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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만에서 관타나모까지, 미국과 쿠바의 굴곡진 역사  

딸기21 2014. 12. 1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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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만에서 관타나모까지, 미국과 쿠바 사이의 관계는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격렬하고 극적인 드라마였다.

 

두 나라의 관계는 18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훗날 미국의 6대 대통령이 된 존 퀸시 애덤스는 1819~25년 국무장관을 지낼 당시 쿠바를 “스페인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져나온 사과”라 표현했다. 애덤스는 미국이 반 세기 안에 쿠바를 병합해야 한다면서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게 만든 중력의 법칙이 있듯 (미국이 쿠바를 병합해야 할) 정치의 법칙도 있다”고 주장했다.


쿠바를 미국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1900년의 포스터. /위키피디아


독립 이후 중남미의 스페인 세력과 대치해온 미국 입장에서 ‘스페인에 맞서온 쿠바’는 서반구의 거점으로 삼을만한 후보지였다. 1881년 당시 미 국무장관 제임스 블레인도 “멕시코만의 열쇠인 이 풍요로운 섬이 만일 스페인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쿠바는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미국(의 일부)가 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시각은 오랫동안 쿠바를 바라보는 미국의 인식을 대변해왔다. 1898년 스페인은 미국과 파리조약을 체결하면서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고 미국은 1902년 쿠바가 공식 독립할 때까지 이 나라를 점령통치했다.


그러나 쿠바라는 사과는 쉽사리 미국의 품에 떨어지지 않았다. 1926년 당시 미국 기업들은 쿠바 사탕수수 산업의 60%를 장악하고 있었고, 쿠바 정부를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제라르도 마차도 정권은 1933년 쿠바 반군들에 전복됐다.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군사개입을 요청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벗이라며 ‘좋은 이웃(Good Neighbor) 정책’을 주장했던 미국은 전함 29척을 보내 쿠바를 침공했다. 이후 세워진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군사독재정권은 폭정을 거듭, 20세기의 역사적인 사건들 중 하나였던 쿠바 혁명의 불씨를 심었다.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반군을 진압하도록 바티스타에게 무기를 내주기도 했다.


1960년 5월, 혁명에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맨 왼쪽)와 에르네스토 체게바라(가운데) 등이 아바나에서 기념행진을 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그러나 카스트로와 에르네스토 체게바라가 이끄는 반군은 혁명에 성공했고 1959년 아바나에 혁명정부가 들어섰다. 뒤통수를 맞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는 쿠바 혁명정부를 어쩔 수 없이 승인했다. 하지만 혁명정부가 산업을 국유화하고 미국 기업들을 쫓아내자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극도로 적대시하게 됐다. 미국은 쿠바산 설탕 수입을 중단하고 석유공급을 끊었다. 냉전이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쿠바는 석유를 얻기 위해 소련에 손을 벌렸고, 카리브해의 섬나라는 동서 양 진영의 첨예한 대결장이 됐다.

 

1961년 초 미국은 쿠바와 단교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카스트로를 축출하기 위해 수 차례 비밀작전을 벌였다. 그 해 4월 CIA로부터 훈련받은 쿠바 망명자들이 피그만을 침공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패착이었다. 1962년 미국 U2 정찰기는 쿠바에 건설되고 있던 소련 미사일기지를 촬영했다. 이로 인해 촉발된 미사일 위기는 미·소 양측간 핵전쟁 위기로까지 가면서 세계를 공포에 빠뜨렸다.


피그만 침공


미 정보당국이 ‘몽구스 작전’ 혹은 통칭해 ‘쿠바 프로젝트’라 불렀던 카스트로 전복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은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를 단계적으로 높이고, 미국과 쿠바 간 이동을 금지시키고, 에너지·식량공급을 끊어 고사시키려 애썼으나 쿠바를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뉴욕타임스 기자 팀 와이너는 CIA 비사를 다룬 책 <잿더미의 유산>에서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던 작전들이 결국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라는 역풍으로 나타났으나, 미 당국은 이를 숨기기 위해 급급했다고 쓰고 있다.

 

1970년대가 되자 미국이 카스트로를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974년이 되자 미국 관리들이 다시 쿠바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1977년 미 지미 카터 정부는 쿠바와 이익대표부를 교차 설치했다. 카스트로 정권은 건재했지만 미국의 봉쇄 속에 쿠바 경제는 무너지고 있었다. 1만명 넘는 쿠바인들이 페루의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카스트로는 “쿠바를 떠날 사람은 모두 떠나도 좋다”고 선언했고, 그 해에만 12만5000명 정도의 쿠바인이 보트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1980년 쿠바 엑소더스). 


Cuban refugees leave a dock at the port of Mariel, Cuba, bound for Key West, Fla., as a Cuban guard watches. AP Photo


1981년 집권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전임 카터행정부와 달리 쿠바를 더욱 옥죄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소련이 무너지자 쿠바는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외딴 섬이 됐다. 미국은 1992년 10월의 쿠바민주주의법(‘토리셀리법’), 1996년의 쿠바 자유와 민주주의 연대법(‘헬름스-버튼법’) 등으로 쿠바에 전방위 제재를 가했다. 다국적기업들은 ‘쿠바냐 미국이냐’의 선택을 강요받았고, 쿠바는 북한과 함께 지구상 가장 고립된 나라가 됐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조차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기 시작했다. 빌 클린턴 정부는 쿠바를 경제적으로 봉쇄하면서도 1999년 양국 간 여행제한을 완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2000년 9월 유엔 밀레니엄정상회의에서 클린턴과 카스트로는 기념사진 촬영 때 만나 악수를 했다. 두 나라 정상 간 40여년 만의 악수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쿠바를 극도로 적대시했다. 2004년 재선 운동을 벌일 때 부시는 쿠바를 “폭정의 전초기지”라 불렀고, 집권기간 내내 쿠바를 압박했다. 하지만 21세기에 미국과 쿠바의 꼬인 관계를 드러내보인 것은 관타나모였다. 미국은 대테러전을 벌이며 잡아들인 무슬림들을 쿠바로부터 100년 넘게 임대해 쓰고 있는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수감했다. 관타나모는 쿠바 땅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미국의 부도덕성과 인권침해를 세계에 알린 상징이 됐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집권 초부터 “쿠바와의 대화에 열려 있다”며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취임 첫해인 2009년 3월 오바마는 쿠바계 미국인들의 쿠바 여행 제한을 완화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미국과 쿠바 간 통신도 쉬워졌다. 그 해 오바마는 미주정상회의에서 쿠바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2008년 카스트로가 동생 라울에게 권력을 공식 이양하면서 쿠바 내 분위기도 좀더 누그러져 있던 상황이었다. 


President Barack Obama shakes hands with Cuban President Raul Castro during the official memorial service for former South African President Nelson Mandela at FNB Stadium, Dec. 10, 2013, in Johannesburg, South Africa. Chip Somodevilla/Getty Images


2012년 라울은 미국과 “어떤 것이라도 논의할 수 있다”며 오바마 정부의 잇단 신호에 화답했다. 지난해 12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추모행사에서 만난 오바마와 라울은 어색한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1년만에 두 나라는 관계 정상화를 발표했다.


미-쿠바 관계 연표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혁명으로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 전복

1960년 미국, 쿠바 경제제재 시작

1961년 1월 미국, 쿠바와 단교. 4월 피그만 침공


Fidel Castro, leader of Cuba's revolutionary forces, and members of his staff are pictured in the Sierra Maestra mountains on June 7, 1957. From right, Captain Juan Almeida, Captain George Sotus (both seated, right corner), Captain Crescentio Perez, Cuban revolutionary leader Fidel Castro, Captain Raoul Castro, the leader's younger brother (kneeling foreground), Lieutenant Universo Sanchez, Castro's adjutant, Dr. Ernesto "Che" Guevara, official physician of the rebel army and Captain Guillermo Garcia. (UPI Photo/FILE).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1977년 미-쿠바, 이익대표부 교차 설치

1980년 ‘쿠바 엑소더스’, 보트피플 12만5000명 미국으로 이동

1993년 쿠바, 경제난으로 달러 유통 일부 허용

1994년 미-쿠바 이민협정, 연간 2만명의 쿠바인 미국 이주 허용

1996년 미국 민항기 2대 쿠바 공군에 격추, 미 의회 쿠바 제재 강화

2001년 허리케인 미셀 쿠바 강타. 미국, 40년만에 쿠바에 식료품 수출 허용

2008년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취임


File photo of news ticker on the front of the U.S diplomatic mission in Havana...A news ticker reading “Democracy in Cuba” is displayed on the front of the U.S diplomatic mission in Havana in this February 20, 2008 file photo. The United States has turned off a news ticker at its diplomatic mission in Havana that long had irritated the Cuban government, the U.S. State Department said on July 27, 2009, in another sign of efforts to improve relations with Cuba. REUTERS/Enrique De La Osa/Files(CUBA POLITICS)


2009년 4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쿠바 여행제한 완화

2011년 10월 미국, 플로리다에 수감돼 있던 르네 곤살레스 석방

2013년 12월 오바마-라울, 넬슨 만델라 추모식에서 악수

2014년 12월 16일 쿠바에서 구금됐던 미국인 앨런 그로스 석방

            17일 오바마·라울, 양국간 관계 정상화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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