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시골마을 아과비바는 루마니아 출신 이주민들이 대거 몰려든 까닭에 루마니아어가 스페인어처럼 통용된다. 이 마을 주민의 4분의1은 루마니아인들이다. 반대로 루마니아 작은 마을 페레투의 초등학교에서는 모국어보다 스페인어를 잘 하는 아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루마니아로 돌아온 이주노동자 자녀들이다.
유럽의 서쪽과 동쪽에 위치한 두 마을의 풍경은 유럽연합 속 부국과 빈국의 문제, 서유럽과 동유럽의 격차, 도시와 농촌의 양극화, 그리고 이주를 통한 화합과 번영의 가능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BBC방송은 1일 인터넷판에 `확대된 유럽'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두 마을을 담은 르포 기사를 실었다.
`유령 마을' 살려낸 이주민들
스페인 동부 아과비바는 주변 대도시에서 100㎞ 이상 떨어진 시골 소읍이다. 이곳 식료품점에서는 루마니아 살라미햄과 치즈를 팔고, 동네 찻집은 스페인어와 루마니아어로 북적거린다. 4년 전 루마니아에서 이사해온 엘레나 헤테아는 자연스럽게 이 곳을 `고향'이라 부르며 "부모님이 같이 오셨더라면 정말 완벽한 고향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엘레나는 카페에서 일하고, 남편은 건설노동을 하면서 8살 아들을 키우고 있다.
아과비바가 위치한 테루엘주(州)는 유럽에서도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다. 스페인에서는 지역 농촌공동체 수천개가 붕괴 위기를 맞고 있다. 아과비바도 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가 유령마을처럼 변한 곳 중 하나였다. 2000년 루이스 브리시오 시장은 중대 결심을 내렸다. 마을을 살리기 위해 이주민들을 적극 불러들이기로 한 것. 의사 출신인 그는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려면 어떤 방법이든 써봐야 한다"며 마을사람들을 설득한 뒤 아르헨티나와 루마니아를 찾아가 이주설명회를 열었다. 그는 싼 값에 집을 공급하고 구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 외국인들을 불러모았다. 현재 인구 700여명 중 150명 이상이 루마니아인 등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이다.
이주자들이 오면서 죽어가던 마을은 활기를 되찾았다. 땅값은 10배로 오르고, 일자리 100개가 새로 생겼다. 경제규모가 2배로 커진 것으로 추산된다. 원주민들은 "좀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났을 뿐 우리와 똑같이 여기서 일하고 집을 얻어 살아가는 똑같은 이웃들"이라며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때 스페인으로 쏟아져들어온 남미 출신 이민자들에 비해 동유럽이민자들은 `부지런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고, 오히려 토착민들과 관계도 좋다. 전통을 고수해온 스페인 농촌사회에서 이런 변화는 이제 거부하기 힘든 일이 됐다. 아과비바 모델을 좇아 이주민 정착 지원프로그램을 도입한 마을이 60여곳에 이른다.
`기러기 부모'를 둔 루마니아 어린이들
루마니아 남쪽 불가리아 국경에 가까운 페레투는 흙길에 우마차와 당나귀 수레가 다니는 전근대적인 소도시다. 이 곳 초등학교 학생 700여명 중 4분의1은 부모 대신 조부모나 친척들과 함께 살고 있다. 어릴적 부모를 따라 스페인으로 갔거나 스페인에서 태어난 뒤 고향에 돌아와 교육을 받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이다. 부모는 스페인에서 건설노동자, 청소부 등으로 일하고 있고 아이들만 고향에 되돌려보내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돌아온 아이들 상당수는 모국어가 힘들어 스페인어를 쓰고 있고, 양쪽의 사회적 차이에 적응 못하는 경우도 많다. 스페인에 간 식구로부터 돈을 송금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경제격차는 루마니아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페레투 사람들은 스페인에서 오는 돈으로 사는 사람들이나 스페인말을 쓰는 노동자 자녀들을 `스페인인들'이라 부른다.
Romanian youth celebrate shortly after midnight as another holds EU and Romanian flags at a New Year celebration party in Bucharest. / AFP
페레투의 이오넬 올테아누 시장은 "스페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끔 세금내러 고향에 와서는 스페인과 이곳의 일처리를 비교하며 유럽식 기준을 요구하곤 한다"며 "하지만 우리가 유럽처럼 변화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어려움을 털어놨다. 하지만 아과비바 시장이 이주민을 받아 마을을 살린 것처럼, 페레투에서도 이주민들이 보내오는 돈은 경제를 살리는 큰 힘이 되고 있다.
EU 가입, `불확실한 희망'
루마니아는 이웃한 불가리아와 함께 1일부터 유럽연합(EU) 회원국이 됐다. 현지 언론들은 희망 속 새해를 맞아 축제분위기에 들뜬 두 나라 풍경을 전했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선 밤새 폭죽이 터졌으며 루마니아돥헝가리 국경에선 EU와 비(非) EU를 갈랐던 국경선을 넘는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특히 동유럽에서도 빈국에 속하는 루마니아는 EU 가입을 계기로 개발과 성장이 궤도에 오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루마니아에서는 EU 가입을 계기로 더 많은 이들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독일 등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특히 스페인 같은 나라들은 같은 라틴 계열이어서 언어를 배우기 유리하다는 점도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독일, 영국 등은 루마니아계 이주민 대규모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을 강화하고 있으나 아과비바처럼 윈-윈을 노리는 지역들도 있다.
이미 루마니아 인구의 10%에 가까운 200만명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나와 살고 있다. 이들이 루마니아로 송금하는 돈은 연간 약 30억 유로(약3조6000억원). 미국에서 오는 돈으로 먹고사는 중남미 몇몇 나라들처럼, 루마니아에도 `송금 경제'가 만들어져 사회를 바꾸고 있다. 노동자들의 이주는 이미 그들이 떠나온 마을과 새로운 터전 모두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고 BBC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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