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39. 지금부터 100년 전, 일촉즉발의 동유럽

딸기21 2014. 6. 1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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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1914년의 동유럽


올해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지요. 유럽에서는 곳곳에서 전쟁의 교훈을 되새기는 행사가 벌어지는 모양입니다만... 


지금부터 100년 전, 위기를 향해 치닫는 동유럽으로 가보겠습니다. 당시 독일 의회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러시아와 밀착하는 데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고조돼 폭발 직전에 와 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세력균형'의 시대. 한참 국력이 커진 독일이 이제는 합스부르크와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Essen, Stadtpanorama vom Rathausturm nach Westen, Krupp Fabriken, um 1890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생각은 '저 둘이만 친해지면 우리가 외톨이가 되니, 아예 3각 균형을 잡자'는 것. 어쩐지 제갈량의 정(鼎)이 생각나는...


제국들의 이합집산


그래서 비스마르크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연합을 성사시킨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1881년에는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광범위한 3각 동맹을 굳히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셋이 손을 잡으려면 먹을 떡이 있어야겠죠. 이해관계가 맞아야 하니. 비스마르크가 고른 떡은 폴란드였습니다. 폴란드 땅을 3국이 충돌 없이 나눠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지요.


1914년, 1차 대전 직전의 독일 제국


1914년, 1차 대전 직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하여 1882년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 제국 간 동맹 Three Emperors' League 을 맺습니다. 하지만 긴장은 말끔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독일과 러시아는 모두 자국 내 폴란드인들을 탄압한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쪽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널리 퍼져있었던 터라 상대적으로 폴란드인들에 대해서도 느슨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합스부르크령 갈리시아는 폴란드인들에게는 ‘제2의 고향’이라 할 정도였습니다. 러시아 지배에 항거하는 폴란드인들은 물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까지 갈리시아로 넘어와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니 러시아와는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자유주의의 목소리가 계속 커짐으로써 동맹은 깨졌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 동맹을 맺을 때부터 취약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맹의 구성원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이탈리아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Wilhelm II, German Emperor. Oil painting by Max Koner, 1890. /WIKIPEDIA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1890년 쫓겨났고 빌헬름2세 황제 Kaiser Friedrich Wilhelm Viktor Albert (1888-1918년 재위)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당시 독일과 러시아 간 외교적 연대는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지지부진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던 러시아는 부쩍 프랑스에 밀착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합종연횡. 프랑스 역시 독일에 맞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싶어 하던 차였습니다.


합종연횡, 3국 동맹과 3국 협상이 맞부딪치다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1894년 체결된 비밀조약은 유럽 전체에 걸친 국제적인 조약들로 연결돼, 열강들을 양대 진영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편은 1차 대전 당시의 ‘동맹국 Central Powers’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한 편은 ‘연합국 Entente’ 멤버인 프랑스와 러시아를 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와 영국이 두 세력에 각기 가세함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이탈리아의 3국 동맹과 프랑스·러시아·영국의 3국 협상 세력이 맞부딪치게 됐습니다.


Construction of the first Hungarian underground line, 1896, Budapest


열강들만 가입된 채로 남았더라면 이 제휴 체제가 제대로 작동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열강들은 여기에 군소국들을 더 끌어들였습니다. 


일례로 베를린 회의를 통해 발칸 반도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상실한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발칸의 동맹 세력으로 포섭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야망을 억누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것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적대감정에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1903년 세르비아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친 합스부르크 성향이던 알렉산드르 오브레노비치 Aleksandr Obrenović (1889-1903년 재위) 국왕이 친위장교들에게 도살당하고 친 러시아계 페트르 카라조르제비치 Petr I Karadjordjević (페트르1세·1903-21년 재위)가 옹립됐습니다. 세르비아는 급속히 러시아 진영으로 이동했습니다.


합스부르크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지도자라고 보긴 힘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안에는 여러 민족 집단들의 경계선이 이리저리 엇갈려 있었고, 황실은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민족 집단들은 합스부르크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매개로 제국에 통합돼 있었습니다. 



제국 내의 민족 집단들은 모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자신들 편을 들어주기를 기대했으나 황제는 제국의 기반인 헝가리와의 협정에 얽매여 있던 처지였습니다. 황제는 자신이 거느리는 다양한 민족 집단들과의 관계를 헌법적으로 어떻게 설정하느냐를 놓고 고민에 빠져들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Franz Joseph


오스트리아의 황제(1848~1916), 헝가리의 왕(1867~1916).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할하는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이어서 당대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다민족 국가로 무너져가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체제를 정비하고 통합을 유지한 인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Franz Joseph. 1898년

1879년에 프로이센이 이끄는 독일과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가 유럽 열강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1914년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결국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1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내가 암살당하고 아들이 엇나가는 등의 불운을 겪었다고 합니다.


제국의 절반인 오스트리아 쪽에서는 합스부르크가의 고민도 단순했습니다. 이 지역의 민족 문제는 대부분 체코인들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체코인들은 성 바츨라우스 the Crown of St. Vaclav 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세 보헤미아 왕국의 역사를 들먹이며 자신들도 헝가리계처럼 헌법적인 민족국가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620년 빌라 호라 Bílá hora 전투의 잔흔이 이어져 ‘제2의 헝가리’가 되고자 하는 체코인들의 열망을 짓밟았습니다.


합스부르크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킴으로써 헌법적으로 사실상 독립된 지위를 얻어낸 헝가리인들과 달리 체코인들은 수동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이르러서 체코인들도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대타협’을 통해 사실상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지켜본 체코인들은 보헤미아 대공의 허울뿐인 권한을 강화하고 자치를 얻어내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황제가 체코인들의 요구를 만족시켜줄 경우 제국 운영의 동반자인 헝가리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며, 다른 여러 민족들도 일제히 비슷한 요구를 들고 나올 것이 뻔했습니다.


1914-06-29 - Aftermath of attacks against Serbs in Sarajevo. /WIKIPEDIA


제국의 나머지 절반인 헝가리는 더 심각한 민족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헝가리의 주축인 마자르계는 대타협에 만족하며 현상유지를 선호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자신들만이 제국 헌법에 보장된 지위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자르족은 다른 소수 민족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때로는 가혹한 박해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들은 대개 농민인데다 약하고 분열돼 있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민족의 나라인 루마니아가 아니라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황제를 바라보며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역사적으로 독립 국가를 가져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 쪽의 체코인들보다도 독립 열망과 노력도 미약했습니다.


헝가리 내의 여러 민족들


슬로바키아인들은 더 온순하고 제국 내에서 영향력도 가장 작았습니다. 이들은 1000년 가까이 자기네 민족 국가를 세워본 적 없이 마자르족의 지배를 받았던 농민들이었습니다. 슬로바키아계로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도 모두 마자르족의 사회문화에 동화됨으로써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다고 합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체코인들과는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공유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두 세력이 연대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이렇게 취약했기 때문에 헝가리의 소수민족들 주에서도 문화적 탄압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내용과 상관 없는 아름다운 풍경... 크로아티아의 Plitvice Lakes National Park.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고 하네요. /위키피디아


헝가리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크로아티아계였습니다. 오스트리아와의 ‘대타협’으로 지위를 인정받은 헝가리인들은 자기네 땅 안에서 헌법상 지위를 놓고 크로아티아계와 비슷한 협상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대타협’ 이듬해인 1868년 헝가리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도 협약이 체결됐습니다. 크로아티아계가 계속 마자르족의 지배를 받는 대신 헝가리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헝가리 국가 안 크로아티아 지방 정부에도 크로아티아인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에 대해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크로아티아를 자신들이 직접 통치해야 한다며 반대했고,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세력은 완전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며 역시 반발했습니다. 체코계와 크로아티아계 모두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1867년 대타협을 독립의 모델로 삼고 있었습니다. 1908년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내부의 민족 문제들은 더 한층 복잡하게 돼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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