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소수민족, 종교 탄압에 '인종청소'까지... 미얀마 '버마족만을 위한 민주화'인가

딸기21 2013. 6. 2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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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미얀마 중부 라카인 주정부가 무슬림 주민들을 대상으로 아이를 2명까지만 갖게 하는 선별적 산아제한을 하겠다고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라카인 주 정부는 방글라데시와 인접한 국경지대 무슬림인 로힝자족 2개 마을에 국한되는 조치라고 밝혔다. 그 대상지역인 마웅다우와 부티다웅은 주민 95%가 무슬림인 곳이었다.


종교에 따른 산아제한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주 정부는 ‘종교 간 긴장을 줄이기 위해’ 내놓은 조치라고 주장했다. 로힝자의 출산율이 높아 인구가 급증하면서 다른 주민들이 불안해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라든 이 조치는 나치 같은 인종주의자들의 선별적 산아제한 같은 우생학적 조치를 연상케 한다. 


주 정부는 ‘종교 간 긴장’을 운운했지만 실제로는 소수민족인 로힝자에 대한 인종주의적 차별이었던 셈이다. 반발이 일자 미얀마 정부는 라카인 주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을 재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의구심은 가시지 않는다.



지난해 6월 미얀마의 아라칸 주에서 무슬림 로힝야족 마을이 불타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www.hrw.org)



지난해 이 지역에서는 정부의 탄압을 받아온 로힝자 무슬림 200여명이 정부군에 살해됐다. 정부는 1991년 군정 시절에 폭동을 진압한다며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벌였고, 20만명 이상이 난민이 됐다. 20여년이 지났지만 탄압은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최근 몇년 새 아웅산 수지 여사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군부정권에서 ‘민간 정권’으로 탈바꿈한 테인세인 대통령이 최근 미국을 방문,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면서 미얀마는 국제무대에도 완전히 복귀했다. 

그동안 미얀마 군부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버마’라는 이름을 고수해왔던 미국 정부는 이번 테인세인 방문 때에는 ‘미얀마’라는 호칭을 썼다. 이전의 맹방인 중국과 미래의 우방인 미국이 앞다퉈 미얀마에 구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적 ‘민주화’의 걸을 걷고 있는 미얀마의 분위기는 심상찮다. 정치적 억압의 무게가 줄어들면서 행동의 고삐가 풀린 다수 버마족들이 소수 부족이나 무슬림들을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를 위한 민주화가 ‘다수만을 위한 민주화’가 되어, 핍박받는 소수에는 오히려 더 큰 차별과 괴롭힘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다.


테인세인 미얀마 대통령(왼쪽)이 5월 20일 미국을 방문,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3월 말 수도 네이피도 북쪽에 있는 만달레이 지역의 소도시 메익틸라에서 무슬림 소년 20명 이상이 납치된 뒤 끔찍하게 살해됐다. 무슬림들은 “정부가 학살을 방조했다”고 주장했지만 당국은 묵살했다. 하지만 BBC방송이 무슬림 살해 동영상을 입수해 22일 공개하면서 경찰의 ‘학살 방조’가 그대로 드러났다. 

동영상은 현지 경찰이 찍은 것이었다. 경찰은 폭도들이 “죽게 내버려 둬, 물을 부으면 안돼”라고 떠들며 주민을 살해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불교 승려를 비롯한 폭도들이 무슬림 청년을 폭행해 살해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묵인했다. 그저 촬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동영상에는 무슬림 가게에 불교도들이 불을 지르는 장면, 무슬림 주민이 ‘화형’을 당하는 장면 등이 담겨 있었다. 

메익틸라는 주민 30%가 무슬림이다. 당초 충돌은 작은 금은방에서 시작됐다. 불교도 부부가 금붙이를 가게에 팔려다 가격 시비가 붙었다. 상술이 뛰어난 무슬림들은 이 지역 상업과 운송을 장악하고 있다. 불교도들은 무슬림 가게들을 부수고 조직적으로 약탈했다. ‘이슬람 혐오’를 대놓고 주장해온 유명 승려 아신 위라투 등은 종교 간 적대에 기름을 부었다. 아신은 “무슬림들을 그냥 두면 우리나라가 아프가니스탄처럼 될 것”이라고 선동했다. 불교도들의 잇단 공격에 무슬림 40여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오히려 이 살인극 뒤 약탈당한 금은방 주인 부부가 절도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지난 4월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지난해의 로힝자 학살을 조사한 뒤 미얀마가 ‘인종청소’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로힝자를 노린 반인도범죄와 인종청소가 벌어졌으며, 정부군이 주민들을 학살한 뒤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단체는 학살 사실을 보여주는 대규모 매장지 4곳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지난해의 공격으로 12만5000명이 난민이 된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올들어 로힝자 ‘보트피플’이 미얀마와 주변국 해상에서 사고를 당하는 일이 계속 보도되고 있다. 

민주화 속에 국제무대에 복귀하며 ‘정통성’을 확보한 미얀마 정부 하에서 무슬림에 대한 공격이 노골화됐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뿐만 아니라 소수 부족의 움직임도 심상찮다. 재작년 카친족의 무장봉기는 정부와의 휴전협정을 17년 만에 깬 것이었다. 
중국과 맞닿은 북부 카친주는 소수민족인 카친족의 주요 거주지역이다. 대부분 불교도인 버마족과 달리 이들은 기독교 침례교파다. 과거 영국 점령통치 시절 기독교도가 됐다. 교회와 학교에서 카친족 청소년들은 버마어가 아닌 카친어를 쓴다. 

2011년 6월 이곳에서는 중앙정부에 맞선 봉기가 일어났다. 정부군의 진압으로 일단 봉기는 잦아들었지만 반군인 카친독립군에 지원하는 카친족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 또다른 소수민족인 이웃의 와족과 연대해 내전을 하자는 강경파들도 있다. 카친독립군은 4000명이지만 와족 군대는 2만명에 이른다. 소수민족들이 정말로 뭉쳐 봉기한다면 민주화와 경제개발에 나선 미얀마에 불안요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미얀마 건국영웅인 아웅산 장군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연방정부를 구상하고 샨족, 친족, 카친족 등과 협정을 맺었다. 소수민족에게 광범한 자치를 허용하되 군대는 통합운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웅산은 독립 직후인 1947년 암살됐다. 1962년 집권한 네윈 장군의 군사독재정권은 소수민족의 자치 요구와 종교간 균열을 폭압으로 억눌렀다. 기독교 성경을 금서로 만들고 무슬림 마을에 불교 사원과 파고다(탑)를 지었다. 군부는 소수집단을 억압하고 ‘버마화’를 강요했다. 지금도 불교도가 아닌 이들은 관리가 될 수 없으며 군대에 들어가지 못한다. 무슬림들을 아예 자국민이 아닌 불법이주자로 규정해 쫓아내기도 한다. 

이웅산의 딸이자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수지가 정치를 재개하고 민주화 조치들이 이뤄지고 있지만 내부의 균열은 더 커지고 있다. 족쇄에서 풀려난 수지는 대권 야심을 강하게 내비치면서도 정작 가장 고통받는 소수집단 문제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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