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은지 묻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나의 유일한 동기는 사람들에게 그들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그들을 겨냥해 행해지는 일들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내가 영웅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한 행동(폭로)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프라이버시도 없고 지적 탐사와 창조성의 여지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비밀 개인정보수집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29). 그는 왜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을 감수했던 것일까요.
스노든은 문건을 영국 가디언에 넘기면서, 거기에 이런 쪽지를 붙였다고 합니다. “내 행동의 대가로 고통을 겪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세상이 비밀스런 법과 불평등한 사면과 저항 불가능한 집행력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걸 잠시라도 드러내보일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미군 자원병에서 CIA 기술자로
오늘 하루 종일 외신들은 스노든 얘기로 뜨겁습니다. 이 사건을 특종보도한 가디언에 스노든의 인터뷰 등 상세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인터뷰 등을 통해 그의 행적과 생각을 종합해보면 이렇습니다.
스노든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컴퓨터 기술자입니다. 공부를 별로 못 해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했습니다. 19세였던 2003년 스노든은 미군 특수부대에 지원했습니다. 이라크에 가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훈련소에서 마주친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달랐고, 더군다나 사고가 나 두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파병을 포기하고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노든은 중앙정보국(CIA)에 들어가 컴퓨터 기술자로 일하게 됐습니다. 미국 정보기관의 실상에 눈뜨고 환멸을 품게 된 것은 제네바에서 근무하면서였습니다. CIA 요원들이 스위스 금융가에게서 기밀 금융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교묘한 공작으로 술을 먹인 뒤 음주운전으로 단속되게 하고, 도와주는 척하며 정보를 빼내는 식의 술수를 부리는 걸 보면서 “내 나라 정부가 하는 일과 그것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환상이 깨져나갔다”고 그는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스노든은 CIA 직원으로 일할 때에도 내부고발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만둔 이유가 있었습니다. CIA의 공작 대상은 주로 사람이었고 기계나 시스템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자신의 폭로로 누군가를 위험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를 막았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버락 오바마 정부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비록 “오바마를 찍지 않고 제3의 후보에게 표를 던졌지만” 2008년 오바마가 당선되면서 진정한 개혁이 이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고 합니다.
NSA 계약업체 직원으로
그는 2009년 CIA를 떠나 첫 ‘민간 직장’으로 옮겼습니다. NSA와 계약을 맺은 민간업체 부즈 앨런의 직원으로 일하게 된 겁니다. 그의 작업장은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스노든은 “오바마가 고쳐주리라 믿었던 바로 그 정책들을 오바마가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는 걸 목격”했습니다.
그 후 3년 동안 그는 NSA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든 형태의 행동과 모든 대화를 정찰하려 하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때 나는 인터넷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품이라고 믿었다. 이전에는 결코 접할 수 없었던 온갖 종류의 생각들을 나누고 사람들과 말하느라 인터넷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프라이버시를 기본으로 하는 인터넷의 가치가 ‘유비쿼터스’ 감시프로그램 때문에 빠른 속도로 무너져내리고 있었습니다. 해방전쟁이라던 이라크전은 ‘아랍인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도구로 알았던 인터넷은 ‘사람들을 감시하는 도구’로 변해 있었고, 변화의 희망을 걸었던 오바마 정부는 시민들을 감시하는 정책을 오히려 더욱 강화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CIA 시절 내부고발을 머뭇거렸던 바로 그 이유가, NSA의 프리즘 프로그램을 폭로하는 이유가 됐습니다. 미 정부가 ‘기계와 시스템’으로 사람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던 거지요. 스노든의 폭로에 따르면 NSA는 프리즘을 통해 버라이즌, AT&T,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을 대상으로 방대한 고객정보를 수집해 왔습니다. 개인들의 인터넷 접속기록과 이메일, 메신저 대화, 소셜미디어 활동, 음성통화 등에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특정 감시대상들에 대해서는 구글 검색 내용까지 실시간 감시했다고 합니다.
하와이에서 홍콩으로
스노든의 마지막 근무지는 하와이였습니다. 연봉 20만달러(약 2억2000만원)를 벌고 있던 그는 휴가를 내고 홍콩으로 옮겨가, 빼낸 문서들을 정리해 가디언 기자에게 넘겼습니다.
왜 가디언이었을까요? 미국 언론들의 ‘애국주의’가 못내 걸렸나 봅니다. 가디언은 영국의 진보적 정론지입니다. 이 신문 미국판 온라인뉴스 편집장 재닌 깁슨이 허핑턴포스트와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안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언론들이 ‘비애국적으로 비춰질까’ 우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노든이 가디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입니다.
가디언은 2007년 미국판을 만들었고, 지난해에는 안보 전문가인 스펜서 애커먼과 시민권·시민자유 전문 변호사 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온 글렌 그린월드를 영입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번 NSA 정보수집 취재에서 큰 공을 세웠지요. 9일 홍콩에 있는 스노든을 인터뷰한 것도 그린월드였습니다.
다시 스노든으로 돌아가보지요. 이미 10년 동안 정보기구 안팎에서 일해온 터였습니다. 미국 정보기관들의 추적 능력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홍콩을 택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중국 땅이면서도 자유로운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정보기관들이 “조폭들까지 동원해 추적해오고” 있었지만, 중국령인 홍콩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거죠.
홍콩의 호텔 방에서 스노든은 혹여 도청을 당할까 베개로 문틈을 막고, 감시카메라가 있을까 싶어 컴퓨터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에는 붉은 천을 덮어쓰고 있었답니다. 상대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면서 동시에 가장 알려져 있지 않은 NSA였으니까요.
기자들과 접촉할 때에는 서로 암호명을 쓰면서 첩보전을 방불케하는 보안작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워싱턴포스트의 바튼 겔먼 기자와 접촉할 때 스노든이 썼던 암호명은 라틴어로 ‘진실을 말하는 자’를 뜻하는 ‘베락스’였다는군요. 스노든은 자신이 제보한 내용이 확실히 세상에 알려질 수 있도록, 워싱턴 포스트에 “자료 입수 뒤 72시간 내에 보도하되 프리즘을 설명한 파워포인트 소개문 전문을 공개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치밀하게 일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잠시 샛길-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스노든을 고용하고 있던 NSA 계약업체 부즈 앨런의 부사장은 마이크 매커넬입니다. 1990년대에 NSA 국장을 지냈고, 그 후 미국 정보정책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장(DNI)을 지냈죠. 정보기관-보안회사의 회전문 인사로군요. 매커넬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미 정부가 '프라이버시 우려' 때문에 외부의 사이버공격 위협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지.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다. 다만 가족들이 걱정될 뿐"
가디언이 NSA 비밀 개인정보수집 프로그램 ‘프리즘’에 대해 처음 보도한 것은 지난 5일입니다. 그리고 나흘만에 휘슬블로어(whistle blower·내부고발자, 공익제보자)인 스노든의 신원이 공개됐습니다. 당초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던 그가 가디언 측에 스스로를 드러내겠다고 얘기했다는데요.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NSA와 CIA 등 정보기관들로부터 추적 당하고 있던 처지라 스스로 당당히 밝히고 망명을 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그를 인터뷰한 그린월드 등 기자들은 “스노든은 환상에 빠진 사람도 아니었고, 주저함도 없어보였다”고 적었습니다. 신원을 확인하려 하자 기자들에게 과거 CIA 시절의 신분증과 기한 만료된 외교관 여권 등을 꺼내보이면서 담담히 자기 개인에 대한 이야기들을 털어놨다고 합니다. 스노든은 다만 가족들이 혹시 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자기 개인에게 시선이 쏠리면서 사안의 심각성이 희석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미디어들은 정치적 논쟁을 개인화하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 또 정부가 앞으로 나를 악마처럼 몰아가리라는 것도 안다.”
보스턴 마라톤대회 폭탄공격 등을 들며 미국의 '테러 정보 수집'의 정당성을 운운할 수도 있겠지요. 스노든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범죄였다. 훌륭한 기존 경찰 업무로 해결할 일이었다"고.
미국의 내부고발자들
이제 스노든은 미국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내부고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습니다. 동시에 그는 정보기관의 추적과 소송과 투옥 등 내부고발자들에게 따라붙는 수난도 함께 짊어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언론들이 꼽는 가장 유명한 내부고발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가져온 ‘워터게이트’ 사건의 내부고발자 마크 펠트 전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이죠. ‘딥스로트(깊은 목구멍)’라는 별명으로만 알려진 이 제보자가 누구인지 밝혀진 것은 사건이 벌어진 뒤 33년이 2005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내부고발자의 정체가 수십년씩 묻혀있는 것은 극히 예외적입니다. 역시 닉슨 대통령 시절 일어난 ‘펜타곤 페이퍼’ 사건의 주인공 대니얼 엘스버그의 경우, 내부고발과 동시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펜타곤 페이퍼는 엘스버그가 당시 미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지시로 만든 보고서를 가리킵니다. 엘스버그는 이 보고서를 만들면서 미 정부가 북베트남 공산정권을 전복시키려 비밀 공작을 해왔음을 알게 돼, 이를 폭로하기 위해 7000쪽이 넘는 보고서를 뉴욕타임스에 넘겼습니다.
그러자 법무부는 연방법원에 보도금지 소송을 냈고, 백악관과 국방부는 엘스버그를 매도하기 위해 불법도청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엘스버그를 노린 공작들은 나중에 워터게이트 청문회에서 모두 드러났지요.
엘스버그는 2003년 이라크 공격을 앞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선전들을 비난했으며, 2010년에는 국무부 외교전문 등을 비리폭로 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에 넘겨준 브래들리 매닝(첼시 매닝)을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엘스버그는 9일 스노든에 대해서도 “미국인들을 위해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밝혀준 사람은 없었다”며 “자신의 생명 혹은 자유를 바칠 각오를 한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아이슬란드 망명 의사... 스노든의 안전은 '중국에 달렸다'?
하지만 영광과 찬사는 멀리 있고 감금과 처벌의 위협은 가까이 있습니다. 오바마는 지난 6일 프리즘에 대한 비판을 일축하며 모든 정보활동은 ‘적법하게’ 이뤄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바마 정부는 지금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폭로한 ‘위키리크스’ 파문의 주인공 매닝을 군 교도소에 가둬놓고 있습니다. 매닝은 간첩죄 등 22가지 혐의로 기소됐으며 지난 3일 첫 재판이 열렸습니다.
매닝 사례를 잘 아는 스노든은 미국 정부가 자신을 처벌하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고 싶을 리는 없지요. 스노든은 자신의 가치관과 맞는 나라로 망명하고 싶다면서 아이슬란드를 예로 들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자국 내에 들어와 있는 사람의 망명만을 허용한다면서 스노든이 ‘홍콩에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망명을 받아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당분간 스노든의 운명은 무사히 홍콩을 떠나 아이슬란드까지 갈 수 있을지에 달려 있을 듯합니다. 10일 호텔에서 체크아웃했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홍콩은 중국으로 귀속되기 전, 1996년 미국과 범죄인 인도협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판단에 따라 미국의 범죄인 인도요구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홍콩(중국)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내부고발자가 된 ‘대테러전의 아이들’
이라크 주둔 미군 헌병중대 하사관이던 조지프 다비는 동료가 건네준 CD를 본 뒤 깜짝 놀라 고민하다가 군 수사당국에 알렸습니다. 2004년 이라크 주둔 미군의 추악한 인권유린 실태를 알린 ‘아부그라이브 수용소 파문’의 시작이었습니다. 2010년엔 역시 이라크 주둔 미군으로 복무하던 브래들리 매닝 일병이 위키리크스 문건 유출 혐의로 군 검찰에 체포됐습니다.
미 국가안보국(NSA) 계약업체에서 일하다 비밀 감청활동 등을 언론에 제보한 에드워드 스노든은 이라크에서 복무하기 위해 19세에 파병에 자원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다비와 매닝과 스노든은 모두 미국 태생으로, 9·11 테러의 여파와 대테러전 분위기 속에서 10대 후반~20대 초반을 보냈습니다.
스노든은 9일 가디언 인터뷰에서 이라크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의 해방을 돕기 위해” 미군 특수부대에 자원했지만 자신을 가르치던 미군 교관들은 “아랍인들을 죽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이라크 ‘해방전쟁’의 명분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던 차에 사고로 부상을 입으면서 훈련소를 나왔습니다. 그 후 중앙정보국(CIA) 컴퓨터기술자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일했는데, 자신이 생각했던 미 정보요원들의 국가적 임무와 실제 일하는 방식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제네바에서 내가 본 것들은 미국 정부가 하는 일과 그것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환상을 무너뜨렸다.”
CIA를 나와 국가안보국 계약업체에서 일하면서도 스노든은 똑같은 괴리를 확인했습니다. 미국 정부가 시민 자유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휘슬블로어가 됐습니다.
아부그라이브 사건을 폭로한 다비 역시 “이건 아니다”라는 분노가 자신을 제보로 이끌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다가 “조국을 위해 일해보겠다”는 마음으로 파병을 자원했는데,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쳤다는 것입니다. 위키리크스의 매닝도 최근 재판에서 “대테러전의 부당성을 고발하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대테러전은 미국을 경찰국가로 만들었고, 결국은 남들 뿐 아니라 스스로를 옭아맸습니다. 테러와 싸운다며 만든 '애국법' 따위의 법들은 미국인들의 입을 막고 귀를 막는 도구였습니다. 조지 W 부시 정권이 끝나고 버락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서 벌써 2기를 맞고 있습니다만, 미국 사회의 '애국법 체제'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한번 옭아맨 자유를 다시 되살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확인시켜 줍니다.
스노든과 같은 ‘대테러전 키즈’들을 ‘인생을 건 위험을 무릅쓴’ 내부고발자로 내몬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미국의 진실’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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