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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1908년의 발칸

딸기21 2014. 3. 1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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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1908년의 발칸


1860년대 서유럽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투르크 내 개혁파들이 전통적인 제국 운영방식과 술탄의 허울뿐인 개혁을 비판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술탄의 탄압을 받아 곧 해외로 추방됐습니다. 1902년 이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청년투르크 Jön Türkler’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청년투르크 조직은 이내 두 파벌로 갈렸습니다. 한 쪽은 투르크족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을 다시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다른 한쪽은 제국 내 모든 신민(臣民)들이 민족에 따라 자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분권화를 주장했습니다.


파리에서 청년투르크가 정치토론을 하고 있을 동안 마케도니아에서는 투르크 장교들이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장교들은 테살로니키에 본부를 둔 ‘조국과 자유 Vatan ve Hürriyet’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청년투르크를 통해 받아들인 급진적인 중앙집권적 민족주의를 신조로 삼고 있었습니다.


1905년의 청년투르크 장교들. 사진 anitkabir.org


20세기 초반부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오스만의 영토였던 오늘날의 터키와 동유럽 지역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는 '투르크 장교들의 봉기'를 들 수 있을 겁니다. 투르크 장교들의 움직임은 잘 알려진 대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터키, 즉 현대 터키공화국의 창건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 못잖게 중요한 것은, 이들의 운동이 '반작용'을 일으켜 '반투르크 민족주의'를 부추겼다는 점입니다. 


엔베르 파샤 Enver Pasha 와 무스타파 케말 Mustafa Kemal Atatürk 등 마케도니아 출신 장교들이 주축을 이룬 ‘조국과 자유’의 잘 조직된 장교 부대는 1908년 서구 열강의 개입에 항의하고 마케도니아의 분란을 종식시키겠다며 봉기를 일으킵니다. 조직 지도부는 제국의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군사작전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술탄 압둘 하미드2세 Abdül Hamid II (1876-1909년 재위)에게 개혁 헌법을 이행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1876년 오스만은 영국의 강요로 개혁 헌법을 채택했지만 그때까지 실천에 옮겨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제국군까지 이들을 지지하는 시위에 나선 이상, 술탄은 이들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제국의 문을 닫은 꼴이 되어버린 술탄 압둘 하미드 2세. 


1789년 무렵, 이스탄불의 탁심 광장에 세워진 군 막사.

1900년 무렵의 탁심 광장, 투르크 제국 군 병영. 

술탄 압둘 하미드2세는 탁심 광장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1909년 퇴위합니다.
탁심광장은 지난해 이스탄불 시민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지요.
위 그림과 사진은 http://mechanicalturk.wordpress.com/ 에서 가져왔습니다.


오스만 내 비무슬림 주민들과 서방은 처음에는 개혁운동에 환호를 보냈지만 그들의 감정은 곧 분노와 공포로 바뀌게 됩니다. 청년투르크의 목표는 철저하게 투르크 중심의 민족국가로 제국을 강화, 보전하는 것임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지요. 혁명 세력은 청년투르크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통일진보위원회 ittihat ve Terakki Cemiyeti’를 조직, 술탄이 자신들의 뜻을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투르크 헤게모니 하에 권력을 집중시키자고 주장했습니다. 투르크 민족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이전의 오스만 제국에서는 없던 일이었기에 투르크계가 아닌 제국 내 모든 민족이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알바니아계, 아랍계, 아르메니아계 사회에서는 민족적 자각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서유럽을 흉내 낸 청년투르크의 극우민족주의 정책은 끝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같은 비투르크 민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불렀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갈가리 찢기게 된 데에는 이런 요인들도 작용했습니다.



1908년 일어난 또 하나의 중대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무력 병합해버린 일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878년 베를린 조약(34 참조)에 따라 자신들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오스만 영토는 이렇게 줄어들어갑니다. 지도 출처는 http://www.transanatolie.com


오스트리아는 점령지에 시민 정부의 출범을 허용해줬습니다. 발칸에 군주정이 아닌 시민정이 출범한 것은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령 일리리아 정부 이래 처음이었습니다. 서유럽의 시각에서 보자면 합스부르크의 점령은 그곳 주민들에게는 ‘혜택’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합스부르크는 오스만 제국 통치 하에 수백 년 동안 그곳에 고착화돼온 이슬람식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수천 명의 무슬림 베이 bey(지주·족장)들이 각각 수만 명의 기독교도 농민들을 거느리는 체제가 굳어져 있었거든요.


지주들은 농민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빌려주고, 지역 유지로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농업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주산업이었지만 이런 토지소유구조 때문에 토지이용은 비효율적이었고 농사기술과 설비도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농민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점령으로 이 지역에 일부 혜택이 돌아오기는 했으나 토지제도가 그대로였으니 농민들의 삶이 나아질 수가 없었습니다. 주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투르크인 대지주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시위와 봉기는 오스트리아의 점령통치에 대한 항의로 끝맺기 일쑤였습니다.


오스만 제국에서 1908년 청년투르크의 혁명이 일어나자 유럽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열강들은 서둘러 외교 회의들을 소집, 오스만이 완전히 쓰러질 경우 발칸을 어떻게 나눠가질 것인지를 놓고 논란을 벌였습니다. 그해 9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알로이스 에렌탈 Alois Lexa von Aehrenthal 외무장관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Alexander Petrovich Izvolsky 외무장관의 만남도 이런 협상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부츨라우 Buchlau (현재는 체코의 부츨로프)에서 만나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즉시 합병하는 것을 러시아가 묵인해 주는 대신, 향후 러시아가 남하해 지중해에 접근하는 것에 오스트리아도 이의를 달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다음달인 10월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했습니다.


1908년 발행된 프랑스 르쁘띠주르날의 표지. /위키피디아
터키(오스만 투르크)를 찢어 나눠갖는 합스부르크와 불가리아... 팔짱 끼고 바라만 봐야 하는 터키.


이들의 움직임에 다른 열강들은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를 냈고, 세르비아인들은 분노했습니다. 러시아는 뒤늦게 자신들도 오스트리아에 속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일은 이미 이 시기에 틀이 잡히기 시작한 ‘동맹국 Central Powers’ 체제의 한 축인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지만 프랑스와 영국은 러시아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를 비난하면서도 무력행동에 나서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이 분쟁이 유럽 전체를 전쟁으로 몰고 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09년 오스만 제국도 오스트리아의 조치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위기’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아니,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선공’에 자극받은 불가리아의 페르디난트1세(1887-1918년 재위) 대공은 오스만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선언한 뒤, 마케도니아를 되찾아 병합하려는 야심을 노골화합니다. 


이 무렵 세르비아도 조용하지는 않았습니다. 1903년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유혈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친 합스부르크 세력인 오브레노비치 왕조를 뒤엎고 친러시아계 카라조르제비치 Karadkordjevićes 왕조가 들어섰습니다.


(정작 당시 러시아는 극동에서 일본과 대립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시죠? 러일전쟁... )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페트르1세. /위키피디아


세르비아의 반란 지도자 카라조르제('검은 조르제')에서 시작된 왕조를 가리킵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인 카라조르제 세력은 1842-58년 잠시 권력을 잡았으나 민족주의 그룹 내 라이벌이던 오브레노비치 왕조에 밀려났습니다. 1903년 오브레노비치 왕조를 무너뜨리고 재집권했습니다. 최초의 군주는 카라조르제의 아들 알렉산다르였고, 1903년 그의 아들 페트르1세가 근 반세기만에 다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1918년까지 세르비아 왕으로 재위하다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가 합쳐지면서 통합 왕국의 왕이 됐고요. 왕조는 1945년 왕정이 폐지돼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결성되면서 종말을 맞았습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새 집권자인 페트르1세(1903-21년 재위) 대공에게 불가리아를 지원하고 오스트리아에 공동으로 맞서도록 강요했습니다. 페트르 정부의 총리였던 니콜라 파시치 Nikola Pašić 는 반 합스부르크 입장에 선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관세를 대폭 올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무역 분쟁을 빚기도 했습니다. 당시 세르비아의 주요 수출품은 돼지고기였고 오스트리아가 최대 시장이었기 때문에 이 분쟁에는 ‘돼지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짧은 밀월은 마케도니아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끝나버렸고, 페르디난트가 바랐던 불가리아 독립의 꿈에도 암운이 드리워졌습니다.


★‘동맹국’ Central Powers

제1차 세계대전 때(1914-18년) 무렵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중심으로 결성된 국가연합. 이들 제국에 더해 1914년 오스만 제국이 가담했고 이듬해 불가리아도 가세했다. 이들은 1차 대전 시기 서부전선에서는 프랑스·영국과,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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