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투탕카문, '왕의 귀환'

딸기21 2005. 6. 1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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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왕 투트(투탕카문)가 돌아왔다"

지난 1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고대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문 유물전시회가 막을 열었다. 개장 전후로 뉴욕타임스, LA타임스, 시카고트리뷴, ABC방송, CNN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모두 나서서 이 전시회를 소개하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내보냈다



애시당초 미국의 왕도 아닌데 '왕의 귀환'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것은, 투탕카문 전시회가 이미 70년대 말 미국에서 `투트 붐'을 일으킨 바 있기 때문. 1976년부터 3년간 미국에서 순회 개최된 투탕카문 전시회는 총 800만명이 몰리는 대성황을 거뒀었다. 현지언론들은 이번 전시회에는 더욱 많은 관객이 몰릴 것이라면서 "박물관도 블록버스터 시대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투탕카문과 파라오의 황금시대'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는 투탕카문 묘에서 나온 유물 130여점과 고대 이집트 18왕조(기원전 1555~1305년)의 유물들이 관객을 맞는다. 투탕카문의 황금가면과 관(棺)을 비롯, 상아조각과 장신구 등이 망라된 전시 규모를 볼때 `블록버스터'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LA카운티박물관(LACMA)과 전시기획사 AEI가 주관하는 이 전시회는 LA를 시작으로 27개월간 미국 4개 도시를 돌며 열리게 된다.



투탕카문의 무덤은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발굴했다. 이 발굴은 하인리히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 이래 세계 고고학계를 가장 들뜨게 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이 숨지면서 `파라오의 저주'라는 미스테리가 세간을 떠돌기도 했다. 카터는 무덤의 봉인을 연 17년 뒤 66세로 숨졌으며 이집트 남부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는 카터가 거주했던 집이 아직도 남아있다.

발굴 기록은 많지만 투탕카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기원전 1336년 아케나톤(아멘호테프4세) 왕과 키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고대이집트 최고 미녀로 불리는 네페르티티 왕비의 의붓아들이다. 아문 신(神)을 주신으로 하는 다신교 신앙이 지배적이던 시기 아케나톤은 특이하게도 아톤 신을 섬기는 일신교를 숭배하고 노예해방, 평등주의 정책을 펼쳐 신관-귀족층과 대립했다. 덕택에 어린 투트 왕자의 이름은 투탕카문(살아있는 아문 신의 후예)에서 투탕카톤으로, 즉위 뒤 다시 투탕카문으로 바뀌었다.

8세에 즉위해 18세에 숨진 투탕카문은 자식이 없었고 왕비 앙케세나문과 재혼한 총리대신 아이에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앙케세나문은 아이에가 투탕카문을 독살했다고 주장,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투탕카문 암살설'의 원인을 제공했다.

재임기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 투탕카문이 현대에 유명해진 것은 순전히 무덤 때문이다. 고대이집트를 최강의 제국으로 만들었던 람세스 2세의 경우 무덤이 수차례 도굴꾼에 털리면서 미이라가 이 무덤 저 무덤을 떠도는 수모를 겪었지만 투탕카문은 상대적으로 무덤이 작았던 덕에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덕택에 그의 무덤은 후대인들에게 고대 이집트를 보여주는 보물창고가 됐던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기 위해 미이라로 만들어진 소년 파라오의 시신은 후대인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3300년이 지난 뒤에 세계를 떠돌고 있다.

70년대 투탕카멘 미국 전시회는 박물관 문화를 변화시켰다. 박물관은 처음으로 특별전 추가입장료를 받았고 기념품가게가 박물관 운영의 핵심 분야로 떠올랐다. 이집트풍 키치미술이 미국을 휩쓸었으며 큐레이터들은 학문을 떠나 이벤트 기획자로 변신해야 했다.

78년 전시를 주최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단일 전시 입장객 125만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LACMA측은 이번 전시회가 당시의 열풍을 가뿐히 누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집트 정부도 막대한 돈을 챙길 것으로 예상된다. 뉴욕타임스는 이집트 최고유물위원회가 입장료 수입의 절반을 가져가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전시회가 `대박'을 노린 장사로 전락하면서 박물관의 공익적, 학문적 기능이 약화됐다는 비판도 적지않다. 언론에는 상업주의의 범람이야말로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은 LACMA가 전시회 입장료를 1인당 25~30달러로 책정키로 결정하자 "시민들을 위해서라면 1회 15달러 이상으로 올릴 수는 없다"면서 순회전시 참가를 포기했다.


'투탕카멘'인가 `투탕카문'인가. 

`투탕카문'이 맞다. 투탕카문 왕의 이름의 어원이 된 아문(Amun) 신은 과거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 `아멘'`아몬' 등으로 불렸고, 투탕카문도 `투탕카멘' 등으로 표기됐다. 그러나 이집트 최고유물위원회와 카이로국립박물관은 현지 발음대로 `투탕카문(Tutankhamun)'이라 표기하고 있으며 구미 학계에서도 70년대 이후로는 이 표기를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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