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정복과 착취, 경외와 공존의 5백 년
존 헤밍 지음. 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영어 제목이 TREE OF RIVERS다. 책은 ‘나무의 강’인 아마존의 역사를 강물이 흐르듯 굽이굽이 따라가면서 숲과 습지와 역사를 아우르며 펼쳐 보인다.
대작이다. 책이 두껍기도 하지만, 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무게와 깊이가 워낙 크다. 저자는 캐나다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탐험가라고 한다. 아마존의 역사는 물론이고 생태와 지리와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망라했는데, 정말 재미지다.
서양인들이 그 땅에 들어가 기웃거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을 죽여 없애는 시기의 역사는 참혹하다. 탐험하고, 죽이고, 잡아서 부리고, 고문하고, 죽이고, 또 탐험하고, 잡아들이고, 죽이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정도의 묘사는 예사이고,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들어 알고 있는 ‘원주민 잔혹사’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마존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거기 들어간 ‘서양인들’, 그들의 역사 또한 잔혹하고 끔찍하다. 가해자이기도 하고 때론 자기들끼리 벌인 싸움과 경쟁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사람들. 그러면서 적응하고, 섞여 들어가면서 ‘아마존 사람들’이 된 존재들. 그러니 이것은 원주민 잔혹사를 넘어선 총체적인 ‘아마존 잔혹사’다.
하지만 지구상 가장 길고 넓은 강, 가장 크고 깊고 넓은 숲의 역사가 어떻게 잔혹하기만 할까. 탐험가와 선교사들과 반란자들과 희생자들의 이야기 다음에는 자연학자들이 지켜본 생태와 사업가들의 착취와 비즈니스와 마추픽추와 고고학자들의 연구, 아마존을 지키려 애썼던 '외지인'들과 마침내 스스로 정치투쟁에 나선 인디오 웅변가들이 등장한다.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아마존의 오늘’은 씁쓸하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인들이 와서 남긴 흔적은 거대한 이 거대한 숲에 생채기를 냈을 뿐이었다. 책에 인용된 표현을 빌면 “4백 년간 포르투갈인과 브라질인들이 야금야금 베어 먹은 양으로는 이 매머드 같은 녹색 치즈의 표면에 구멍 하나 만들지 못했다. 아마존 강을 열심히 왕래한 지난 세기들은 ‘원주민 인구 대다수의 파괴와 몇몇 고무나무의 훼손’만 초래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항공로와 전기톱과 도로’는 수백 년 동안 아마존이 다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상처를 이 숲에 입히고 있다.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보호구역이 만들어졌고, 비록 과거의 손실을 모두 보상받지는 못했을지언정 아마존의 주인들로 인정받으며 인구도 늘었지만 오히려 숲은 지금 더 많이 사라지고 있다니. 벌목꾼과 방목장과 콩 농장들과 카길 같은 다국적 농업기업과 댐 건설. ‘아마존 잔혹사’는 오히려 지금, 가장 광범위하고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과 숲에 일생을 바친 탐험가가 전해주는 아마존의 모습은 다채롭고 아름답다.
“아마존을 찾는 방문객을 압도하는 인상은 그곳의 아름다움이다. 나는 키가 크고 인간이 건드리지 않은 숲속의 그 성당 같은 어두움 속에서 편안하고 보호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복잡하게 뒤엉킨 덩굴식물과 강력한 판근, 석관처럼 쓰러진 나무들, 우뚝 솟은 야자나무, 무성한 관목 덤불, 신비롭고 조용한 시냇물에는 언제나 놀라움이 존재한다. 커다란 나무 몸통을 올려다보면 숲 천장의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과 거대한 가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강에는 시시각각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동틀녘과 해질녘에는 잠깐 동안 금색과 진홍색, 은색의 불빛이 찬란하게 펼쳐진다. 이른 아침에는 아름다운 물안개가 강에서 피어오른다. 그리고 강물에 반사되는 수목과 구름은 언제나 아름답기 그지없다.”(665쪽)
[스크랩]
굶어 죽어가던 피사로의 부하들이 인디오들한테 그토록 필사적으로 빼앗아가고 오레야나 일행의 배를 강으로 계속 유혹한 마니오크는 대체 무엇일까? 마니오크는 예나 지금이나 아마존 농업의 주식이다. 에스파냐어로는 유카yuca, 카리브 지역에서는 카사바cassava (가열하면 타피오카)로 통한다. 마니오크는 초기 인류가 채집 생활에서 농경 생활로 진화하는 것을 가능케 한 슈퍼 작물이다. 인간의 육종을 통해 진화한 재배종일 것이다. 이 굉장히 훌륭한 식물의 덩이줄기는 단백질은 부족하나 탄수화물과 열량이 풍부하다.
마니오크는 재배가 쉽다. 대를 잘라서 땅에 다시 심기만 하면 된다. 어느 때고 심을 수 있고 수확을 한 후 몇 달씩 땅속(혹은 물속)에 저장할 수도 있다. 마니오크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쓴맛형’은 시안화물 즉 청산가리가 많고 ‘단맛형(투피어로는 아이피aypi)’은 독성이 덜한 대신 더 허약하고 영양이 덜하다. 두 가지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류학자 베티 메거스는 이렇게 썼다. ‘미묘한 형태상의 차이가 치명적인 쓴맛형과 무해한 단맛형을 식별하는 일은 문자 그대로 생사가 달린 일이다.’ 마니오크는 먹기 전에 치명적 독성을 추출해야 하는 유일한 주요 식량작물이다. (56쪽)
1572년 끔찍한 우르수아-아기레의 모험으로부터 10년 후, 잉카제국 최후의 잔존 세력을 상부 아마존에서 소멸했다. 페루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1534년 망코라는 왕자를 잉카 제국의 꼭두각시 황제로 세우려고 했다. 몇 달이 지난 후 망코는 에스파냐 정복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 흉악한 침입자들에 맞서 대규모 저항 운동을 조직했다. 망코는 안데스 산맥 기숨에 숲이 무성한 아마존 유역 저지로 이어지는 곳을 따라 역시 빌카밤바라고 하는 작은 수도를 건설했다. 1545년 망코는 자신이 피난처를 제공한 에스파냐 도망자들의 손에 끝내 살해되었다. 그의 세 아들은 한때 막강했던 잉카 제국의 이 자그마한 자투리땅의 통치자로서 그의 제위를 이어갔다.
에스파냐인들은 모든 잉카인을 붙잡아 빌카밤바 제국을 끝장내려고 단단히 작심했다. 가장 중요한 도망자인 망코의 서른다섯 먹은 이들 잉카 투팍 아마루는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가르시아 데 로홀라는 투팍 아마루를 체포했고 다음날 그를 데리고 빌카밤바로 귀환길에 올랐다. 투팍 아마루는 쿠스코에서 가장 달변인 일단의 성직자들의 손에 맡겨졌고 그들은 금방 성공을 거두었다. 잉카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비범한 지성을 과시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기 위해 필수적인 모든 것을3일 만에 깨우쳤다.’
그러나 부왕은 잉카 제국이 재기할 일말의 가능성도 완전히 제거하고자 잉카족을 몰살하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결국 투팍 아마루는 검은 옷을 입고 손과 목이 묶인 채 검은 천을 씌운 노새에 태워져 쿠스코의 중심 광장으로 끌려갔다. 잉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교수대에서 연설을 하고 종부성사를 받은 후 (잉카족과 앙숙인) 카냐리 부족 인디오가 휘두르는 마체테에 침수되었다. 수천 명의 페루 사람들로부터 가슴 찢어지는 탄식이 흘러나왔고 쿠스코의 모든 교회에서 조종이 울렸다.
투팍 아마루라는 이름은 페루 역사에서 계속 살아 있다. 18세기 후반 에스파냐의 지배에 항거하다 역시 처형당한 잉카족의 후예도 그 이름을 차용했다. 그 후대의 투팍 아마루는 페루 독립의 선구자로 추앙되었다. 그의 상징적 이미지는 20세기 주화에 등장했고 그의 이름은 멀리 우루과이 투파마로 게릴라와 페루의 마르크스주의 게릴라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92쪽)
보헤미아 출신의 사무엘 프리츠 신부는 아마존 본류에 막 상륙한 말라리아를 앓았던 듯하다. 말라리아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는 옛날부터 있었던 병이다.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그가 삼일열과 사일열이라고 부른 증상을 묘사했다. 로마인들은 그러한 병이 나쁜 공기 때문에 야기된다고 생각해서 ‘말-아리아’라는 병명을 고안해냈다. 말라리아는 곧 대서양을 건넜다. 1540년대에 베네수엘라 심장부로 뛰어든 콘키스타도르들은 열병에 쓰러졌다. 말라리아는 1586년 페루에 도달했다.
마침내 로하(오늘날 에콰도르 지역 안데스 산지 중 아마존 강 쪽에 위치한다)의 인디오들이 키나라고 부르는 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쓴 가루약을 먹여 한 예수회원을 치료했다. 예수회원들은 키나 나무를 번식시켜 기적의 명약 키니네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키니네는 ‘예수회 껍질’이나 ‘예수회 가루약’으로 통했다. (158쪽)
(아마존을 침략한 이들이 만들어낸 키니네. 그것이 유럽인들의 방패가 되어, 아프리카 침략을 도왔다는 아이러니.)
18세기 중반 남아메리카, 특히 아마존 지역의 정치적 지형은 영구히 변모했다. 포르투갈의 외교관들은 1750년 마드리드 조약에서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분할선은 250여 년 만에 지워졌다. 대신 두 이베리아 왕국은 대단히 슬기로운 두 원칙에 따라 남아메리카를 분할했다. ‘첫 번째 핵심 원칙에 따라 경계선은 ...... 강의 수원이나 경로,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산맥처럼 ...... 가장 잘 알려진 지리적 특징을 지표 삼아 설정될 것이다. 둘째, 각자는 현재 점유하고 있는 곳에 그대로 남을 것이다.’
네그루 강부터 대서양까지 브라질의 북쪽 경계는 분수령으로 규정되었다. 남쪽을 향해 아마존 분지로 흘러드는 모든 강은 포르투갈로, 카리브 해를 향해 북쪽으로 흐르는 강들은 에스파냐로 귀속되었다. 이 경계선 획정에는 후속 조정이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마드리드 조약은 현대 브라질의 크기를 확정해, 브라질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절반, 아마존 분지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이 분할에서 완전히 무시되었다. 새로운 경계선은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야노마미족 마쿠시족, 티쿠나족, 티리요족, 기타 네그루 강 상부의 전 부족들의 영토를 쪼겠다. 그러나 경계선들은 명백하고 논리적인 지리적 특징을 따랐기 때문에 식민지 간 분쟁을 방지했다. 국경 지역에서 무력 충돌은 없었다. 이때 확정된 경계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긴 식민지 경계선이다. (188쪽)
나폴레옹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침공은 남아메리카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마존 수원지에 위치한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식민지에서 그것은 독립을 향한 움직임에 마지막 자극제가 되었다. 모든 부왕국은 1776년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과 이제 1790년대 프랑스 혁명의 대격변에 크게 동요되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에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와 시몬 볼리바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호세 데 산마르틴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의 군사 활동은 안데스 산지에서 전개되었고 각각 남쪽과 북쪽에서 이동하여 리마에서 만났다. 따라서 전투는 아마존 분지 주변부를 둘러간 셈이었다. 신생 독립국인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가 자국 내 아마존 지역에 관심을 보이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했다. (228쪽)
(남미 역사를 다룬 책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 미란다, 볼리바르, 산마르틴. 그러나 이 책은 그들 '식민지의 영웅들'이 아니라 그들 뒤에 있는 '하층민 외지인'들과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문 책이다.)
1835년에 억압받던 최하층민들이 들고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개펄 위에 지은 입시 오두막이나 움막에서 살아가는 집 없는 사람들인 카바누cabano에서 이름을 딴 카바나젱 반란이었다. 카바누들은 도시를 장악하고 16개월이 지난 1836년 5월까지 벨렝 시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 민중 봉기는 단일한 지도부나 정치적 신조, 달성 가능한 목표를 얻지 못했다. 카바나젱 반란은 첫째, 억압받는 대중이 일으킨 진정한 봉기였다. 둘째, 그 지도자들은 비록 모두 백인이었지만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 셋째, 반란은 방대한 지역을 아우르며 브라질 아마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반란은 무섭도록 폭력적이었다. 무법과 폭력이 시대 풍조가 되었다. 카메타 시와 미카파 요새, 싱구 강의 몇몇 마을을 제외하고 ‘이 드넓은 주에 서 불한당들의 사나운 분노를 피해간 곳은 없었다. 대부분의 제당소와 파젠다(대농장)는 파괴되었고 그곳의 노예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브라질 아마존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애초부터 인구가 빈약했는데 카바나젱 반란을 거치면서 그중 5분의 1이 사망했다. 심각한 노동력 부족 덕분에 개인들은 얼마간의 협상력과 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세 인종, 즉 원주민, 백인, 흑인 간 통혼이 이뤄졌고, 이를 통해 카보클루caboclo라는 강인한 인종집단이 생겨났다. 카보클루는 아마존의 숲과 강에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한 변경 사람들이었다. (244쪽)
몇몇 위토토족, 보라족, 안도케족과 다른 원주민 집단은 고무 시대의 압제에서 살아남았지만 숫자는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일부 인디오들은 무장 투쟁을 시도했지만, 어느 응징보다 더 신속하고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인디오들을 구한 것은 아마존 고무 붐의 붕괴였다.
1988년 콜롬비아의 바르코 대통령은 한때 악명 높았던 라 초레라에서 6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의 프레디오 푸투마요 원주민 보호구역을 선포했다. 오늘날 수천 명의 위토토족과 보라족이 살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이 부족들은 별다른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요 문제는 이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혁명가들이나 코카 잎을 재배해서 코카인으로 정제하려는 마약 밀매업자들 그리고 이따금 지나치게 열성적인 선교사들이다. (442쪽)
노예제는 확고하게 금지되었고 접근이 가능한 강가에는 원주민 부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배는 금속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돛대에 쓸 목재나 밧줄에 쓸 리아나(덩굴) 수요도 거의 없었다. 농산물은 다른 곳에서 더 잘 자랐다. 커피는 기후가 더 온화한 상파울루 고원에서 번성했고, 쌀과 목화, 사탕수수는 브라질 북동부와 심지어 미국 남부, 카리브 해 지역에서 더 잘 자랐다. 카카오 역시 서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규모가 아마존 지역을 능가했다.
고무 채취인과 그들의 고용주인 요란한 고무업자들이 대부분 떠난 후 남은 이들은 소규모로 고기를 잡는 어부와 화전민, 그리고 숲속 채집인들이었다. 일반적으로 혼혈 혈통인 이 강인한 사람들은 아마존이 제기하는 난관과 가능성에 적웅한 최초의 외부인들이었다. 그들은 강둑 사람들, 에스파냐어로는 리베레뇨ribereno, 포르투갈어로는 히베이리뉴ribeirinho 이었고 생존의 비법들, 특히 풍요로운 바르제아 첨수평원에서 생존하는 비법을 알았다. 그들은 인디오들로부터 그곳의 식물과 고기잡이, 사냥법에 대해 배웠고, 점차 주요 강의 강둑에서 인디오들을 대체해나갔다. (448쪽)
아마존의 ‘쇠퇴’는 결코 끝나는 않는 인간의 진보를 믿은 경제적 진화론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고무 붐의 붕괴와 함께 이들은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되뇌었다. 1920년대에 미국의 지리학자 로이 내시는 아마존 카보클루들의 생활수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언급했다. 지난 4백 년간 포르투갈인과 브라질인들이 야금야금 베어 먹은 양으로는 이 매머드 같은 녹색 치즈의 표면에 구멍 하나 만들지 못했다. ‘아마존 강을 열심히 왕래한’ 지난 세기들은 ‘원주민 인구 대다수의 파괴와 몇몇 고무나무의 훼손’만 초래했을 뿐이었다.
내시는 비를 탓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많은 강우량과 열대 기후는 식물이 지속적으로 생장한다는 뜻이다. 이 식물들이 땅에 닿는 영양분을 사실상 모조리 빨아들여서 토질이 떨어진다. 이런 땅에 수목을 싹 베어내면, 집중호우에 노출된 표토는 즉시 침식되어 씻겨 가 버리고, 일대는 강렬한 햇볕에 구워져 분홍색 점토가 된다. (449쪽)
칸지두 혼동은 인디오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절대 보복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시절 여러 차례 인디오들과 다툴 만한 상황을 겪고 난 후 그는 적대적인 부족과 직면한 사람들을 위한 유명한 신조인 ‘차라리 죽을지언정 죽이지 말라!’를 발전시켰다. 이 인도주의자는 자신이 어떻게 각 부족의 우정을 얻었는지, 그들이 탐험에 얼마나 귀중한 도움을 주었는지, 얼마나 훌륭하고 근면한 사람들이며 뛰어난 사냥꾼이자 숲 사람들인지를 설명했다. 이러한 내용은 인디오들을 가르치려드는 선교사들이나 인디오들을 착취하고 경멸하고 두려워하는 정착민들로부터 비하하는 이야기만 들어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 시기 브라질 지식인들 사이에서 친인디오 운동이 성장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낭만적 민족주의와 과거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죄의식이 결합된 것이었다. 브라질이 비유럽적인 정체성을 추구하고 있던 시기 원주민 부족은 순수 브라질인으로 비쳤다.
실증주의자들은 특히 새로운 공화국의 헌법에 인디오들을 위한 특별 보호조항을 원했고 원주민 부족들을 상대하는 임무를 선교사들의 수중에서 빼앗아 와야 한다고 결심했다. 비선교계 인디오 옹호자들은 수가 적었지만 언론과 영향력 있는 학계 곳곳에서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영리하게 자극했다. 그들은 인디오들은 외국인에 맞서 보호되어야 할 진짜 브라질인들이라고 주 장했다.
흔동은 1910년 3월 인디오 보호부서를 이끄는 데 동의했다. 5월에 관계 조직 법령이 만들어졌고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6월에 공표되었다. 부서는 포르투갈어 부서명 앞 글자를 따서 SPI(인디오 보호부서)로 알려졌고 부서의 모토는 혼동의 격언 ‘차라리 죽을지언정 죽이지 마라’였다. SPI와 그 후속 기구인 푸나이Funai(국립 인디오재단)는 그 불완전한 나름의 역사 속에서 브라질의 원주민 부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선례를 제공함으로써 다른 아마존 국가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463쪽)
혼동의 새 인디오 보호부서는 적대적 부족과 접촉함으로써 능력을 입증해야 했다. 이것은 당시 ‘평정pacify’활동으로 알려진 것으로, 평정된 원주민 부족은 ‘문화 변용acculturation’ 과정을 거친 후 궁극적으로는 브라질 사회에 ‘동화assimilation’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1922낸 흔동은 39살의 한 놀라운 독일인을 파견했다. 독일 예나의 초라한 가정에서 태어난 쿠르트 운켈은 대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1903년 무일푼의 이민자로 브라질에 왔던 그는 곧 상파울루 주 내륙에 사는 더럽고 가난한 난데바-과라니 족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뛰어난 독학 인류학자이자 원주민 권리의 옹호자가 되었다. 그는 인디오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냄으로써 그들의 사고방식과 사회에 대한 공감을 키워갔다. 과라니족은 이 조용한 독일인을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그에게 니무엔다주(‘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나중에 브라질 시민이 되었을 때 운켈은 자신의 이름을 쿠르트 니무엔다주로 정했다.
흔동이 무서운 파린틴틴족과 화평을 맺어보도록 부탁했을 때 그는 바로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파린틴틴족 ‘평정’ 작업은 끔찍하게 잘못 돌아갔다. 이 용맹한 부족은 외래의 질병으로 우수수 죽어나갔고, 무기를 내려놓자마자 그들의 땅은 침략을 당했다. 니무엔다주의 친구는 훗날 그가 자신의 영웅적 행위를 한탄했다고 썼다. ‘그는 가장 행복한 인디오란 자신들의 땅을 넘보는 자들에 대해 용맹한 투지와 타협하지 않는 적개심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고립된 부족과의 접촉은 유사한 결과를 낳았다. 거의 필연적으로 곧 끔찍한 유행병-홍역이나 인플루엔자, 결핵-이 돌았고 여기에는 적절한 치료책이 없거나 부적절한 의료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두려워하던 부족이 싸움을 멈추면 흔히 그들의 숲과 강은 침략을 당했다. (479쪽)
거대한 아마존 숲속을 거닐면서 나무둥치 아랫부분과 뿌리만 보고 모든 나무를 식별할 수 있는 식물학자는 없다. 꽃과 잎사귀, 열매를 봐야 한다. 나무들이 대단히 크고 줄기가 아주 곧고 반듯하게 뻗어 있기 때문에 숲 천장까지 직접 올라가 관찰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하다. (276쪽)
야자나무는 채집인들에게 대단히 유용하다. 이것들은 베어 넘기기 쉽다. 키가 크고 당당한 부리티(모리체)는 ‘건축자재, 탄수화물 음식, 병마개, 직물로 짠 섬유, 발효음료, 뗏목을 짓는 통나무, 부족 경제에 중요한 다양한 다른 산물을 제공한다.’ 투쿠망tucuma(쿠마레)은 덩굴식물을 쫓아내기 위해 줄기 전체에 흉측한 고슴도치 같은 가시가 나 있지만 인디오들에게는 가장 좋은 친구다. 잎사귀는 가장 좋은 해먹과 끈을 만들 수 있는 질긴 섬유질을 제공하고 가시는 무수한 쓰임새가 있으며 오렌지 같은 열매는 낚시의 미끼로 사용되고 나무는 배와 집을 짓는데 좋다.
마라조 섬에서 가장 사랑받는 야자나무는 아사이acai로, 큰 블루베리만한 자줏빛 열매가 송이송이 열린다. 원주민들은 언제나 아사이 주스를 게걸스럽게 마셔왔다. 아사이 주스는 마니오크와 생선 다음가는 주식이며 이 지역 삶의 지주다. 아마존 현지인들이 옳았다. 현대 영양학자들은 아사이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자연식품’이라고 본다. 적포도주보다 30배나 많은 양의 산화 방지 물질과 올리브기름의 비타민을 모두 함유하고 있다. (541쪽)
1940년대에 바르가스 정부는 국가의 심장부를 열어젖히는 임무를 띤 중앙브라질재단을 신설했다. 재단은 아라과이아 강 상류부터 북서쪽으로 탐험한 적 없는 땅을 가로질러 싱구 강과 그다음 타파조스 강 방면까지 길을 내는 원정에 착수했다. 목적은 북아메리카로 비행하는 항공기들이 이용할 수 있는 비상 착륙장과 기상관측소로도 활용할 수 있는 가설 활주로를 내는 것이었다. 빌라스 보아스 형제는 교육을 받고 곧 3년간의 원정을 떠맡게 되었다 오를란두와 클리우지우 빌라스 보아스는 이후 30년간 거기서 살았고 흔동의 뒤를 이어 원주민 부족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비행기와 가설 활주로는 아마존 분지에서 이동의 혁명을 가져 왔지만 그 자체가 숲을 크게 파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기톱은 전혀 달랐다. 금속 날(마체테, 도끼, 한손잡이 톱)은 인간이 몇 시간만 힘을 들이면 나무를 쓰러트리는 것을 가능케 했다. 그것은 인디오들에게 거부하기 힘든 것이었고 따라서 고립된 부족과의 접촉에서 언제나 미끼가 되었다. 여기에 모터가 장착된 전기톱은 벌목꾼들에게 엄청난 진보였다. 이러한 벌목을 통한 삼림 파괴가 수목을 쳐낸 개간지나 인근 캄포 초지를 태우는 일-사냥에 유리하도록 매년 사바나를 태우는 일부 평원 인디오들에게 전수받은 관행-과 결합했다. 갑자기 거대한 열대우림은 인간의 발 앞에 엎드리게 되었다.
열대우림의 세 번째 운명의 적은 토목 기계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도로였다. 남쪽에서는 볼리비아인들이 북쪽의 라파스부터 베니 강과 북동쪽의 모호스 평원까지 도로를 냈다. 서쪽에서는 페루인들이 안데스 산맥을 관통해 배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우카얄리 강의 푸칼파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비행기 활용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로 건설로 아마존에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한 것은 브라질이었다. 안데스라는 장벽을 뛰어넘을 필요가 없는 그들에게는 훨씬 쉬운 일이었다. (564쪽)
세계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 댐이 토칸칭스 강 하류에 건설되었다. 비판가들에 의해 ‘파라오급 사업’이라고 묘사된 이 투쿠루이 댐은 200킬로미터 길이의 저수지로 대규모 침수를 야기했다. 마나우스 북쪽 우이투망 강에 건설된 또 다른 수력발전 댐 발비니는 대참사였다. 1987년 가동된 이 댐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40만 헥타르의 처녀림-이 가운데 상당부분은 원주민들의 땅이었다-을 침수시키고도 누수와 실트 퇴적 탓에 고작 250메가와트를 생산했을 뿐이었다.
아마존 저지대는 해발고도가 90미터가 채 못 되고 너무 평탄해서 어마어마한 면적의 삼림을 침수시키지 않고는 전력을 생산할 수 없었다. 1980년대 말에 트랜스아마조니카의 알타미라 시 인근 싱구 강 하류에 일련의 수력발전 댐을 건설하는 계획이 제안되었다. 이 댐들이 건설되면 카야포족의 땅이 모조리 물에 잠기게 될 처지였다.
카야포족은 투쟁심이 있고 정치적으로 영리한 부족이었고, 파울리뉴 파이아칸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있었다. 국내외 NGO들과 언론의 격려에 힘입어 카야포족은 1988년 알타미라에서 대규모 집회를 조직했다. 한 카야포족 여자가 발전 회사 간부에게 대고 외쳤다.
“우리는 전기가 필요하지 않다. 전기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곳의 강들이 자유롭게 흐르기를 원한다. 우리의 미래는 거기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냥하고 모여 살 숲이 필요하다. 당신네들 댐은 필요 없다.”
간부가 빈곤을 구제할 진보를 이야기하자 그녀는 통렬한 논박으로 맞섰다.
“우리의 ‘빈곤’ 을 덜어주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우리는 가난하지 않다. 우리는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비참하지 않다. 우리는 인디오이다.”
집회는 전 세계의 TV 화면에 나갔고 국제 은행들은 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결국 싱구 강 댐 건설 계획은 치워졌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랬다. 이 계획은 21세기 들어 기획자들의 안건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573쪽)
인디오들은 점차 그들 스스로 정치적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지 배워갔다. 대부분의 부족사회는 마을의 일이 일상적으로 논의되는 자그마한 민주정이다. 이러한 구조는 원주민 지도자들에게 때로는 두서가 없지만, 강력하고 열정적인 웅변가로 성장하는 경험을 제공했다. 최초의 인디오 회의는 1970년대 중반 가톨릭 선교사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러한 모임은 전국 각지에서 온 인디오들에게 동일한 위협에 맞선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족들은 NGO 산하에 특정 종족 집단이나 강 유역, 삼림을 대표하는 원주민 사회에 기반한 조직들을 차차 만들어나갔다. 20세기 말이 되자 브라질에는 원주민들과 뜻을 같이 하는 약 30여 NGO의 지원과 격려를 받아 130여 개의 원주민 압력 단체가 생겼다. 인디오 대변인들은 이러한 회의에서 부상했다. 처음 부상한 인물은 부족이 ‘평정’되기 전에 태어난 샤반테족의 족장 마리우 주루나로, 1982년 인디오로서는 처음으로 브라질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카야포족은 정치적 로비에 특히 적극적이었고 금과 목재에서 나온 사용료로 부유했다. 그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대변인을 몇몇 배출했는데 이 가운데 파울리뉴 파이아칸과 하오니는 전 세계를 돌며 만난 대통령과 왕, 종교 지도자, 유명 인사, 국제 언론을 침착하게 상대했다.
대외 홍보 활동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이해한 카야포족은 언제나 보디페인팅과 깃털 머리장식, 나무 입술 고리를 하고 나와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써 TV 방송을 사로잡았다. 그들과 인디오 동조자들은 열심히 로비를 해서 1988년 브라질이 21년간의 군사 정부에서 벗어나며 제정한 새 헌법에 원주민의 권리를 포함시키는 데 성공 했다. 브라질 남부에서는 마르쿠스 테레나가 나와 활동했다. 또 뛰어난 웅변가로 198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모든 인디오를 대표하여 교황과 대담한 과라니-카이오와족의 마르사우 투팡-이가 나왔다.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국경에 걸쳐 있는 삼림 구릉지가 본거지인 커다란 부족 야노마미족은 지속적으로 세계에 인디오들의 대의와 철학을 호소하고 있는 유창한 샤먼 다비 코페나와를 배출했다.
이 모든 정치 활동은 대규모의 아마존 삼림 지대를 원주민들을 위해 법적으로 보호하는 결과를 낳았다. 브라질에서는 2005년에 마침내 마쿠시족과 호라이마의 와픽사나족을 위한 거대한 보호구역이 선언되었다. 콜롬비아는 고무 붐 동안 훌리오 세사르 아라나에 희생당한 부족들의 생존자들을 위한 프레디오 푸투마요 보호구역을 비롯해 남부의 아마조나스 주와 바우페스 주에 광대한 원주민 보호구역을 선포했다. 베네수엘라는 20년간의 끈질긴 캠페인 끝에 선포된 브라질의 야노마미족 공원에 버금가는 야노마미족 국립공원을 갖고 있다. 페루와 볼리비아, 에콰도르도 원주민 부족이 살고 있는 삼림 지역을 보호한다. (580쪽)
이러한 보호구역은 세 가지 주요한 이점이 있다. 첫째는 부족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다. 땅은 인디오들에게 모든 것을 의미한다. 땅은 공격적인 이방인들에 대한 완충제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아마존 부족들이 접촉 이후 창궐한 질병과 붕괴에서 회복했다. 원주민 인구는 1960년 이후 네 배 증가했다. 이것은 토지 보호 정책이 제공한 안정 그리고 예방의학과 출산 의료를 포함해 더 좋아진 건강관리 덕분이다.
보호구역의 또 다른 커다란 이점은 원주민 부족이 흔히 열대우림 환경의 뛰어난 지킴이라는 것이다. 몇몇 부족들이 벌목꾼이나 탐광업자, 무허가 사냥꾼들에 의해 매수되었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매우 아끼기 때문에 파괴적인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마존 지역의 도시 유권자들은 인디오들이 넓은 삼림 보호구역을 갖는 것을 찬성하는데 바로 그들이 탁월한 환경 지킴이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점은 아마존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고 아마도 지구상 다른 곳에는 남아 있지 않을 40~50개의 비접촉 고립 부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581쪽)
상황은 새천년 들어 더욱 나빠졌다. 규제와 통제에도 불구하고 벌목은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이 고갈된 후 그곳의 다국적 목재 회사들이 아마존으로 진입했다.
환경주의자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소 방목이 되돌아왔다. 20세기 말이 되자 대규모 혹은 중간규모 방목장은 아마존 삼림 파괴의 4분의 3을 야기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벌목과 방목의 부활과 더불어 숲에 대한 또 다른 커다란 위협은 콩 플랜테이션이다. 콩은 일본인 정착민들에 의해 한 세기 전에 브라질에 도입되었고 브라질은 이제 미국 다음 가는 수출국이다. 마투그로수 주의 주지사 블라이루 마기는 세계 최대의 콩 재배 갑부이다. 마투그로수는 ‘울창한 숲’이란 뜻이며 이 커다란 주에는 넓은 숲이 많다. 마기가 취임한 2004년 한해 동안 마투그로수 주의 삼림 파괴 속도는 2배로 증가했다.
한 세기 전 고무와 마찬가지로 배를 불리는 사람은 콩 수출업자들이다. 카길 사를 선두로 미국의 3대 곡물거래 회사들이 콩 시장에 들어왔다. 1999년 카길 사는 산타랭에 하루 6만 톤 이상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깊은 수심의 자체 항만 시설을 지었다. 산타랭 바로 남쪽에 있는 베우테하는 콩 재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이해관계는 70년 전 헨리 포드의 고무 재배지들이 만들어낸 도시를 되살렸다. (601쪽)
1922년 말레이와 수마트라의 영국과 네덜란드 고무 농장주들은 생산량을 제한하고 가격을 올리기 위해 스티븐슨 플랜으로 알려진 카르텔을 형성했다. 이 영국-네덜란드 카르텔은 미국의 헨리 포드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는 세계 자동차의 절반을 생산하고 있었다. 물론 몇몇 미국인들도 아마존 바깥에서 고무나무를 재배하고 있었다. 하비 파이어스톤은 라이베리아에, 굿이어 사의 폴리치필드는 파나마와 코스타리카에, 그 외 다른 이들은 아이티와 필리핀, 멕시코 등지에 플랜테이션을 갖고 있었다.
1923년과 이듬해에 미국 농무부와 상무부는 브라질로 조사팀을 파견하여 아마존에서 고무를 생산할 잠재적 후보지에 대해 보고하게 했다. 아시아 플랜테이션에 보복을 원했고 또 미국의 아낌없는 투자도 기대했기 때문에 브라질인들은 이 조사에 전적으로 협조했다. 아마존에서 플랜테이션 고무를 재배하지 못한 주요 이유는 남아메리카 잎마름병South American Leaf Blight, SALB이라는 병을 일으키는 기생 생물 도티델라 울레이Dothidella ulei 탓이다.
포드자동차는 특유의 정력적인 태도로 브라질 사업에 뛰어들었다. 브라질인들에게 포드란지아Fordlândia로 알려진 도시를 재빨리 건설했고 포드란지아는 벨렝과 마나우스, 이키토스에 이어 아마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도시에는 주택 2백 채, 1천 명의 독신 남성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대형 병원, 영화관, 교회, 학교가 있었다. 건물들은 망고나무와 야자나무, 유칼립투스 가로수가 늘어서 있고 모두 전기 가로등으로 밝혀지는 대로를 따라 들어서 있었다. 또한 미국인과 브라질인 전용으로 각각 테니스 코트와 수영장, 스퀘어댄스를 위한 광장과 홀 열여덟 개짜리 골프 코스를 갖춘 사교 클럽도 두 군데 있었다. 포드란지아는 급수관과 하수관, 50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와 철도, 창고와 기계 공장, 항구를 갖추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고무 플랜테이션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처음 5년 동안 포드란지아에는 열대 농업이나 고무 재배에 대해 과학적 훈련을 받은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1934년 새 경영자 제임스 와이어는 수마트라에 있는 굿이어의 플랜테이션에서 고무나무 종자를 가져왔다. 이것들은 단 28그루라는 위험스러울 만큼 작은 유전자 풀에서 수집된 것이었다. 수액을 매우 많이 생산하도록 육종되었지만 남아메리카 잎마름병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935년에 참사가 닥쳤다. 고무나무는 천장에서 잎사귀들이 서로 닿는 크기까지 자라났다. 우려했던 잎마름병 포자가 활발하게 퍼져나갔다. 헨리 포드는 거의 700만 달러를 쏟아 부은 아마존 플랜테이션이 고무를 전혀 내놓지 않고 앞으로도 내놓을 전망이 별로 없는 것에 질려버렸다. 그는 베우테하의 28만 헥타르의 대지에 더 큰 버전의 포드란지아를 건설했다. 이번에는 주택 8백 채와 여러 영화관, 오락 회관 세 채, 축구장 다섯 개가 지어졌다. 5백만 개의 종자가 베우테하에 심어졌다. 오늘날 관광객들은 이 미국식 도시의 잔해를 방문해 십자로 난 길과 베란다와 정원, 전형적인 철제 소화전, 멋진 물탱크로 둘러싸인 교외 주택들을 구경할 수 있다.
1941년이 되자 베우테하의 플랜테이션은 번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베우테하에는 7천 명의 주민과 360만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 어린 나무들도 남아메리카 잎마름병이 퍼질 만큼 충분히 잎천장을 키우고 있었다. 또 한 번 파괴적인 전염병이 돌았다. 타파조스 강의 플랜테이션에 거의 천만 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헨리 포드는 1945년 마침내 고무 한 번 채취하지 못하고 사업을 포기했다. 그는 포드란지아와 베우테하를 브라질 정부에 50만 달러에 매각했다. (514쪽)
카길 사를 선두로 미국의 3대 곡물거래 회사들이 콩 시장에 들어왔다. 1999년 카길 사는 산타랭에 하루 6만 톤 이상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깊은 수심의 자체 항만 시설을 지었다. 산타랭 바로 남쪽에 있는 베우테하는 콩 재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이해관계는 70년 전 헨리 포드의 고무 재배지들이 만들어낸 도시를 되살렸다. (601쪽)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 인상기 (0) | 2015.10.25 |
---|---|
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 (0) | 2015.10.08 |
작가의 망명- 프라무댜 아난타 투르와의 대화 (1) | 2015.07.10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시간의 목소리' (2) | 2015.07.09 |
폴 로버츠, '식량의 종말' (0) | 2015.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