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는 트란스케이 출신의 동향 여성 에블린 은토코를 요하네스버그에서 만나 결혼했으나, 에블린이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되어 종교에 빠져들면서 결혼 13년만인 1957년 이혼했다. 만델라는 자서전 등에서도 에블린에 대해서는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간략하게 정리했을 뿐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만델라와 에블린은 큰 아들 마디바 템베킬레(템비)와 막가토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템비는 만델라가 로벤섬 감옥에 수감돼 있던 69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숨졌다. 딸들과 차남 막가토도 역시 만델라보다 먼저 사망했다. 에블린은 2004년 세상을 떴다.
만델라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운명적 만남’을 했던 인물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여성정치인으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두번째 부인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다. 역시 트란스케이 출신이지만 만델라와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만났다.
40대의 만델라는 흑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요하네스버그 시 공무원이 됐던 젊고 똑똑하고 예쁜 위니를 보고 한눈에 반해 청혼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지적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58년과 60년 두 딸 제나니(제니), 진지스와(진지)를 낳은 위니는 남편을 ‘정치에 빼앗기는’ 것 때문에 깊이 갈등하게 된다.
만델라와 위니의 결혼식. 위니는 참 예뻤다.
1964년 BBC방송과 인터뷰할 때의 위니.
당시의 인터뷰와 관련해서는 - http://news.bbc.co.uk/2/hi/africa/8474502.stm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스타일리쉬한 위니.
만델라가 오랜 수감생활을 시작하게 되자 위니는 남편 대신 정치투쟁에 나서 ANC 최고위 여성정치인이 되지만, 위니 주변에는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남성 편력과 살인·폭력교사 등의 혐의가 항상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만델라는 옥중에서 위니에 대한 악성 루머들을 접하면서도 언제나 위니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교도관들은 웃음지으며 다가와 내 귀에 ‘위니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말을 속삭이고 가곤 했다. 어떤 날은 위니에 대한 좋지않은 소문이 실린 신문기사를 오려 내 방에 던져놓고 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깥 세상에 두고 온 위니가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던가를 생각하면서 그녀의 행동들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녀는 충분히 유혹에 빠질 수 있는 나이였다. 그리고 내가 28년간 수감돼 있는 동안 ANC에서 나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시켜준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위니였다.” (만델라 자서전 <자유를 향한 긴 여정>에서)
다소 코라손 feel(?)이 나는 그라사 마셸.
사모라와 그라사의 이야기는 - 아프리카의 지도자들 참고
두 사람은 만델라가 92년 출감하면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오랜 기다림이 무색하게 96년 이혼했다. 위니가 정치적 파벌을 만들어 반대파를 살해하게끔 했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가지 범죄혐의들이 문제가 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 사이의 딸 제나니는 스와질랜드의 왕족과 결혼했는데, 제나니의 아들은 할아버지의 족적을 좆아 인도주의 국제 구호기구 활동을 하고 있다.
만델라의 말년을 함께한 사람은 인접한 아프리카 전체에서 추앙받는 지도자였던 사모라 마셸 전 모잠비크 대통령 부인 그라사 마셸이었다.
그라사는 '2명의 대통령과 결혼한' 세계에서 유일한 여성이라고.
그라사 마셸의 유엔인구기금 연설 - http://www.unfpa.org/public/op/edit/News/pid/2013
사모라 마셸은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의 독립운동 지도자였고, 75년 모잠비크가 독립한 뒤 초대 대통령을 지낸 건국의 아버지다. 남아프리카인들은 “마셸이 살아있었다면 만델라 같은 영웅이 됐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라사는 반포르투갈 저항조직의사였고, 독립 뒤에는 모잠비크의 초대 교육부장관을 맡았다.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장관이었다. 뒤에 그라사는 첫부인을 잃은 사모라와 결혼한다.
미국은 사회주의·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던 마셸을 미워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정권을 대리로 내세워 모잠비크를 핍박했다. 남아공 백인정권은 모잠비크 내 반 마셸 반군을 공공연히 지원했다. 마셸은 이에 저항하며 역으로 남아공 ANC를 지원했다. 마셸은 6년 잠비아 방문 뒤 귀국하다가 남아공 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당시 당시 남아공 백인정권은 "조종사 실수로 밝혀졌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남아공측이 항로를 오인하게끔 유도, 비행기가 산맥에 추락하게 만들었다는 의혹이 계속 제기돼왔다. 이 사건은 백인정권 시절 벌어진 주요 의혹사건 중 하나다.
젊은 시절의 사모라와 그라사. 우아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노년의 만델라와 그라사. 두 사람도 아름답다.
그라사는 남편이 숨진 뒤 모잠비크에서 민주화,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만델라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98년 만델라가 대통령 임기를 마친 직후, 만델라의 80세 생일에 재혼했다.
그라사는 재혼 뒤에도 남아공과 모잠비크를 오가며 만델라와 함께 에이즈·아동구호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한편으로는 남아공 정부에 마셸 추락사건 재조사를 끈질기게 요구, 2006년 기어이 진상조사 결정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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