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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정치적 후광’은 누구에게?

딸기21 2013. 4. 2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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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95)이 얼마전 폐렴 치료를 받았다. 그의 건강은 지구촌의 관심사다. 폭력과 차별과 식민주의 등 지난 세기의 모든 모순에 맞서 싸운 위대한 투사라는 상징성을 넘어서는 ‘정치적 의미’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만델라의 큰딸 마카지웨(위)와 둘째딸 제나니(아래)

이미 고령인 만델라는 수시로 병원 신세를 지는데, 그때마다 남아공은 출렁인다. 만델라가 감옥에서 풀려나 대통령이 된 것이 1994년이니 벌써 20년 가까이 되어간다. 후임인 타보 음베키가 두 번 대통령을 했고, 뒤따라 제이콥 주마가 흑인 정권을 이어가고 있는데도 남아공은 늘 불안하다. 흑백 차별이 철폐되고 ‘흑인경제강화(BEE)’ 정책이 펼쳐지면서 백인들의 ‘엑소더스’로 경제가 휘청인 데다, 남아 있는 백인들도 만델라의 위상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만델라 집권 뒤 일부 흑인들은 “백인들을 달래느라 흑인들의 고통과 분노를 해소해주지 못한다”고 비판했지만 만델라의 화해정책이 남아공을 묶어준 힘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뒤이은 음베키는 엘리트 교육을 받고 ‘셰익스피어의 시를 암송하는’ 지식인이었기에 백인들의 거부감이 덜했다.

하지만 여러 아내를 두고 성폭행 전력도 있는 주마 현 대통령은 다르다. 백인은 물론, 흑인 기득권층도 주마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다. 또 주마는 다수 부족인 줄루 출신이다. 만델라를 비롯해 집권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지도부 중에는 소수 부족인 코사 출신이 많았다. 이 때문에 줄루는 잉카타자유당이라는 별도의 정당으로 뭉쳐 백인정권과 싸웠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가 끝난 직후 줄루와 다른 흑인들 간 유혈충돌이 일어난 전례가 있다.

고령의 만델라 건강은 지구촌 관심사

이런 연유로 만델라 사후의 남아공을 불안하게 보는 시선이 많은데, 최근엔 만델라 가족 내 문제까지 불거졌다. 만델라의 자식들과 측근 간 재산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흔한 집안 다툼이라 보기엔 상황이 복잡하다. 남아공의 유력 인물들이 거론되는 중대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발단은 만델라의 두 딸이 신탁기금 2곳의 이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이다. 만델라의 두 딸 마카지웨(60)와 제나니(54)는 지난 8일 요하네스버그 법원에 이사 3명의 해임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마카지웨는 사업가이고, 제나니는 아르헨티나 주재 남아공 대사로 일하고 있다. 두 딸이 문제 삼은 화해투자홀딩스(HIH)와 관용투자홀딩스(GIH)는 만델라가 로벤섬 감옥에서 만든 손바닥 프린팅 작품의 판매수익금을 관장하는데, 자산가치가 1500만 란트(약 19억원)로 평가된다. 두 신탁기금은 만델라와 가족들 소유다.


두 딸이 신탁기금 이사들 상대로 소송

소송을 당한 이들은 인권 변호사 조지 비조스와 발리 추에네, 사업가이자 주민정착부 장관인 모시마 가브리엘 세크왈레다. 비조스는 1964년 만델라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역사적인 ‘리보니아 재판’ 때 만델라를 변호한 평생 동지이며, 추에네 역시 흑인운동에 참여한 변호사다. 문제는 세크왈레다. 흔히 ‘토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세크왈레는 흑인정권이 들어선 이래로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우다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했지만 만델라 집권 뒤 사업가로 변신했다.

흑인운동가에서 사업가가 된 세크왈레

음벨라판다 그룹이라는 회사를 세운 그는 주로 다이아몬드 등 광업에 투자했다. 음벨라판다(Mvelaphanda)는 흑인부족 언어로 ‘진보’라는 뜻이지만 이 회사의 사업은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고, 백인들이 수세기 동안 독점해온 광업에서 흑인 이름으로 한몫을 챙기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크왈레는 흑인 착취로 악명 높았던 다이아몬드회사 드비어스의 해리 오펜하이머 회장을 흉내내듯 광부들을 홀대하면서 ‘자선사업’으로 이름을 얻는 데 주력했다.

타보 음베키 대통령 시절 세크왈레는 또다른 흑인운동가 출신 사업가 시릴 라마포사와 손잡고 음베키 정부를 축출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라마포사와 세크왈레 같은 이들은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나자 백인들이 장악해온 경제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과거의 투쟁경력과 연줄, 타고난 수완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케이프타운의 와이너리와 고급주택가, 호텔을 누비는 신흥 흑인 갑부층이 탄생한 것이다.
반면 흑인 노동자·빈민들의 삶은 이전보다 나아진 게 없었고 분배정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세크왈레가 대권 욕심을 내면서 ANC 내 권력싸움까지 벌어졌다. 주마가 이겨 대통령이 됐지만 세크왈레가 장관직에 만족할 리 없다. 그가 재력을 바탕으로 큰 꿈을 꾸고 있다는 소문은 끊이지 않는다.

만델라 딸들의 소송은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나왔다. 두 딸은 기금 이사 선임에 가족들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사들은 두 딸이 기금의 돈을 가로채려는 것이라며 맞서고 있다.

‘만델라’라는 이름은 평등과 평화의 아이콘인 동시에 엄청난 가치를 지닌 ‘상표’이기도 하다. 만델라의 큰딸 마카지웨는 지난해 ‘만델라 하우스’라는 이름을 내걸고 포도주 사업을 시작했다. 비조스는 마카지웨가 아무 설명 없이 신탁기금의 돈을 가져가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마카지웨의 딸 투퀴니(39)가 16일 비조스 앞으로 공개편지를 보내 “우리 가족을 모함한다”고 비난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남아공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의 한 공원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AP


‘만델라’라는 이름은 엄청난 정치적 가치

만델라는 에블린(2004년 사망)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가 종교문제로 갈라섰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 네 자녀를 뒀는데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마카지웨뿐이다. 만델라의 인생에 큰 흔적을 남긴 사람은 ANC 여성동맹을 이끈 두 번째 부인 위니이지만, 만델라가 장기간 수감된 탓에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둘 사이에는 제나니와 진지 두 딸이 있다. 제나니는 스와질랜드 왕족과 결혼했다. 만델라의 말년을 함께하는 사람은 모잠비크 대통령 부인이었던 그라사 마셸이다. 그라사는 민족주의 지도자인 사모라 마셸이 의문사를 당한 뒤 민주화운동을 벌였으며 1998년 만델라와 재혼했다.

아직 아버지의 이름을 이을 정치적 거물은 없지만 만델라 가족은 ANC에서 큰 발언권을 갖고 있다. 지난해 제나니가 대사로 임명되자 현지 일간 메일&가디언 등은 ‘만델라 정치왕조의 탄생이냐’는 기사들을 실었다. 제나니의 여동생 진지는 ANC 외곽조직을 맡고 있으며, 제나니의 아들은 국제구호기구에서 일한다.

무엇보다 이들에겐 아직도 왕성히 활동하는 어머니 위니가 있다. 제나니는 아버지의 유전자에 더해 어머니의 카리스마와 정치감각을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델라의 장손 만들라는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만델라라는 이름이 갖는 잠재적인 자산가치와 정치적 영향력을 놓고 싸움이 벌어진다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남아공 정국이 복잡한 양상으로 치달을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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