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이웃동네, 일본

일본, 무너진 신화

딸기21 2011. 3. 16.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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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 근면성, 정교함, 안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세계가 떠올리는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참화 속에서 세계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일본의 ‘경제 신화’는 1990년대 이후 거품 붕괴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면서 깨져나갔다. 2009년 일본의 자랑 도요타의 위상을 추락시킨 ‘리콜 사태’는 일본 산업계의 ‘품질 신화’를 깨뜨렸다. 그리고 2011년, 도카이 대지진으로 촉발된 원전 사고는 일본의 ‘안전 신화’까지 무너뜨리고 있다. 더 이상 일본에 대한 ‘신화는 없다.’


“시계가 필요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시간 맞춰 도착하는 열차, 1분만 연착해도 사과하는 열차 안내원. 그러나 지금의 일본은 전혀 다르다. 지진 뒤 대도시에서는 출근길 시민들이 행여 전철이 끊기거나 운행차질이 있을까 종종걸음을 친다. 가게에는 쌀이나 우유 같은 식료품이 품귀현상을 빚고, 총리가 나서서 ‘침착해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실정이다. 건물 유리창이 여진에 덜컹거리면 국민들의 신경이 곤두선다.” 

뉴욕타임스는 15일 “일본의 현대를 특징지은 ‘확실성’은 끝났다”는 기사를 실었다. 일본인의 생활리듬을 지배해온 것은 질서와 예측가능함이었는데, 지진과 쓰나미와 핵위기로 모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처참한 풍경. AFP
 
지금의 일본을 특징짓는 단어는 ‘통제불가능’이다. 신문은 “도쿄 북쪽 후쿠시마현에서는 원전 노동자들이 ‘멜트다운(원자로의 용해)’이라는 재앙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같은 시각 도쿄 시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믿어야 할지 몰라 불안해 한다”고 전했다. 포연보다 두려운 방사성 물질을 피해 시민들은 집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걸어닫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떠날 곳이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인들은 어릴 적부터 훈련받았던 가르침대로 하려고 애쓴다. 최선을 다 하라, 감정을 억누르고 집단을 위해 참아라. 하지만 마음 속엔 불신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인터넷으로 계속 뉴스를 체크해요. 하지만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늘 (정부는) 괜찮다고 하는데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니.” 요코하마에 사는 회사원 도키와 신야는 뉴욕타임스에 “도망치고 싶어도 일을 해야 하니 어디로 떠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일본은 더 이상 ‘안전과 신뢰의 상징’이 아닌 ‘불신의 대상’이다. 대지진 아픔에 아시아 각국의 시민사회가 동참하고 나섰지만 원전 문제와 관해서는 일본 정부의 미숙한 대처와 불투명한 태도가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일본이 주변국들에게 핵 공포를 퍼뜨리는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지진 뒤 13개국으로부터 긴급구조팀을 지원받았다. 자위대원 10만명이 구조와 사태 수습에 동원됐다. 2차 대전 뒤 자위대의 일본 내 최대 구호작전이다. 파괴된 원전 주변에는 ‘비행금지구역’이 선포됐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 압박수단으로 거론되던 ‘비행금지구역’이라는 용어는 며칠새 일본 원전의 위험성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한국, 중국, 싱가포르 등은 일본에서 수입되는 식품의 방사능물질 오염 여부를 검사하기로 결정했다. 

피란길의 남매. 이시노마키에 살고 있는 아베 료(10), 아베 카호(7) 남매는 집을 떠나 부모와 함께 친척집으로 가는 길. /AP
 
일본은 지진, 태풍, 산사태 등의 자연재해에 이골이 난 나라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폭탄이 떨어진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인들은 피폭을 책으로만 읽은 세대다. 가장 최근의 대참사였던 1995년 고베 대지진도 도쿄 등 수도권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지금 도쿄의 주민들에겐 이번 사태가 ‘너무나 새롭고 거대한 재앙’으로 여겨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인의 에토스(심리)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가망(참을성)’이 이런 경우 또다른 트라우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해상자위대원들의 트라우마 치료를 자문해온 임상심리학자 히라카와 스스무는 “눈앞에서 가족이 파도에 떼밀려가는 것은 인내하고 참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경험”이라고 지적했다.

확실성을 신봉해온 일본인들은 “정부나 도쿄전력이 말하는 걸 믿을 수가 없다, 올바른 정보를 주지 않고 있다”며 분노하고 있다. 일본 사회를 통칭 ‘매뉴얼 사회’라 부른다. 매뉴얼을 만들고, 지키고, 정해진 일을 확실하게 해내고, 품질·안전 신화를 만들어왔지만 매뉴얼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대처 능력을 쉽게 잃기 때문이다. 

일본 원전회사들의 ‘매뉴얼’은 쓰나미 파고가 10m에 이를 경우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최고 24m에 이르는 쓰나미 파도를 만나자 정부도, 전력회사도 어찌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은 성실히 기자회견을 하고 있지만 그가 발표하는 내용과 불확실한 정보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간 나오토 총리는 “폭발이 일어나고 1시간이 지나도록 보고조차 올라오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신화가 깨져나간 일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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