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구정은의 세계]샌더스, 코빈, 시리자, 포데모스... '좌파 바람' 의미와 한계는

딸기21 2015. 9. 15. 09:50
728x90

그리스에서 급진좌파 연합정당 시리자가 지난 1월 집권당이 됐을 때만 해도,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경제규모도 작고 재정난이 계속돼온 그리스의 특수한 사정 탓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몇달 뒤인 5월 스페인 지방선거에서도 좌파 정당연합 포데모스 후보들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시장 자리를 꿰찼다. 영국 노동당에서 만년 비주류였던 제러미 코빈이 당권을 거머쥐었다. 미국에서는 좌파정치인 버니 샌더스가 내년 대선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빈부격차와 분배의 불공정성에 맞선 ‘99%’의 반란, 허울뿐인 진보에 대한 반란이 좌파 바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샌더스의 돌풍은 무섭다. CBS방송과 유거브가 13일 발표한 아이오와주 여론조사에서 샌더스는 지지율 43%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33%)을 눌렀다. 뉴햄프셔주에서는 샌더스 52% 대 클린턴 30%로 샌더스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두 주는 양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맨 먼저 치러지는 곳들이어서 대선 풍향계로 불리는데, 두 곳 모두에서 샌더스가 힐러리를 두자릿수 %포인트 차이로 누른 것이다. 캘리포니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유권자가 더 많은 주에서 여전히 힐러리가 앞서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힐러리로 경선 결과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1962년의 버니 샌더스. As a Congress of Racial Equality (CORE) officer, a 20-year-old Sanders leads students in a multi-week sit-in to oppose segregation in off-campus housing owned by the University of Chicago. /버니샌더스닷컴

같은 날 영국 노동당의 코빈 신임 대표는 섀도 캐비닛 명단을 발표했다. 집권을 가정해 미리 발표하는 일종의 ‘예비 내각’이다. 앞서 12일 당 대표에 선출된 코빈은 자신을 지지해준 좌파 정치인들 중에서 각료 후보들을 뽑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섀도 챈슬러’ 즉 재무장관 후보는 존 맥도넬로, 가디언 표현을 빌면 “주요 기업들의 재국유화와 60% 증세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코빈 자신도 철도·에너지 등 기간산업 민영화에 반대하고 사회정의와 복지 확대를 주장해온 인물이다. 


유럽의 좌파들은 코빈 선출을 시대 변화의 징표로 받아들이고 있다. 스페인 포데모스는 그리스 시리자와 밀착돼 있을뿐 아니라 영국 노동당 대표선거에서도 코빈 지지를 표하며 연대 움직임을 보였다. 오는 20일 조기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리자는 영국 노동당 대표 선거가 “유럽 민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라는 환영 성명을 냈다.

 

여러 나라에서 불어닥친 좌파 바람의 공통점은 ‘우경화된 진보’에 대한 반란이라는 것이다. 샌더스 지지자들이 늘고 있는 반면 ‘미국판 일베’에 가까운 도널드 트럼프가 인기를 끌고 있는 데에서 보이듯, 좌파 정치인들은 기존 보수파 지지층보다는 중도·좌파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좌우가 중간에서 수렴되는 게 아니라 중도에서부터 왼쪽으로 향하는 스펙트럼 상에 있는 유권자들이 급진좌파의 슬로건에 끌려가고, 반대로 오른편에 있던 사람들은 극우파로 끌려가는 양상이다. 샌더스 지지층이 보여주는 것은 그동안 줄곧 중도를 지향하며 월가와 실리콘밸리의 신진자본과 결탁해온 민주당의 우편향에 대한 반발이다. 힐러리와 그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친자본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코빈 역시 1990년대 중·후반부터 계속돼온 노동당의 ‘신좌파’ 노선에 정면으로 반기를 내걸었다. 코빈이 노동당 대표가 되자 파이낸셜타임스 등은 “재앙에 가까운 선택”이라고 썼다. 보수 언론들의 비판은 충분히 예측가능하지만, 선거전 내내 코빈을 앞장서서 비난해온 건 신좌파와 ‘제3의 길’을 주창했던 노동당 소속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였다. 스페인 포데모스의 약진 역시 부패한 사회당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세계를 휩쓴 월가 점령과 ‘분노하라 운동’ 같은 대중시위가 기성 정치권의 변화로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Jeremy Corbyn being taken away by police after demonstrating outside South Africa House in Trafalgar Square /Mirror


하지만 지금의 좌파 바람이 얼마나 더 확산될 것이고 실제로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구제금융 협상에서 결국 유럽 채권단에 백기를 든 치프라스처럼, 물리적 조건을 극복하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권을 왼쪽으로 끌어당기는 효과는 크지만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불러일으켰다기보다는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반발의 산물인 측면이 크다. 과연 이들이 실제로 선거제도 안에서 승리를 거둬 집권할 수 있느냐 하는 지적도 나온다. 샌더스와 코빈의 반란은 두 독특한 개인의 인기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노동당이 예상 밖의 흐름을 보여주긴 했으나 유럽 좌파들은 여전히 찬물에서 헤엄치는 중”이라며 북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쇠락을 거론했고, 가디언은 “반긴축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시리자·포데모스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윤태 교수는 “새로운 좌파 지지층은 제조업 노동자들 같은 1960~70년대의 전통적인 좌파 지지층과는 다르다”며 “경제위기의 책임이 있는 기성정치권에 대한 반발이 신생정당이나 비주류 정치인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민영화 반대, 교육·의료 복지 확대, 부자 증세 같은 정책과 공약만 놓고 보면 코빈과 샌더스를 지지하는 이들은 극좌파나 급진좌파로 보기는 힘들다면서 “힐러리 같은 중도세력이 진보파의 목소리를 흡수할 경우에는 바람이 사그라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