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내 책, 옮긴 책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딸기21 2018. 12. 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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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훌리안은 소치밀코의 가장 외딴 섬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나뭇가지로 지은 그의 초가집은 인형과 개들이 지켰다. 쓰레기장에서 주운 망가진 인형들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인형들은 악령들로부터 그를 보호했다. 깡마른 개 네 마리는 사악한 사람들로부터도 지켜 주었다. 그러나 인형도 개들도 인어는 쫓아버릴 줄 몰랐다.

깊은 바닷속에서 인어들이 그를 불렀다. 돈 훌리안은 그만의 주문을 알고 있었다. 인어들이 그를 데리러 와서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노래할 때마다 그는 맞받아 노래하며 인어들을 내쳤다.“내 말이 그 말이야, 내 말이 그 말이야, 악마라 날 데려갔으면, 하느님이 날 데려갔으면, 하지만 넌 안 돼, 하지만 넌 안 돼.”

또 이렇게 노래하기도 했다. “여기서 꺼져, 여기서 꺼져, 너의 치명적인 입맞춤은 다른 입술에나 줘, 하지만 내 입술은 안 돼, 하지만 내 입술은 안 돼.”

어느 날 오후, 밭에 호박씨를 뿌릴 준비를 마친 뒤, 돈 훌리안은 바닷가로 고기를 잡으러 갔다. 거대한 물고기를 한 마리 낚았는데, 이미 그의 손아귀에서 두 번이나 도망친 적이 있어 안면이 있는 물고기였다. 아가미에서 낚싯바늘을 뽑고 있을 때, 역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훌리안, 훌리안, 훌리안.” 목소리들이 평소처럼 노래했다. 평소처럼 돈 훌리안은 침입자들의 불그레한 그림자가 넘실대는 바다 앞에서 몸을 숙이고 변함 없는 답가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답가를 부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노래할 수 없었다. 음악에 버림받은 그의 몸은 섬들 사이를 정처 없이 떠다녔다.


좋아하는 남미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책 <시간의 목소리>의 한 토막이다. ‘돈 훌리안의 섬’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2013년 봄이었다.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를 흐르는 솟시밀코 운하에는 무네카스 섬(La Isla de la Munecas)이 있다. ‘인형의 섬’이란 뜻인데, 세계의 관광객들이 꼽는 ‘괴기스런 관광지’ 랭킹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하는 곳이다. 오래전 이 부근에서 어린 소녀가 물에 빠져 숨졌다. 


돈 훌리안 산타나라는 남성이 이 섬에서 홀로 살고 있었는데 숨진 소녀의 영혼이 자신을 찾아온다며 어느날부터 혼령을 달래기 위한 인형들을 주렁주렁 매달기 시작했다. 산타나는 섬에 거주한지 50년만인 2001년 의문의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남긴 인형들은 지금도 섬을 지키고 있어 ‘인형의 무덤’이란 별명을 얻었다. 돈 훌리안의 섬은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이었던 갈레아노의 책에서 저렇게 스산한 표현들로 묘사됐다. 버려진 것들이 한데 모이고, 그것이 또 다른 이야기로 탄생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뭔가 ‘마이너’한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 관심이 결국 ‘쓰레기에 대한 책’으로까지 이어졌다. 어쩌면 그 관심은 나 스스로 가졌다기보다는 우연한 어떤 일들이 겹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민학교 시절, 어린이용으로 각색된 삼국유사를 읽었다. ‘만파식적’이니 무영탑 이야기니 하는 것들이 몹시 재미있었다. “삼국시대에 태어났으면 좋았을텐데”라는 나의 말에 엄마는 이렇게 응수하셨다. “노비로 태어났으면 어쩌려고.” 돌아보니 그 말이 내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에 정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기도 하다. 화려한 것, 힘 있는 것, 위쪽에 있는 것을 꿈꾸고 상상하기 쉽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오히려 남루하고, 약하고,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일 때가 적지 않다. 


난지도도 기억난다. 지금은 공원으로 변신해 있지만 1980년대의 서울 난지도는 쓰레기더미였다. 이 책에 묘사한 필리핀의 스모키마운틴만한 규모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곳에는 서울시내에서 모여든 폐기물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사이의 마을에 사람들이 살았다. 봉사활동을 하던 동네의 어느 분을 따라 난지도에 갔다. 곁에 두고 본 그림이나 사진처럼 생생하지는 않지만 그 때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윤상훈 편집자와 ‘책을 써보자’는 이야기를 한 뒤로 벌써 몇 년이 흘렀다. 편집자는 내가 기자생활을 하면서 많이 다뤘던 국제 뉴스를 쉽게 읽는 책을 한 권 써보면 어떻겠냐고 했고, 나는 ‘버려지고 잊혀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굉장히 마이너한 책이 될 것이고 결코 많이 팔리기는 힘들 거라는 걸 알았지만, 다행히도 저자보다 더 마이너한 감성을 지닌 편집자와 출판사가 흔쾌히 응해줬다. 우리끼리는 이 책을 ‘쓰레기책’이라 불렀다.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 지 알지 못한 채, 베어지는 나무와 버려지는 종이를 더 만들어낼 지도 모르는 책을 쓴다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세상은 쓰레기로 넘쳐난다. 만들어지는 것은 곧 버려지는 것이다. 만들어내는 만큼, 파내는 만큼 버려진다. 2018년 11월의 신문 기사 한 토막. 필리핀 마닐라의 한국대사관 앞에서 현지 환경운동가들이 한국의 ‘쓰레기 수출’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민다나오 섬으로 보낸 컨테이너 안에 5100톤의 쓰레기가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캐나다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필리핀에 쓰레기를 보냈다가 외교 갈등을 빚었다. 더 이상 버릴 곳을 찾기 힘들어진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에 쓰레기를 보내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바닷가로 떠밀려온 고래나 물새 뱃속에 쓰레기가 가득차 있다거나, 전자쓰레기들이 아프리카 빈국으로 향한다는 것은 이젠 새 소식도 아니다.


곁에 두고 쓰던 물건은 물론이고 시간과 공간도 사람들의 버림을 받는다. 무덤이, 공원이, 때론 도시 자체가 버려지기도 한다. 죽음도, 역사도 버려진다. 시간이 흐르며 잊혀지는 것도 있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우고 감춰버리는 것들도 있다. 버려지는 것들 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책을 쓰면서 느낀 가장 큰 역설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폐기되는 것들 중 하나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현대의 노예제를 다룬 책들은 “21세기에 노예가 존재하는 건 쓰고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존재 자체가 지워지거나, 쓰이다 버려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노예, 난민, 이주민, 미등록자, 불법체류자, 무국적자 같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 버리고 지우고 폐기하는 존재인 우리, 버림받고 지워지고 폐기당하는 존재인 우리. 자료를 모아 읽고 정리하고 글을 다듬으면서 끊임 없이 이런 우리에 대해 생각했다. 책을 쓰는 동안 마음의 벗이 돼준 가족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오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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