를 살피고, 이런 현상이 현대 사회에 던지는 함의를 짚어본다. 백신을 거부할 과학적 근거가 없음에도 왜 사람들은 거부하는가. 


'백신 뱀파이어'라는 제목의 1881년 전단은 백신 접종원들이 '순수한 아기'에게 가하는 '광범위한 오염'을 경고했다. 백신 접종 행위에 뭔가 성적인 면이 있을 거라는 두려움을 부추겼고, 그 불안은 팔에서 팔로 전달하는 백신 때문에 성 매개 감염병이 퍼졌을 때 더더욱 강화되었다. 드라큘라가 유달리 무서운 존재인 것, 그리고 그 이야기의 플롯이 해결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은 그가 괴물성을 전염시키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28쪽)


미국 최후의 전국적 천연두 집단 발병이 시작되었던 1898년, 어떤 사람들은 백인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 병은 '깜둥이 가려움증'이라고 불렸고, 이민자와 연관된 곳에서는 '이탈리아 가려움증'이나 '멕시코 혹'이라고 불렸다. 뉴욕에서 천연두가 터지자 시는 경찰관들을 보내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이민자가 많이 사는 다세대 주택에서 강제로 백신을 접종시키는 일을 거들게 했다. 켄터키주 미들즈버러에 천연두가 다다랐을 때, 시는 흑인 구역 거주자 중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어서 접종시켰다.

이런 조치는 확실히 질병 전파를 저지했지만, 당시 파상풍을 비롯한 다른 질병의 감염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백신의 위험을 제일 취약한 집단이 도맡아 지게끔 만들었다. 특권층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동원했던 것이다. 

1853년 영국이 무료 백신접종을 의무로 강제했을 때 그에 저항했던 노동 계급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는 자신들의 자유를 걱정한 것이었다.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백신 접종은 몸의 자결권에 관한 몇 가지 절박한 질문을 일으킨다. 그러나 당시 백신 반대자들은 노예제 폐지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은유로서만 관심이 있었다. "백신 반대자들은 노예 혹은 식민지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감정적, 수사적 가치를 끌어다 쓰는 데 서슴없었다. 그러나 영국 백인 시민들의 고통이 다른 곳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그보다 더 서슴없었다." (45-46쪽)


초기의 백신 거부자들은 미국에서 점차 강해지던 경찰의 힘에 처음 법적으로 도전한 사람들이었다. 미국은 연방 차원에서 의무 백신 접종법을 제정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20세기 초 몇몇 주에는 의무 법률이 있었지만 전체 주의 3분의2에는 없었고 두 군데 주에는 오히려 강제를 금지하는 법률이 있었다.

당시 의무적으로 권장된 백신은 천연두 백신뿐이었는데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거니와 세균에 자주 오염되었다. 20세기 초엽, 이전보다 온화한 신종 천연두 균주가 미국에 나타났다. 오늘날 바리올라 미노르라고 불리는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치사율은 약 1%로, 기존 바리올라 마요로의 30%에 비해 훨씬 낮았다. 천연두 사망자가 줄자 산발적이었던 백신 반대 움직임은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183쪽)


서구, 유럽과 미국 사회에 처음 백신이 도입될 당시의 사회문화적 맥락과 함께 그 불평등한 측면을 소개한 부분을 보면 당시의 반발은 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지금의 백신 거부 운동은 사이비 의학 멘토들이 부추기는 '보건 포퓰리즘'에 가깝다. 


질병통제예방센터의 2004년 분석에 따르면 백신 미접종 아이들은 주로 백인이고, 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비교적 나이가 많은 기혼의 어머니를 두었고, 소득이 7만5천달러 이상인 가정에서 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미접종 아이들은 한동네에 몰려서 사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 아이들이 병에 걸리면 쉽게 전파되고, 그러다가 유행이 돌아서 불완전 접종 아이들에게까지 전달될 확률이 높다. 불완전 접종 아이란 권장 예방 접종을 일부는 맞았지만 전부 다 맞진 않은 아이를 말하는데, 그런 아이들은 주로 흑인이고, 비교적 나이가 어린 미혼의 어머니를 두었고, 주 경계를 넘어 이사 다니고, 가난하게 사는 경우가 많다. (47쪽)


수두는 포도상구균, 그리고 '살 파먹는' 세균이라고도 불리는 A군 연쇄상구균 감염뿐 아니라 폐렴과 뇌염 감염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일단 수두에 걸리면 바이러스가 몸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신경 뿌리에 남아 있고, 면역계는 남은 평생 그것을 저지해야 한다. 그러다 스트레스가 심한 시기에 바이러스는 신경을 감염시켜 통증을 일으키는 대상포진으로 되살아난다. 깨어난 바이러스는 뇌졸중과 마비를 일으킬 수 있는데, 그보다 더 흔한 대상포진 합병증은 몇 달 혹은 몇 년씩 이어지는 신경 통증이다. 수두의 경우, 실제 질병에 의해서 생성된 면역은 질병과 영원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걸 뜻한다. 

나는 수두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나 또한 유혹적으로 느끼는, 산업 사회 이전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탐닉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174쪽)


물론 어이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나이지리아나 파키스탄에서 요 몇 년 새 벌어진 일들이 그렇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배운 부모'들의 백신 공포증이든, 무슬림들의 백신 음모론이든 결국 피해는 애먼 아이들이 당한다는 것.


소아마비는 백신 덕분에 근절될 가능성이 있는 다음번 질병이지만 이 사업은 천연두 근절보다 더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다. 천연두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과는 달리,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 중 다수는 아무런 증상을 드러내지 않고 마비도 일으키지 않은 채 바이러스를 보유하다가 남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소아마비를 근절하려면 보편적 백신 접종에 좀 더 의존해야 한다.

소아마비는 이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에만 풍토병으로 남았다. 2003년에 나이지리아의 소아마비 근절 캠페인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곳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백신은 서구 열강이 무슬림 아이들을 불임으로 만들려고 꾸민 책략이라는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인 탓이었다. 인류학자 마리얌 야히아에 따르면, 무슬림 국가들에 대한 서구의 공격이 점증하던 시절에 나이지리아의 무슬림들은 이라크와 아프간이 겪는 침공과 방문 백신 접종원의 가정 침입을 연결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소아마비는 나이지리아에서도 주로 무슬림이 거주하는 지역의 풍토병이었기 때문에, 소아마비 근절 운동은 상대적으로 무슬림에게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이콧이 시작된 지 일 년도 안 된 2004년, 나이지리아는 벌써 세계로 소아마비를 전파하는 발원지가 되었다. 소아마비는 베냉, 보츠와나, 부르키나파소, 카메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차드, 코트디부아르, 에티오피아, 가나, 기니, 말리, 수단, 토고를 비롯한 17개국으로 퍼졌다. 보이콧은 나이지리아 관료들이 무슬림 국가에 근거를 둔 회사에서 생산한 소아마비 백신 사용을 승인한 뒤에야 막을 내렸다. 

2012년 파키스탄 북부의 한 탈레반 지도자는 미국이 드론 공습을 중단할 때까지 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하던 중 그의 소재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DNA 증거를 모으기 위해서 가짜 백신 접종 캠페인을 벌였다. 진짜 B형 간염 백신을 제공하되 면역 형성에 필요한 3회 용량을 다 놓진 않는 식이었다. 이 기만은 결국 여자들과 아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치를 것이었다. 탈레반이 접종을 금한 지 오래지 않아, 소아마비 백신 접종원 9명이 조직적으로 계획된 공격에 살해됐다. 그중 5명은 여성이었다. 

접종 캠페인이 일시 중단되었던 때, 근 10년 동안 발병 사례가 없었던 이집트의 하수 표본에서 파키스탄의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 소아마비는 이후 이스라엘, 가자, 서안지구에서도 발견되었고 시리아에서 13명의 아이를 마비시켰다. (133-135쪽)


가장 중요한 건 내 아이 백신 안 맞힐 부모들의 자유가 공동체의 보건망에 구멍을 뚫는다는 것. '안아키' 부모의 아이들이 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연면역'으로 잘 키워서가 아니라 '남들이 백신을 맞아준 덕분'이다.


우리가 백신의 효과를 따질 때 그것이 하나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만 따지지 않고 공동체의 집합적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까지 따진다면, 백신 접종을 면역에 대한 예금으로 상상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 은행에 돈을 넣는다는 건 스스로의 면역으로 보호받을 능력이 없거나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면역의 원리이고, 집단 접종이 개인 접종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은 백신이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접종하면 바이러스가 숙주에서 숙주로 이동하기 어려워져서 전파가 멎기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나 면역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감염을 모면한다. (35쪽)


저자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 몸은 개인의 몸인 동시에 이어져 있다는 거다. '사회적인 몸'이 아닌 몸은 없다. 나만의, 내 아이만의 면역계를 과잉숭배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위협을 느끼는 건 사치인 동시에 위험이다. 아들이 태어난 다음 해에 677명의 아이가 총에 맞아 죽었던 시카고에서 살면서도, 나는 그보다 덜 구체적인 위협에 몰두하는 삶을 그럭저럭 이어가고 있다. 다른 동네에서는 두 살짜리 아이들이 총알에 맞아 죽어 가는 도시에서, 나는 아이의 장난감과 주변 벽에서 벗겨진 페인트 조각에 든 위험을 걱정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악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존재로 이해한다면, 대체로 관념적인 존재로서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데 전념한다고 여겨지는 면역계는 그 중요성이 부풀려지고 기능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 (200쪽)


내 세대는 에이즈 전염병의 그늘에서 성인이 되었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우리는 누구나 질병에 취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만일 조심조심 살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제약한다면 질병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인 듯하다. 손택은 이렇게 썼다. "암 공포증은 우리에게 오염의 공포를 가르쳐 줬다. 이제 우리는 에이즈 공포증이 전달해줄 수밖에 없는 오염된 사람들에 대한 공포를 배웠다."

바늘 자체가 '더러운 것'이 되었다. 에이즈 교육은 우리에게 제 몸을 다른 몸들과의 접촉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 가르침은 그와는 또 다른 종류의 고립, 즉 완전무결한 개인 면역계에 대한 집착을 낳은 듯하다. 스스로 면역계를 형성하고, 증강하고, 보충하는 일은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강박이 되었다. 

(205-206쪽)


어떤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조사방법론이 잘 나와 있지 않은 것들이라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은유'로 받아들인다면, 고민해볼 만한 것들이다.


국가에 대한 태도는 백신 접종에 대한 태도로 쉽게 번역된다. 몸이 국가에 대한 손쉬운 은유인 탓도 있다. <나는 타자다>에서 제임스 기어리는 몸을 국가의 은유로 쓰는 것의 효과를 알아본 실험을 소개했다. 연구자들은 두 집단에 몸 은유를 사용하여 미국 역사를 서술한 글을 읽게 했다. 이 글을 읽기 전 한 집단은 공기 중 세균을 해로운 것으로 묘사하는 글을 먼저 읽었다. 글을 읽은 사람들은 안 읽은 사람들보다 나중에 신체적 오염에 대한 걱정과 이민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더 많이 표출했다. 

만일 우리가 느끼는 신체적 취약성의 감각이 정치를 오염시킨다면, 거꾸로 정치적 무력함의 감각은 우리가 자신의 몸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뭔가 알려줄 것이다. (192-193쪽)


외부자, 이민자, 팔다리가 없는 사람, 얼굴에 낙인이 찍힌 사람을 피하는 건 오래된 질병 예방 전술이다. 자연히 그것은 질병이란 우리가 타자로 정의한 자들이 만들어내는 거라는 오랜 믿음을 더더욱 부추긴다. 손택이 썼듯이 "매독은 영국인들에게는 '프랑스 발진'이었으며, 파리 사람들에게는 '독일 질병', 피렌체 사람들에게는 나폴리 질병, 일본인들에게는 중국 질병이었다."

H1N1 독감이 절정이던 2009년 가을, 한 연구진은 독감 백신을 맞은 사람들과 맞지 않은 사람들로 두 집단을 꾸렸다. 두 집단에 독감의 위험을 과장한 기사를 읽혔더니, 백신 접종자들은 미접종자들에 비해 이민자에 대한 편견을 덜 드러냈다. (238-239쪽)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뿐 아니라 (접종을 거부하는 당신 아이만이 아니라 나와 내 아이에게도) 위험한 일이지만, 이런 흐름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의사들은 '한의사들의 오만함과 무지함'을 탓하지만 의사들의 오만함, 신비주의, 과잉진료, 무지막지한 돈벌이 역시 비난을 산다. 


여담이지만 언젠가 페이스북에서 어떤 의사가 내게 "동네 아줌마같은 소리"를 한다며 비난하는 걸 보고 어이가 없어 혼자 웃은 적 있다. '동네 아줌마=무지의 상징'이라며 노골적으로 성차별적인 발언을 대놓고 한다는 것도 황당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바로 그 '무식한 동네 아줌마'같은 환자들을 치료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다는 게 더 놀라웠다. 나는 암에 걸려도 치료하면 안 된다는 '의료 무용론자'가 전혀 아니다. 하지만 항암치료를 거부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고민과 문제의식도 일면 이해는 할 수 있다. 내게 그런 일이 닥쳤을 경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와는 별개로. 


요즘 우리가 백신에서 걱정하는 건 활동가 제니 배카시의 말마따나 '끔찍한 수은, 에테르, 알루미늄, 부동액'이다. 실제 백신에는 에테르나 부동액 따위는 전혀 들어가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물질들은 우리가 산업 사회에 대해서 느끼는 불안을 증언한다. 그것들은 요즘 우리가 나쁜 건강의 원인으로 비난하는 화학 물질들과 요즘 우리의 환경을 위협하는 오염 물질들을 환기시킨다. (27쪽)


사람들은 의사를 못 믿어서 백신이나 치료를 거부하기도 하고, 막연하게 '인공적인 것'이 두려워서 '자연으로 돌아가고파'를 택하기도 한다. 결국 문제는 불신이다. 하지만 그 '과학적 근거 없는 불신'의 밑바닥에는 무언가 현대 사회의 독성 오염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본능적인 경계심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면역에 관하여>에서 저자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백신 거부자들과 의사들과의 싸움이 갖고 있는 '성차별적 이미지'에 대해서도 한줄 언급한다. 백신을 거부하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백신 접종을 '어머니들과 의사들의 전쟁'으로 비유할 때에, "무지한 어머니들과 교육받은 의사들, 혹은 직관적인 어머니들과 지성적인 의사들, 혹은 염려하는 어머니들과 무정한 의사들, 혹은 비합리적인 어머니들과 합리적인 의사들로 그려지고 성차별적인 고정관념들이 넘친다"(81쪽). 한국에선 거기에다가 '엉터리 한의사들'이라는 틀까지 겹쳐지는 것 같다. 


하지만 신종플루가 가져온 손소독제 열풍을 비롯해 넘쳐나는 소독제 시대에 대해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점. 나와 내 아이 주변의 모든 것을 살균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욕구 vs 조류독감 백신에 독성물질이 들었어요 하는 음모론적 거부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몸은 개인의 것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라는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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