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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가지 얼굴의 이슬람, 그리고 나의 이슬람

딸기21 2009. 4. 28.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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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가지 얼굴의 이슬람, 그리고  나의 이슬람 Julia`s Jihad (2009) 

율리아 수리야쿠수마 저 | 구정은 역 | 아시아네트워크

 


(번역한 책이 출간돼 나왔다. 너무나 훌륭한 편집자께서, 이슬람 개론서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상세하게 '깊이보기' 코너들을 넣어주었다.)

 

두어해 전 삼림파괴와 기후변화 문제를 취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갔었다. 자와(자바)섬의 자카르타 공항에 내려 도심까지 들어가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서울에 오는 외국인들도 같은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강남의 테헤란로 부럽지 않게 우뚝우뚝 솟아있는 마천루들과 초현대적인 주상복합아파트 단지들은 인상적이었다. 더 인상적인 것은 호화로운 첨단 건물들 바로 옆을 흐르는 쓰레기투성이 개천과 골목들이었다. 아시아의 거대 개도국 인도네시아의 두 얼굴을 보는 듯했다.

 

자카르타에서 이틀을 보내고 자와섬 중부의 소도시를 거쳐 탈탈거리는 소형 비행기를 타고 깔리만탄(보르네오섬)으로 가니, 그곳에는 이 나라의 세 번째 얼굴이 있었다. ‘빈부격차’를 논하기조차 힘든 미개발된 지역, 강물 위에 통나무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속에는 인도네시아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미개발’이 ‘가난’을 뜻하는 말이라면 깔리만탄은 미개발 지역이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의 손아귀에서 자연과 삶을 착취당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 곳 사람들은 결코 ‘미개발 지역의 원주민’이 아니었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운영하는 거대한 야자(팜)농장들과 속살까지 파헤쳐진 밀림은 그 곳이 세계화와 초국적 자본주의의 개발 바람에서 자유롭지 않은 곳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자원이 많고 땅이 넓고, 오랜 역사와 다양성을 지닌 나라다. 자와섬 중부 욕야카르타의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에는 세계 어느 유적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찬란한 힌두·불교 유적이 있다. 깔리만탄과 이리안 자야(뉴기니섬 서부)의 원시림은 아마존과 함께 지구의 허파로 불린다. 발리의 전통문화와 아체의 석유, 자카르타의 마천루 모두 인도네시아가 자랑하는 자산들이다.

 

인도네시아는 가진 것만큼 상처도 많은 나라다. 이렇게 재해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2004년 쓰나미에 지진, 산사태, 한국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진흙화산 분출’, 항공기 추락과 유람선 침몰이 빈발하는데 심지어 조류독감까지... 재난과 사고가 끊이지 않아, 신문사 국제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인도네시아는 국가 차원에서 굿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씁쓸한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수하르토 독재정권의 철권통치에 찢기고 1998~99년 금융위기에 타격을 받았지만, 뒤늦게나마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체제를 다시 세우려 애쓰는 나라. 그 곳이 인도네시아다.

이 책은 인도네시아 여성 칼럼니스트의 글을 모은 것이다. 인도네시아 최대 일간지인 <자카르타포스트>와 유력 잡지 <템포> 영어판 등에 쓴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인들은 미국과 유럽에 쏟는 만큼의 관심을 아시아에는 쏟지 않는 편인 것 같다.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비교적 가까운 나라이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속속들이 알려지지는 않은 나라다. 아마도 대다수 한국인들이 인도네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는 ‘수만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 ‘쓰나미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자원이 많은 나라’ 정도가 아닐까.

 

율리아의 글들은 인도네시아라는 ‘크지만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를 속속들이 엿보게 해준다. 전통사회와 현대의 충돌, 자본주의적 발전과 그로 인한 그늘, 독재와 민주화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칼럼들에 녹아 있다. 이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주제들이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과정을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그래서 저자가 조곤조곤 얘기하는 인도네시아의 삶의 모습들이 가깝게 다가온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이슬람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민주적, 합리적인 종교로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율리아는 호주인 이슬람학자와 결혼한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으로서, 이중의 편견에 맞서 목소리를 내려 애쓰고 있다. 

 

첫째는 이슬람 보수파들을 향한 것이다. 이슬람은 여성들을 탄압하고 성(性)을 억압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니 종교의 겉치레에서 벗어나 이슬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 중 큰 줄기를 차지한다. “꾸란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율리아의 주장은 그런 의미다. 

 

두 번째는, 이슬람을 ‘여성을 탄압하는 나쁜 종교’로 보는 외부의 시선을 향한 것이다. “이슬람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 이슬람이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을 빙자해 테러와 폭력을 저지르는 자들이 나쁜 것이다.” 그러면서 율리아는 이슬람의 폭력성을 들쑤시고 부추기는 서방의 오만함을 질타한다. 율리아는 특히 여성학자로서 젠더·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이슬람권에서 어떻게 관용적으로 다뤄야 하는가를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판에 박힌 이슬람 옹호론을 벗어나 발랄한 사고를 선보인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슬람과 여성’이라는 주제는 아프간 탈레반 집권 이래 서방에서 줄곧 제기해왔던 문제였다. 1996년 이슬람 순니파 극단주의자 그룹인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고 여성들에게 ‘부르카’로 알려진 검은 옷을 입히면서 이슬람 여성의 문제가 ‘글로벌 이슈’로 부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르카’는 검은 베일에 갇혀 얼굴과 목소리와 몸짓을 잃고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가 지워져버린 이슬람 여성의 상징이 됐다.

 

이슬람은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인가? 그렇다면 그 억압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이슬람의 여성차별은 꾸란에 규정돼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무슬림들이 꾸란을 곡해하면서 나타난 현상인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가 될 것이다. 이슬람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는 물론 아니다. 이슬람 옹호론자들은 율리아처럼 “꾸란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며 꾸란에는 여성들에 대한 ‘배려’와 ‘보호’ 혹은 ‘재산권 인정’ 등을 규정한 내용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예언자 무하마드의 아내가 돈 많은 과부로서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는 점을 예로 들기도 한다(율리아의 글에도 등장하는 소재다). 어떤 이들은 여성들에게 베일을 씌우는 풍습 등 ‘이슬람의 여성차별’로 알려진 관행 상당수가 아랍인들의 유목생활에서 온 잔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유를 이슬람 교리 자체에서 찾든, 아니면 아랍의 부족문화 유산에서 찾든, 이슬람 여성들이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터키, 요르단 등지에서 자주 일어나는 ‘명예살인’은 대표적인 예다. 몇 해 전 파키스탄 동부 펀자브 주에서는 40대 남성이 4세부터 25세까지의 네 딸을 아내 앞에서 모두 흉기로 살해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유는 단 하나, 큰 딸이 바람을 피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프간 남부에서는 지금도 탈레반 추종세력들이 여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염산을 퍼붓는 테러를 가한다. 극단주의자들의 공격, 혹은 극단적·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슬람권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구조적인 범죄’들이다.

‘히자브’ 논쟁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권의 여성들이 쓰는 머리수건을 보통 ‘히자브’라고 부르지만 형태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얼굴까지 내놓는 검은 겉옷은 ‘아바’라고 부른다. 율리아의 글에 나오듯 인도네시아에서는 ‘질밥’이라 한다. 이란 문화권에서는 몸을 모두 덮고 얼굴만 내놓는, 혹은 얼굴까지 가리는 검은 겉옷은 보통 ‘차도르’라 불린다. 아프간의 ‘부르카’는 여성의 눈까지 모두 망사천으로 가려 밖을 제대로 볼 수도 없게 만든, 극단적인 형태의 차단막에 해당된다.

 

부르카든 질밥이든 개인이 원하면 쓸 수 있다. 유럽에서는 몇 년 전부터 히자브가 이슬람의 여성탄압을 상징하는 것이라 해서 ‘사회적 가치관에 위배된다’‘정-교 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공공장소 착용을 금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프랑스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무슬림 이민자들이 히자브를 마음대로 입을 권리를 달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민자 2세인 무슬림 여성들은 “우리가 원해서 히자브를 쓰고자 하는 것”이라며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고 싶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여러 언론들이 이를 다뤘지만, 논점은 대략 ‘이슬람의 여성탄압이 문제냐, 유럽 우월주의 잣대가 문제냐’ 하는 것으로 모였다. 서구가 이슬람을 대할 때 보여준 오만함에 반감을 느끼는 이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히자브 착용론’을 옹호하는 분위기까지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맹목적 반미론자들처럼 ‘미국의 적은 우리 편’으로 보거나, 대테러전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해서 이슬람의 억압적 기제들을 ‘문화적 다양성’으로 편들어주기만 할 수는 없다. 수억 명의 무슬림 여성이 자의로 머리수건을 쓴다 하더라도 히자브 혹은 차도르, 부르카, 질밥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살해 위협을 받거나 탄압받는 사람이 단 몇 명이라도 있다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존중한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슬람권의 여성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슬람이 서구의 지배적 종교인 기독교에 비해 ‘현대화’가 늦어졌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보다는 이슬람국가 내부의 사회경제적 모순 구조가 약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져 여성에 대한 린치와 테러가 일어나는 측면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자(혹은 국가/사회제도)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슬람 국가들은 대개 동성애자를 극형으로 처벌하고 있으며, 에이즈에 대해서도 “부도덕한 자들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라는 시각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과 여성, 이슬람과 마이너리티에 대한 주제는 어렵고 복잡하다.

이슬람의 여성차별·마이너리티 탄압과 인권침해는 뿌리 깊은 문제인 동시에, 비교적 최근에 두드러져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 역설은 최근의 ‘근본주의화’ 현상과 관련 있다. 

 

이집트, 이라크, 이란 등 이슬람권 주요 국가들은 아주 최근까지도 종교와 거리를 둔 세속주의 근대 국가였다. 독재와 분쟁 등의 문제는 있었을지언정,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 같은 극단적 이슬람주의로 인한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슬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지금도 여성이 운전을 할 수도, 사회생활을 할 수도 없는 국가이지만(여성 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정치적 자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 나라는 모든 국민을 억압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아랍-이슬람권 국가들은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뒤 그들 나름의 근대화 과정을 걸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근대화 과정은 정치,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극도로 왜곡됐다는 점에서 서방의 궤적과는 차이를 보였다. 이 지역의 독재는 냉전 구도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냉전 체제가 끝난 뒤 이슬람권의 변두리 격인 아프간에 탈레반 정권이 등장한 데에서 보이듯, 근본주의화 현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율리아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만 보더라도, 헌법상으로는 ‘이슬람 공화국’이 아닌 세속주의 국가여서 이슬람을 포함한 5개 종교를 공식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로 보면 세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다. 인도네시아는 좌파 민족주의에 경도됐던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 시절부터 1999년 쫓겨난 수하르토 독재정권 시절에 이르기까지 정-교 분리를 엄격히 지켰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슬람 세력의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다. 특히 9·11테러 이후 미국이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지에서 넘어온 이슬람 과격세력들의 활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2002년과 2005년의 발리 연쇄테러, 2003년 자카르타 JW매리어트 호텔 폭탄테러 등은 이 과정에서 벌어진 초대형 테러사건이었다.

극단주의가 민주화를 비집고 들어오는 현상은 인도네시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세속주의 독재 혹은 권위주의 통치에서 민주주의로 어렵사리 옮겨가고 있는 이라크, 이집트, 터키 등 이슬람권 여러 나라들이 모두 비슷한 진통을 겪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안정된 말레이시아에서도 이슬람주의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 2000년대의 현실이다.

 

이렇게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력이 커져가는 것을 가리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슬람권의 사우디아라비아화(化)’라 부르기도 했다. 현대화된 도시의 이슬람이 오히려 퇴조하고 사우디 오일달러에 힘입어 ‘사막의 이슬람’ 즉 전근대적이고 교조적, 극단적인 교리가 이슬람 문화권을 질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의 ‘밖’을 향한 공격을 상징하는 것이 9·11 테러였다면, ‘안’을 향한 공격은 주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 이슬람의 여성탄압은 전근대적인 종교·제도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탈냉전기 이슬람권의 사회변화와 연결된 ‘새로운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율리아 역시 인도네시아 사회가 ‘민주화’와 함께 어떤 왜곡을 겪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시민사회에 대한 공격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 이슬람권으로 퍼지고 있다. 이 점에서, 이슬람의 전근대성을 질타하는 미국과 서방도 근본주의화에 일단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답답함을 느꼈던 부분도 적지 않았다. ‘율리아의 지하드’라고 했지만, ‘왜곡된 이슬람에 맞서기 위한 한 여성학자의 성전(聖戰)’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온건하고 너무 모호한 게 아닌가 싶은 부분이 많았다. 율리아는 이슬람 사회를 비판한다면서도 극히 온건하고 부드러운, 에둘러가는 표현을 쓴다. 심지어 ‘이슬람’이라고 명시하는 대신 ‘종교’라는 말로 대신하며 피해가기도 한다. ‘이슬람 극단주의’라 쓰지 않고 ‘종교적 극단주의’ ‘종교적인 문제’ ‘종교적인 보수파’라 바꿔 부르는 식이다. 이런 것들이 좀 더 강력한 ‘내부로부터의 목소리’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율리아가 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율리아는 이슬람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가 극단세력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는 율리아 같은 여성 비판론자들, 여성 지식인들에 대한 테러가 수시로 일어난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율리아의 글에 나타난 이슬람 비판의 강도를 머리 속으로 조율해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이 책은 주로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에 대한 것이지 ‘이슬람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슬람권에도 여러 갈래가 있고 나라마다 독특한 문화가 있다. 인도네시아는 특히 열대의 섬들로 이뤄진 나라다. 사막의 유목문화에서 출발한 아랍 ‘본토’의 이슬람과 인도네시아 이슬람 문화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례로 라마단 끝 무렵 고향을 찾아가는 인도네시아의 르바란 문화는, 농경문화가 약하고 추석이 없는 아랍의 라마단 명절 풍습과는 다소 다르다. 

책의 전반부가 이슬람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글들이었다면, 뒷부분은 인도네시아의 근현대사가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수하르토 정권의 억압 메커니즘은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은 인도네시아인들의 일상생활을 지금도 구석구석 지배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독재정권의 그늘이 가시기는커녕 최근 들어 오히려 억압통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인도네시아에서 한 여성 지식인이 느끼는 참담함이 2부와 3부의 신랄한 글들로 묶여져 있다. 

 

스스로 서문에서 밝혔듯 율리아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상류층이다. 외교관 부모 밑에서 유럽을 돌며 자라났고,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 호주인 교수 남편을 둔 유명 칼럼니스트다. 그의 글에선 운전기사, 가사 도우미, 자신이 살고 있는 자카르타 교외의 고급 주택단지가 종종 등장한다. 자카르타 교외에는 별도의 경비인력을 둔 상류층 주택단지, 이른바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 들이 많이 형성돼 있다. 율리아는 인도네시아 사회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그의 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 의식이 엿보인다. 특히 자기 집에서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표현들이 국내 독자들에게는 다소 거북살스러울 수도 있겠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 훌륭한 인도네시아 안내서, 이슬람 안내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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