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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의 시대? 러시아와 서방의 갈등, 어디로 가나

딸기21 2014. 3. 2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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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의 시대가 오는 것일까.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끝내 우크라이나의 크림자치공화국을 합병하기로 결정하자 미국과 유럽은 경악했다. 크림반도의 분리움직임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향후 정국의 지렛대로 활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푸틴은 예상을 뒤집어 엎었다. 푸틴은 18일 “미국 등 서방은 자신들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으며 선택받은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맹비난한 뒤 서방에 맞선 ‘승리’를 선언했다.

 

그 직후 크림반도의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 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우크라이나 장교가 숨졌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러시아가 유럽을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민족주의적 열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크림반도를 놓고 서방과 러시아가 물리적 대결로 갈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양측은 신냉전을 방불케하는 수사를 주고받으며 대립하고 있다. 이번 긴장국면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어느 정도로 장기화될 지는 예측이 엇갈린다. 하지만 러시아의 행보를 막을 ‘서방’의 현실적인 힘이 없어졌고 미국은 무기력하며, 냉전 종식 뒤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는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음을 이번 사태는 보여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19일 모스크바에서 2012년 5월 대통령 당선 당시 공약 이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각료들과의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모스크바 _ 이타르타스연합뉴스


영국 BBC방송은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에 터닝포인트(전환점)이 될 것이라 내다봤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 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스티븐 해들리는 “푸틴은 옛 소련 붕괴 뒤 만들어진 국제질서를 거부했으며 역사를 다시 쓰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푸틴의 행보에 아무도 제동을 걸지 못했다는 사실, 국제체제가 무력함을 노출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불안요인이다. 또한 이번 사태는 한물 간 듯했던 동서 냉전의 진영논리를 다시 국제무대에 끄집어냈다. 미국에서는 대테러전 실패 뒤 숨죽였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새삼 냉전적 사고를 부추기며 신냉전을 운운하고 있다. 서방은 러시아와의 대립선이 유럽의 어디에 그어질지 예측하지 못한 채 불안감을 표하고 있다. 크림 사태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에는 제동이 걸릴 것이며, 푸틴의 옛 소련권 규합은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북핵과 이란 핵문제, 시리아 사태 등 주요 현안에 대한 논의는 모두 교착될 위기에 놓였다. 


1989년 이래로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 시절의 경쟁관계에서 벗어나 ‘전략적 파트너’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최근 몇년 새, 특히 2012년 5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2기 체제가 출범한 뒤 갈등이 심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코소보 사태, 이라크 전쟁, 조지아 전쟁 등 여러 사건들을 거치면서도 냉전과 같은 동서갈등은 이미 끝났고 질적인 변화가 이뤄졌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 기본 전제는 더이상 누구도 미국에 대적할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미국은 계속 잘못된 선택만 했다. 대테러전과 이라크 침공, 뒤이은 경제위기를 지나며 정치·경제적으로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는 붕괴했다.

 

푸틴의 러시아는 2000년대 들어 옛소련 땅이었던 곳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체첸을 짓밟고 조지아를 침공했으며 우크라이나를 수시로 압박했다. 중동 문제에서 미국과 대립하고 독재나 다름없이 내부를 통제했다. 하지만 이번 크림 합병 결정은 종류가 다르다. 러시아가 옛땅을 다시 합쳐 국경선을 바꾸기로 한 것은 소련이 무너진 이래로 처음이다. 러시아는 미국이나 유럽연합(EU)만한 정치사회적 강점을 지닌 것도 아니고, 중국만큼의 경제력도 없다. 그럼에도 러시아를 제어할 힘이 서방에는 없다는 것을 푸틴은 간파했다. 이번 사태는 팍스아메리카나의 명백한 붕괴를 보여줬다. 


허를 찌른 푸틴, ‘차르의 재림’

 

푸틴은 18일 크렘린에서 의회 대표들과 각료들을 불러모아 크림반도의 합병 요청에 대해 설명하는 형식을 취한 뒤 합병 방침을 선언했다. 푸틴의 크렘린 연설에 따르면 “길고 긴 항해 끝에 크림은 모항(母港)으로 돌아왔다.” 연방법에 따라 러시아의 대통령은 크림 측의 ‘편입 신청’을 받아 의회와 내각에 보고해야 하는데, 크림반도의 투표 결과가 나온 뒤 하루만에 이 절차가 끝났다. 푸틴은 같은 날 크림자치공화국 대표와의 합병 조약도 체결했다. 모든 과정은 속도전을 방불케하듯 일사천리로 이뤄지고 있다. 헌재 심사와 의회 비준 절차는 모두 19일 곧바로 개시됐다. 하원은 또 편입 관련 문서 심의를 이날 시작했다. 



푸틴은 18일 의회 연설 뒤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합병 축하행사’에 예정에 없이 등장했다. 군중은 일제히 푸틴을 연호했다. 푸틴은 이날 “러시아는 더이상 구석에 몰려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000년 전 키예프 대공인 블라디미르가 러시아 최초의 국왕이 된 것을 거론하기도 했다. 가디언 등 서방 언론들은 일제히 ‘차르의 재림’이라며 자신감 넘치는 푸틴의 연설을 보도했다.

 

러시아 내에서는 서방의 제재 위협 등을 일축하는 목소리가 크다. 정치분석가 드미트리 바비치는 러시아투데이 인터뷰에서 “서방의 제재는 타깃을 잘못잡았다”고 단언했다. 일례로 서방이 제재리스트에 올린 옐레나 미줄리나 의원은 반동성애법을 주도한 사람이지, 우크라이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바비치는 “서방은 늘 러시아를 위협해왔고, 비공식적으로 제재를 해왔다”며 더이상 아무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유럽이 중단시킨 비자면제 협상에 대해서도 “2003년 푸틴이 먼저 제의한 이래로 유럽은 10년을 끌어왔는데 이제와 보류를 한다니, 우리로선 30년~40년을 보류된 듯 놀랄 것도 없다”고 말했다.


무기력한 서방, 진영논리의 부활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18일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 정상들과 잇달아 만났다. 때맞춰 푸틴이 크림 합병을 선언하자 바이든은 푸틴의 “땅 욕심”을 맹비난했다. 하지만 호기롭게 ‘아시안 피봇(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을 선언했던 오바마 정부는 몹시 곤란해졌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오바마 정부의 대응은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팃포탯(tit-for-tat) 전략이었다. 푸틴이 대화를 할듯 하면 대화를 제의하고, 푸틴이 강수를 두면 거기 맞서 제재를 결정하는 식이었다. 결과적으로 효과는 없었다. 러시아 전문가 토비 가티는 뉴욕타임스에 “이번 일은 지진이며, 그것도 규모 4정도의 지진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지를 모른다”고 말했다. 

 

지도 상의 어느 선에서 푸틴을 저지할 것인지에 대해 실제로 서방의 누구도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푸틴이 생각하는 서방과의 경계선 안에는 이제 크림반도가 들어가게 됐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고도의 줄타기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서방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확대를 어디까지 밀어붙일 지 결정해야 하는 고민을 떠안았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의회는 크림 자치의회의 분리 움직임에 맞서 지난 6일 ‘나토 가입을 목표로 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내놌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받아들일 경우 나토와 러시아가 유럽 복판에서 완충지대 없이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는 미국과 러시아 모두에 엄청난 부담이다.

 

이번 일로 대립의 골이 깊어졌고, 진영논리가 팽배해졌고, 그것이 국제이슈에 접근하는 여러 방식과 절차에 장애가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 네오컨들은 신냉전을 거론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유약한 외교’를 공격하고, 다시 냉전적 사고방식을 부추기려 하고 있다. 푸틴은 18일 중국과 인도 정상들에 전화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대립선을 사이에 두고 편가르는 상황처럼 몰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스탄 등 옛소련권 국가들은 러시아의 패권주의가 어디까지 갈 지에 불안해하고 있다.


러시아의 다음 수순은

 

물론 이번 사태를 ‘신냉전’ 식으로 보는 것에 대한 반론도 많다. 무엇보다 크림반도 상황은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아니다. 소비에트의 80년 체제는 서방이 생각하듯 간단한 게 아니었으며, 러시아인들이 옛소련권 곳곳에 살고 있고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이 희미하거나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크림반도의 친러시아계는 1980~90년의 분할이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다며, 이번 일은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잡는 과정이라 말한다. 

 

지금의 갈등이 냉전처럼 수십년간 지속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BBC방송의 외교전문기자 조너선 마커스는 “러시아는 소련이 아니며 글로벌 결제는 (냉전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냉전이 끝나고 중국이 차세대 파워로 부상하자 미국은 수시로 중국위협론을 들먹이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미·중 관계는 신냉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서방의 ‘푸틴 위협론’에도 정치적 프로퍼갠다의 측면이 적지 않다.

 

반면 푸틴이 여기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18일의 연설에서 푸틴은 도네츠크와 하리코프 등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계 동부 지역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크림반도를 얻은 만큼 서방과 협상 혹은 절충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BBC는 “2008년 조지아에서 분리시킨 지역들은 푸틴 테이블의 '전채'였으며, 크림반도도 메인코스는 아니다. 메인은 우크라이나 자체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방법이 어찌 됐든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서방에 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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