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상] 내가 못 배운 페미니즘  

딸기21 2018. 2. 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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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내 성폭력을 고발한 서지현 검사가 소설처럼 쓴 글을 보면서 가슴에 와 박혔던 구절은 ‘아버지가 나빴다’ ‘어머니가 나빴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검찰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모든 게 아빠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여자를 착하고 예쁜 딸로 키워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어떠한 불의도 참아내지 말라고, 그 어떠한 부당함에도 입 다물지 말라고, 욕설을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네 멋대로 살아가라고 가르쳐줬어야 했다. 이 모든 게 엄마 때문이다. 이 땅에서 여자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어떤 불합리도 참아내지 말라고, 여성이라고 무시하거나 업수이 여기는 것은 더더욱 참아내서는 안된다고, 멱살을 휘어잡고 주먹을 휘둘러줘야 한다고 가르쳐줬어야 했다”고 썼다.


 

그의 글을 읽고 비슷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내가 그동안 살면서 가족과 윗 세대와 학교에서 듣고 배운 것들과 못 배운 것들을 되짚는다. 누구든 다 비슷했겠지만 차별은 늘 있었고, 노골적인 무시와 구조적인 억압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여자애가 고기를 잘 먹는다”고 타박하던 외할머니, 초등학교 5학년 성교육 시간에 “여자들은 통닭과 같다. 누가 먹고 싶어 먹었다면 그 사람을 욕할 수는 없다”던 선생님. 최근 ‘황태자’가 풀려난 대기업의 ‘여비서’ 공개채용 시험을 본 기억도 떠올렸다. 토론 면접에서 나름 선방했다며 안심하고 있던 내게 “말은 조리있게 하는데, 어디 회사 오래 다니겠느냐”고 한 사장님. 어쨌든 시험에 붙었고, 3박4일 직원 연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연수 프로그램이 ‘녹차 끓여내는 법’이라는 걸 보고 어쩐지 허망해졌다. 

 

결국 그 회사에 가지 않았고 기자가 됐다. 업종이 다르고 회사가 달라도 차별은 늘 있었다. 그럭저럭 대응하며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잘 살았을까? 때로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마이너리티임을 자각했고, 때로는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그냥 넘어갔다. “블루스 추자”는 취재원들, ‘이쁜 여자’ 타령하는 남자에게 똑같이 성차별적인 언사를 섞어 능글맞게 대처했던 것은 고육책이었을 뿐이다. 싫어요! 미쳤어요? 왜 성희롱이야! 하면서 맞서지 못한 나같은 이들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성적 괴롭힘의 바탕이 됐다는 죄책감이 크다.

 

서 검사의 글을 보면서 눈물이 났던 것은 성적 괴롭힘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와중에 아이를 키워야 하고, 무신경한 남편의 대꾸에 혼자 실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부여잡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자괴감을 느끼는 그 모든 과정은 여성들에겐 너무나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학교에선 가르쳐주지 않았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은밀하게 때론 노골적으로 닥쳐오는 공격을 어떻게 맞받아쳐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양성도, 기후변화도, 인권도, 노동자의 권리도, 모두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 시절엔 그런 화두가 없었다는 이유를 붙이자니 좀 우습다. 성차별도, 인권 침해도, 노동자 착취와 탄압도, 환경 파괴도, 모두 그 시절에 더 심했으면 심했지 지금보다 나았을 리 없으니까. 이제라도 사회 전체가 이런 고민에 맞부딪쳤다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좀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일까. 5일자와 6일자 신문에 노동 문제를 가르치지 않는 교육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여전히 우리가 배우는 것들엔 살면서 꼭 필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다. 평등과 정의가 비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배우지 못했던 것은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 말하는 용기,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말하는 자신감이었다. 이제라도 서 검사와 용기 있는 이들을 보며 배운다.

 

초·중·고교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하자는 청와대 청원에 20만명 넘는 이들이 서명을 했다. 이 소식을 전한 포털 기사에는 이례적으로 여성들이 댓글을 많이 달았다. 온라인 전체가 ‘남초’이다시피 한 상황에서 응원글이 많이 보이니 반갑다. 그런데도 답답한 마음이 든다. 학교야말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대다수 여성들이 성차별과 성희롱을 경험하는 ‘첫번째 사회’가 아니던가. 그러나 배우는 사람뿐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도 함께 바뀌고 커 나가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좀 더 근본적인 의문도 있다. 학교에서의 제도교육을 통해 개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한참 앞서 나갔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저성장과 취업난 속에 인권과 평등과 평화와 환경과 다양성의 가치에 반하는 일들이 고개를 드는 시대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최소한 몇 명이라도 옳게 말하고 용기있게 행동할 수 있게 되면 세상이 바뀐다. ‘몇 명’의 목소리가 역사를 바꾼 사례는 얼마나 많았던가. 성평등,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 인간에 대한 예의, 범죄와 폭력에 맞선 저항,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열린 자세 모두 배워야 한다. 페미니즘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모든 정책에 ‘젠더 평등 의식’이 녹아들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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