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노벨상 트리비아

딸기21 2005. 10. 14.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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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이 잇달아 발표됐다. 1901년 첫 시상 이래 어느새 105년, `세계 최고 영예의 상'을 자랑하는 노벨상답게 그 뒤에는 각종 기록과 숨겨진 이야기들도 많다. 한 집안 5명이 수상한 `노벨상 가족'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상을 거부한 이들도 있다. 노벨상을 둘러싼 재미난 기록과 에피소드들을 알아본다.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열리는 노벨위원회의 평화상 발표 장면



1. 노벨상의 기록들 


평생 1번만 받아도 국가 전체의 영예가 되는 노벨상을 2번씩 받은 사람은 1958년과 80년 화학상을 탄 영국의 프레데릭 생어를 비롯해 4명이 있다. 3번 수상한 케이스는 국제적십자위원회(1917.44.63년 평화상)가 유일하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스웨덴의 다그 함마르시욀드(1961년 평화상)와 작가 에리크 카를펠트(1931년 문학상)는 수상자로 선정된 뒤 세상을 떠 `사후 수상' 기록을 세웠다.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는 미국. 2004년까지 275명이 나왔다. 상위 10위권은 모두 구미 국가들이며 아시아에서는 일본(7명)과 인도(4명)가 많은 편이다. 미 하버드와 스탠퍼드대,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은 노벨상의 산실. 연구소 중에서는 올해 물리학상 수상자 테오도어 핸슈 등 16명을 배출한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가 독보적이다. 연구소의 이름이 된 막스 플랑크 자신도 1918년 물리학상을 받았다.

2. 부부, 부자, 부녀, 모녀...`노벨상 가족'

윌리엄 헨리 브래그(영국)와 로렌스 브래그 부자는 1915년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다. 당시 25세였던 아들 로렌스는 최연소 수상 기록도 갖고 있다.

조셉 톰슨(1906년 물리학상.영국)과 조지 톰슨(1937년 물리학상), 닐스 보어(1922년 물리학상.덴마크)와 아게 보어(1975년 물리학상), 카를 시그반(1924년 물리학상.스웨덴)과 카이 시그반(1981년 물리학상), H 폰 오일러-헬핀(1929년 화학상.스웨덴)과 울프 폰 오일러(1970년 생리의학상) 등 세 쌍은 먼저 아버지가 받고 뒤에 아들이 받았다.

부부 수상자는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1903년 물리학상. 프랑스-오른쪽 사진), 프레데릭 졸리오와 이레네 졸리오-퀴리(1935년 화학상. 프랑스), 칼 코리와 거티 코리(1947년 생리의학상. 미국) 세 커플이 있다. 1969년 경제학상을 받은 얀 틴베르헨(네덜란드)과 1973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니콜라스 틴베르헨은 형제간이다.

퀴리 집안은 노벨상 5개를 받아낸 명실상부한 `노벨상 가족'이다. 마리 퀴리는 남편과 함께 물리학상을 받고 1911년 단독으로 화학상을 탔다. 그는 첫 여성 수상자이자 2번 상을 받은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두 번째 여성 수상자는 마리의 딸 이레네였다. 모녀가 받은 것은 이들 뿐이다.

3. DNA 이중나선 놓치고도 2번 상 받은 라이너스 폴링

미국 과학자 라이너스 칼 폴링은 양자역학을 생화학에 활용하기 시작한 선구자이자, `비운의 과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1951년에 단백질의 알파 나선구조를 처음으로 제시했지만 이듬해 `3중 나선' 모형을 발표, DNA 분자구조 발견의 영예를 놓쳤다. 그의 발표 직후 영국의 프랜시스 크릭과 미국의 제임스 왓슨(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이 2중나선을 공동 발견해 20세기 생물학계 최고 스타가 됐다. 하지만 폴링은 다른 연구를 통해 1954년 노벨화학상을 탔다.

폴링의 DNA 연구가 막판에 부진했던 것은 반전반핵운동에 참여하느라 연구에 전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이라크전 반대 시위대의 피켓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No More War(전쟁은 이제 그만)'라는 문구는 폴링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폴링은 반핵운동 때문에 미국 매카시즘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1952년 영국 왕립학회 DNA심포지엄에는 국무부가 여권을 압수하는 바람에 가지 못했고, 노벨화학상 시상식 참석조차 못할 뻔했다. 반핵운동으로 폴링은 1963년 말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그의 터전인 칼텍에서는 축하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4. 퇴짜맞은 논문으로 노벨상을 탄 루이 드 브로이

알베르트 아이슈타인(스위스)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업적이 `상대성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1905년에 발표한 특수상대성 이론 논문들과 1916년의 일반상대성 이론은 당시에는 너무나 선구적인 이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921년 양자론으로 물리학상을 받았다. 프랑스의 드 브로이는 1925년 양자론에 바탕을 둔 `만물의 이중성 이론'을 소르본 대학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지만 "너무 철학적이다"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이 논문은 4년 뒤 드 브로이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줬다.

5. `최악의 수상작'은 헨리 키신저

노벨상을 둘러싼 논란도 많다. 대표적인 것은 "기생충이 암을 일으킨다"는 논문으로 1926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덴마크 병리학자 요하네스 피버거 사례. 잘못된 실험으로 얻어낸 잘못된 논문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노벨상을 놓고 사제간 싸움이 일어난 적도 있다. 1933년 미국 생물학자 토머스 모건이 생리의학상을 받자 제자인 허먼 멀러가 "논문을 표절한 모건에게 상을 빼앗겼다"고 반발한 것. 초파리를 이용해 `유전자 지도'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멀러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멀러는 사회주의 우생학에 매료돼 옛소련으로 갔다가 크렘린 독재에 실망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냉전시대가 낳은 또 한명의 불운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1946년 마침내 업적을 인정받아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평화상 쪽엔 논란이 더욱 많다. 베트남 전쟁을 주도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1973년 `베트남 분쟁 해결'이라는 공로로 수상한 것은 노벨상 역사에서 `최악의 선정'으로 꼽히고 있다.

6. 노벨상을 거절한 사람들

노벨상을 거절한 이들도 6명이나 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958년 문학상. 소련)와 장 폴 사르트르(1964년 문학상. 프랑스)가 대표적. 베트남(당시 월맹)의 레둑토(1973년 평화상)는 전쟁을 일으킨 키신저와 공동 수상자로 결정되자 상을 거절했다.

1938~39년에는 화학상과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정해진 독일 과학자 3명이 히틀러의 지시로 수상을 거부했다. 수상을 거부해도 이들의 이름은 노벨위원회 선정자 명단에 등재되며, `수상 거부'가 함께 표기되고 상금은 노벨 기금으로 환수된다.

7. 간디는 어째서 평화상을 받지 못했나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이 화제가 되는 인물도 있다. 인도의 마하트마 모한다스 간디는 1937년부터 1948년 암살되기 직전까지 5차례나 평화상 후보에 올랐었다. 말 그대로 `평화의 상징'인 간디가 어째서 상을 받지 못했는지에 대해선 비유럽인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는 설, 평화상을 심사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인도를 지배한 영국 눈치를 봤다는 설 등 추측이 분분하다.

노벨위원회 사이트(nobelprize.org)에 실린 글을 보면 당시 심사위원 한명이 인도에서 간디가 우상화되는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간디의 철저한 비폭력 노선에 대해 국제평화운동 내부에서 비판이 많았다는 사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까지 노벨상이 주로 구미인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은 노벨위원회도 인정하고 있다. 훗날 노벨위원회 위원들조차 "간디에게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을 정도. 1989년 달라이 라마가 평화상을 받을 때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이 상에는 간디에 대한 경의도 들어 있다"고 말했다.

8. `노벨 수학상'은 왜 없을까

과학, 의학 분야를 망라한 노벨상에 `수학상'은 없다.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은 "발명이나 발견에 상을 주라"는 유언을 남겼고, 생전에 이론 과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 하지만 실상은 노벨이 고스타 미타그-레플러라는 당대의 수학자와 연적 사이였고, 수학상 수상자로 미타그-레프러가 선정될 것을 우려해 만들지 않았다는 뒷얘기가 있다.

평화상을 선정하는 노벨위원회가 왜 노르웨이에 설치됐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위원회 측의 답변은 간단하다. "아무도 모른다"는 것. 노벨은 스웨덴인이고 노벨상 심사도 스웨덴에서 하지만 노벨위원회만 노르웨이에 있다. 노벨은 생전에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았다.

9. 노벨상 메달은 18K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주어지는 메달은 순금이 아닌 18K이고 표면에만 24K로 도금돼 있다. 상금액은 기금 운용 실적에 따라 매년 조금씩 달라지는데, 1901년 첫해 상금은 1만5000크로나(약 2500만원)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상 1개 당 13억원 수준으로 높아졌다. 상금은 물론 수상자들이 나눠 갖는다.

수상자 선정은 부문별 위원회가 맡는다. 선정위원회는 부문별로 1000명씩 총 6000명에게 후보를 추천받는데, 스스로를 추천한 사람은 추천위원 자격을 박탈한다. 평화상 이외 분야는 개인에게만 시상하며 각 상별로 2개 분야 3인 이하에게만 상을 준다. 선정 시점에 생존하고 있어야 대상이 된다. 일단 수상자가 결정되면 번복은 불가능하다.


지난 2001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100주년 기념식

노벨평화상 시상식 뒤 열리는 평화콘서트

 ★  국적별 노벨상 수상자 수 (2004년 말 기준)


미국                           275

영국                            96

독일                            73

프랑스                         50

스웨덴                         31

스위스                         21

러시아(옛소련 포함)      18

이탈리아                      15

네덜란드                      14

덴마크 오스트리아 일본  12

노르웨이                      9

벨기에                         8

남아공 아일랜드 캐나다  7

스페인 이스라엘             6

아르헨티나 호주             5

인도 폴란드                   4

헝가리                          3

과테말라 그리스 동티모르

멕시코 이집트 중국 체코 칠레

포르투갈 핀란드                     2

가나 나이지리아 미얀마 베트남

불가리아 세인트루시아 아이슬란드

유고슬라비아 이란 케냐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티벳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한국 1


대륙별 노벨평화상 수상 건수 (2004년 말 기준)    유럽 47

                                                                           북미 20

                                                                           아시아 13

                                                                           아프리카 7

                                                                           중남미 5

                                                                           국제기구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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