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은 오랫동안 동방을 통치했소."
이런 말로 시작되는 책. 소설을 읽는 것이 오랜만이고, 이렇게 매혹적인 소설을 만난 것도 오랜만이다. 저 구절을 읽는 순간 그대로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아민 말루프의 책은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통해 한 번 접한 적 있지만 어떤 작가인지는 잘 몰랐다. 이 책, <동방의 항구들>은 처량하고 흥미롭다. 저항과 굴종과 열정과 사랑과 이별과 분열과 겸양과 위선과 회한. 책은 그저 한 노인의 회고담이자 인생과 사랑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것은 쇠락한 제국의 뒷이야기이자 '중동 그 자체'의 이야기다. 병적이고 암울한, 그러나 매혹적인.
"돌연 그녀가 다른 이야기를, 다른 장소들을 말하기 시작했소. 거주지나 이주지가 아닌 암흑의 장소였소. 우리의 여행은 끝이 났소. 이제 길은 도시들을 연결하지 않았고, 기차는 역 사이를 운행하지 않았소. 지도는 뿌예졌고, 이제 더는 어디가 어딘지를,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소. 단지 함석과 가시철조망이 있는 풍경 속에서 제복을 입거나 죄수복을 입을 사람들만 머릿속에 떠오를 뿐이었소."(110쪽)
파리의 어딘가에서 '교과서 속 사진에 나온' 어느 노인을 만난 '나'는 그에게서 지나온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레지스탕스를,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던 이의 영웅담을, 그가 한때 떠나왔던 늙고 쇠락한 황실의 비극을. 인생의 무대는 터키와 파리와 베이루트와 하이파 그리고 다시 파리를 오간다. 제국의 몰락과 2차 대전, 중동 전쟁과 68혁명으로까지 이어지는 시대의 흐름은 수줍음 많은 노인의 고백 속에 녹아 있다. 은밀하고, 음침하게.
"내 손목시계가 정오를 가리키자 나는 불안해졌다. 그녀가 온다면 다시 삶이 시작될 것이다. 기나긴 세월이 흘렀으나 시간은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 과거, 매시간과 날, 주, 십 년은 쌓인 재와 같다. 앞으로 올 시간이 영원까지 이어지겠지만 우리는 매 순간을 사는 것이다. 클라라가 오면 멈췄던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책의 줄거리를 적는 것은 무의미하다. 산산조각난 인생, 마비된 문명. 기다림은 길지만 절망과 불안은 그의 발목을 잡지 못한다. 언젠가 '사랑'이 그를 구원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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