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착취자의 나라
이한. 미지북스
비정규직 문제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다. 아니, 따지고 들면 전 세계의 모든 문제는 이리로 귀결된다 해도 될 것 같다. 노동력이 값싼 물건이 되고, 더불어 일을 하는 사람도 값싼 상품이 돼버린.
이 책의 저자는 변호사다. 책은 비정규직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부정적 효과,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한다. 사례집이나 현장과 밀착된 연구서라기보다는, 뭐랄까, 비정규직 개념과 정의를 중심으로 원리원칙을 다지고 드는 학술서같은 느낌.
프롤로그는 인력관리 아웃소싱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의 인터뷰다.
도급계약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도급 금액, 기간, 인원, 결원율 한계죠. 이를테면 몇 억으로 도급 금액을 줄 테니 이 사업장에 1년 동안 100명 공급해달라. 그리고 결원율은 5퍼센트 미만으로 발생하게 해달라, 그러는거죠.
어떤 회사에 100명을 공급하는 도급계약을 맺었다고 해봐요. 결원 인원이 4명까지는 도급금에 영향을 안 미쳐요. 그런데 5명 이상이면 계약금액을 삭감하는 등의 조항이 들어가요. 그러니까 결원율을 적당히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 되죠. 2~3명 정도로만 적당히 유지하면 그만큼 이웃소싱업체의 수익이 되니까요. (13쪽)
저자는 무조건 비정규직을 없애자고 하지는 않는다. 노동 유연성이 필요한 국면이 있고, 긍정적인 효과가 분명히 있다고 본다. 산업구조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고, 노동력이라는 자원의 배분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고, 자본이 노동을 적극적으로 고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상품 수요가 쉽게 변하는 부문에서 산업활동이 늘어나게 할 수 있고, 실업에서 탈출해 정규 일자리로 가는 다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경기 불황 국면에, 즉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기업들이 고용을 불안하게 만들어 쥐어 짜내는 수단으로 비정규직을 활용한다면 저런 긍정적인 효과는 없이 오로지 착취만 하는 것이 될 뿐이며 ... 등등.
이어지는 논지는,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존재는 정규직으로 가는 징검다리이기는커녕 일할 능력을 키울 기회도 갖지 못할뿐 아니라 몹시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착취당하고, 잘렸다가 다시 착취당하기를 반복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정책 모의실험을 분석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매년 비정규직 비율을 실제보다 10퍼센트 낮추는 효과를 낳는 정책을 폈더라면 GDP가 연평균 3.17퍼센트 더 높았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인용한다. 한국에서 비정규직은 영원히 비정규직일 가능성이 높으니, 이건 더 나은 일자리로 가는 다리가 아니라 함정일 뿐이라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이동할 확률보다 실업과 미취업 상태로 이동할 획률이 높다. 비정규직으로 5년 일한 사람이 정규직으로 일하게 될 확률은 5.45퍼센트로 극히 낮은 반면 실업에 빠질 획률은 12.73퍼센트로 높아진다.
직전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다 실직한 근로자는 직전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취업했던 근로자에 비해 정규직으로 재취업할 기능성은 크게 낯은 반면, 또다시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할 가능성은 크게 높다.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으로 4년 일해도 정규직으로 옮길 가능성은 약 9퍼센트 미만이다. 이 정도면 함정도 그냥 함정이 아닌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매우 강력한 함정이다.
(중략) 한 직장에서 계속 오래 일한 비정규직 노동자일수록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 기업에 특유한 숙련 과정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는 비정규직의 숙련 형성을 지원하는 공적 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그 사업장에 정규직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규직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차별에 일조하는 존재로 언론에서 난타를 딩하지만 실상 그 통념은 틀린 것이다. (57쪽)
모든 일자리를 비정규직화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해고가 자유로운 경우 장기 실업 기간이 짧아진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경제적 고통의 집중은 장기 실업뿐 아니라 반복 실업의 형태로도 가해지며, 오히려 후자가 우리 사회의 심각하고 광범위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이후 경기회복 과정에서도 장기 실업 지표는 개선되었다. 그러나 반복 실업 지표들은 경제 위기 이전에 비해 여전히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반복 실업에 빠지는 사람들이 같은 사람들로 집중되어 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즉 반복 실업의 고통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53쪽)
단순하게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빈곤의 공포에 시달려야 생산에 더 많은 기여를 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판타지는 기술과 지식의 발전이 없고 변화가 없는, 단순 노동만이 존재하는 가상의 사회에서만 성립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궁핍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여러 창의적인 생각도 할 수 있고, 새로운 시도들도 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애착을 갖는다. 그리고 일단 무언가 정말로 생산하는 일을 하려면 그에 소요되는 기간이나 비용이 길고 커서는 안 된다. (60쪽)
비정규직은 그 자체로 여러 사회적 충격을 일으키는 문제이기 때문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로 틀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동일 노동에 대한 임금 차별은 지금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임금 차별이 핵심적인 문제이자 다른 문제의 원인이라면 제도적 문제는 이미 상당 부분 해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법을 제대로 집행하는 일밖에 없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개념에는 임금의 절대적 수준이 결부되어 있지않다. 상대적 격차 문제로 핵심 문제를 잘못 인식하면, 결국 잘못된 해법으로 빠지게 된다.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에 대한 정의와 연결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비정규직의 부정적인 충격과 영향에 관한 진단은 그 자체의 고유한 문제다. '비정규직-정규직'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인 것이다. (66쪽)
이어지는 부분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비정규직 문제. 그리고 롤즈.
롤즈... 또 롤즈...
<정의론>을 몇 달 째 붙들고 읽었다가 다시 읽다가 하고 있는데. 흑흑.
공화국의 시민은 부분적 노예제가 확대되는 것올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불이익을 입을 두려움 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보상을 받고, 재발을 방지하는 방비책을 마련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가져야 한다.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거나 충분한 제재를 받지 않는모든 제도적 지배 권력은 사라져야 한다. 이러한 고찰은 우리에게 비정규직 문제를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 사이의 관계 형성 문제로 마라볼 수 있게 해준다. (77쪽)
비정규직 제도는 '기본 구조'에 관한 문제다. 계급 불평등은 교육 불평등을 낳는다. 교육 불평등은 취업 불평등을 낳는다. 취업 불평등은 어떤 사람은 전문적인 기술을 발휘히는 정규직으로 취업하고, 어떤 사람은 미숙련 상태로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규직 제도가 정의로운 제도가 되려면 비정규직에게 부과하는 특별한 부담이 비정규직을 포함한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정당화'라는 것은 심리적인 조작에 의해 받아들이게 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 제도의 기초가 되는 원리가 평화롭고 공정하게 협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울해 하지 않으려면 모든 제도는 호혜성reciprocity을 가져야 한다. 호혜성이란, 규범이 그 규범 준수자들에게 서로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호혜성을 논증하려면, 그 논증의 시작부터 끝까지 논증을 납득할 상대방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엄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요청을 만족시키는 것이 바로 롤즈의 정의의 원칙이다. 제1원칙은 평등하고 양립 가능한 가장 광범위한 자유의 원칙이다. "각자는 모든 사람의 유사한 자유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전체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제2원칙은 차등의 원칙과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을 규정한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모든 사람들의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 합당하게 기대되고(차등의 원칙),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
현재의 비정규직 제도는 정의의 제 1원칙에 어긋난다. 그것은 근거 없이 덜 광범위하고 불평등한 법적 자유를 부여한다. 제2원칙 중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관련해서 살펴보자. 한국 사회에서는 비정규직이 가교가 아니라 함정이다. 계급 불평등은 교육 불평등으로, 교육 불평등은 취업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정 시점에 분류한 것으로 그 후의 차별을 모두 정당화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다. (95쪽)
이 시점에서, 논의는 '시험 한 방에 인생이 결정되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으로 넘어간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기간제 교사 논란같은 것과 직결되는 문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달리 대우하는 사회에서 취업 선발 과정을 통해 상위에 든 사람이 정규직이 되고, 또한 그 점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 제도에 대한 정당화가 되지 못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의 비율은 점차 줄어왔다. ‘정규직이 되는 본질적인 응분’ 같은 것이 있다면 이런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사용자들의 생각의 변화에 따라 그 응분이 너무나 쉽게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99쪽)
분배와 관계되는 제도 자체의 정당성 문제는 정의의 원칙에 비추어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이미 실행되고 있는 제도를 전제로 한 기대치를 근거로 끌어들이면,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정규직은 시험 쳐서 들어오고 비정규직은 시험을 치지 않고 들어왔는데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같은 대우를 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시험 성적이 업무 자체에 별다른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 별개의 시험을 잘 쳤다는 것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어떤 선발 과정에서 통과했다는 자격은 그것이 실제 업무에서 추가적으로 기여하여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결과를 낳을 때만 더 나은 기대치와 연결되는 것이 정당하다. (101쪽)
논지만 롤즈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고 문장도 롤즈 번역해놓은 것같이 써놔서 모래알 씹는 것 같은...
조직적 동형화, 즉 '간단한 몇 가지 이유에서 그럴듯하고, 남들도 하니 다 같이 따라 하기'가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국민경제 차원에서뿐 아니라 개별 기업 차원에서도 간접 고용 활용은 장기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디마지오와 포웰에 따르면, 동질성의 압력들에 의해 조직들의 구조와 관행이 서로 동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며, 혁신의 수용과 확산은 기술적인 합리성의 요구들에 기인한다기보다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의례화된 규범에 따른 정당성의 획득과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조직을 변화시키고 제도화하는 것은 계산이 아니라 오히려 모방 과정을 통해 발생할 수 있다. 한국 기업에서 나타난 비정규직 고용의 확산도 이러한 동형화의 과정이라면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광범위하게 채택하고 있는 것이, 곧바로 기업의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없다.
특히 경쟁이나 효율성 압박보다는 정부의 중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직접 고용과 간접 고용의 동시 활용"이 한국형 표준 모델로 정착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즉 1960-1970년대 정부의 산업 정책이 사내 하도급 활용을 촉진하여 기본 모델로 정착시켰고, 이 모델이 1990년대 후반 따라 하기를 통해 더욱 광범위하게 퍼져간 표준 모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49쪽)
위에 인용한 부분은 그럴싸하지만 좀 게으른 분석이 아닌가 싶다. 전 세계에서 1980년대 이후 비정규직이 늘어났는데 한국만 들여다보면서 비정규직이 늘어나 것을 1960-70년대 산업 정책 탓으로 돌릴 수 있나?
비정규직이 어느 정도 필요하며 긍정적인 기능이 있다는 전제 아래, 저자는 위험부담에 따른 보상을 해주는 것이 정의의 원칙에도 맞고 고용주들의 횡포도 막을 것이라는 제안을 한다. 비정규직은 고용불안이라는 짐을 유독 많이 떠안는 사람들이니, 예를 들면 임금을 정규직의 1.3배를 주는 식으로 그만큼의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 오옷!
기간제 비정규직은 수량적 유연성과 노동 유연성을 통해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부담을 가장 크게 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부담을 가장 크게 지는 사람들이 가장 큰 보상을 받아야 한다. 적어도 부담을 덜 지는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 부담을 더 진다는 이유로 삶의 기회가 축소되거나 굴곡되지 않는 것에 더하여,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기간제 교사가 없다면 정규 교사들은 휴직도 할 수 없고, 학교는 학생 수 변동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기간제 교사가 정규 교사보다 많은 부담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간제 교시들에게도 연수와 훈련, 승진 그리고 경력 인정의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시간의 노동에 대해 더 많은 대가를 주어야 한다. 즉 본래 쾌적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보다 상대적으로 덜 유쾌하고 불안정한 일자리의 임금이 더 높은 것이 옳은 이치인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부담을 더 지는 사랍이 다른 부담도 한꺼번에 더 지도록 되어 있다. 동등한 참여자는 하나의 조건에서 부담을 더 지면 다른 조건에서는 이득을 더 봐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동등한 협동의 참여자로 제대로 대우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 단지 취약점을 집중 공략당하는 수단으로 대우받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166쪽)
실업 때문에 생기는 사회적 비용은 직접적으로는 국가의 재정 지출을 유발하고, 가족이나 지역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전가된다. 그런데 두 기업이 낸 세금은 똑같다. 거기다 A기업이 비용을 그만큼 절감해 상품 시장에서 더 우위에 선다고 해보자. 이것은 불공정하다. 비정규직 사용 기업인 A기업이 정규직 사용 기업인 B기업에 비해 더 많이 전가하고 있는 사회적 비용을 내부화함으로써 불공정한 비용의 배분도 교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용을 내부화하는 최선의 조치는, 바로 그 비용을 집중적으로 부담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그에 상응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고용 형태에서 부담을 더 지면 다른 근로조건에서 보상을 더 받도록 하는 것이다. (167쪽)
맨 뒷부분은 인턴, 특수고용 등의 문제.
근로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협소하게 '전통적으로 근로자라고 인정된 경우와 충분한 정도로 닮았는가'만 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체적인 노동의 제공이 종속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느냐 자율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느냐를 주된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자율적으로 제공하는지, 종속적으로 제공하는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쉽게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
이렇게 표피적인 '닮은 꼴'을 찾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비껴나가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공정한 협동의 조건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다. 고용 관계를 인정할 때 주어지는 보호가 특수고용직으로 불리는 노동자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이 공정한가, 아니면 그들은 보호하지 않는 것이 공정한가.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생활하는 사람을 근로자로 보호하지 않으면 삶이 굴종되거나 위험에 빠지거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게 되는지를 봐야 한다. '컨베이어벨트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충분히 닮았느냐' 하는 기준은 이제 버려야 한다. '독자적인 이윤 창출 능력 없이 다른 사업주의 사업 운영을 위해 의존적으로 결합되는 노동을 제공하면서 그 대가로 생활하는가'를 기준으로 보고, 이 기준을 충족시키는 경우에는 근로자로 보호해줘야 하는 것이다. (186쪽)
결론. 모두 사람의 문제다. 삶의 문제다!
비정규직 문제로 사람들은 실제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도 그 고통들을 살펴보고 경감하고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전체 고통을 늘리는 방향으로 문제를 설정한다. 비정규직에 특유한 고용 불안 정서, 경력 단절, 잦은 실업, 승진이 전제된 내부 노동시장 참여 기회의 박탈, 산재 위험의 광범위한 노출은 경제성장에 꼭 필요한 인적 자본의 축적을 크게 저해하고, 광범위한 사회 복지 비용을 발생시킨다. 이 '비용'은 회계적 비용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들이 겪는 구체적인 고통이다. 이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 바로 국가의 운영 목적이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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