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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버락 오바마의 어린 시절

딸기21 2008. 3. 1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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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Dreams from My Father.
버락 오바마. 이경식 옮김. 랜덤하우스. 3/19



버락 오바마가 가진 ‘허상의 이미지’를 감안하더라도, 어쨌든 이제 오바마는 미국을 넘어서 전세계적으로 변화와 희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돼버린 것 같다. 


지난번 미국 출장에서 미국인들을 만나 가장 많이 얘기했던 소재가 바로 오바마였고, 그들(주로 젊은이들과 인텔리들)이 느끼는 열정과 흥분에 공감이 가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그런 감정이 들었더랬다. 오바마, 오바마. 이름이 생소해서 오사마 빈라덴과 헷갈린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던 오바마가, 이제는 오사마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 되고 있다.
 

아직까지 미국에서 오바마 지지율은 절반을 넘기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당내 경선에서도 힐러리 클린턴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일부분은 오바마에 그야말로 ‘버닝’한다. 케냐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 독일에서도, 일본에서도, 심지어 한국에서도. 


미국에 함께 갔던 이들 중 몇몇은 “나는 미국 유권자가 아니지만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말할 정도였고, 외신 뉴스에 관심이 없던 이들조차도 “오바마가 힐러리를 이기는 것이냐”라고 종종 물어올 정도로 이 캐릭터에는 관심을 보인다. ‘미드’보다 더 재미있는 민주당 경선 드라마에 나부터도 열광했던 것을 생각하면, 심지어 한국의 지난달 총선보다도 오바마 스토리를 더 궁금해 했던 것을 생각하면, 미국 선거에 대한 ‘동조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오바마라는 인물은 할리웃 파워나 맥도널드 파워보다도 더 확실하게 ‘미국적인 것’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조지 W 부시라는 인간에 신물 나고 열 받은 세상 사람들에게 오바마는 ‘미국인들의 자존심’ ‘미국의 자정 능력’ ‘미국인들도 몽땅 바보들인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도 부시를 싫어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존재인 것인가.


미국 내의 ‘오바마니아 현상’도 중요하긴 하지만 사실 미국인이 아닌 내게는 ‘미국 밖에서의 오바마 인기’가 더 관심이 가는 주제다. 오바마라는 존재는 단일패권시대, 깡패주의 시대에 ‘미국이면서도 미국이 아닌 것’을 상징해준다. 미국의 본류가 아닌 미국인, 그것도 ‘무슬림-검은 피부-아프리카’라는 가장 마이너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 그러니 오바마의 정책, 오바마의 능력 등을 얘기하는 것은 여기에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의 본질은 정책과 능력이 아닌 정체성 자체에서 오는 것이니 말이다. 


하버드대 로스클 출신이라는 것, ‘노예의 자손’이 아닌 아프리카 출신 유학생 아들이라는 것, 미국 내륙지방이 아닌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 같은 요인들은 오바마라는 인물에게 ‘글로벌한 정체성’까지 부여해준다. 미국의 이슬람 때리기, 제3세계 뜯어먹기, 제 멋대로 다 해먹기 등등에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부시를 때려줄 힘도 능력도 없는 세상 사람들이 오바마에게 희망을 거는 것은 당연하다.


이 책은 오바마가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쓴 것으로, 정치인이 되기 전, 하버드 로스쿨 내 잡지 편집장이 돼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무렵에 나온 것이다. 그래서 책에는 정치 이야기는 없다. 


‘담대한 희망’은 정치적 목적을 갖고 출간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오바마라는 인물이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진솔하고, 또 지루하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감동을 주지만 그다지 격렬하거나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전반부는 말 그대로 ‘어릴 적 이야기’이고, 후반부에는 시카고에서 흑인공동체 조직 활동을 하던 길지 않은 시기의 이야기들과 아프리카에서 대면한 자신의 ‘또다른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충분히 예상됐던 바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앞부분이다. 아프리카 출신 아버지(사생활 영 꽝인 개차반 아버지로 사료된다)와 순진하면서도 용감하다고 해야 할 엄마, 인종차별이 노골적으로 존재하던 시절에 태어난 검은 피부의 혼혈  아기. 엄마는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해 이주를 하고, 검은 아이는 아시아 국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하와이로 돌아간다. 시카고 생활 이전 그의 인생엔 ‘보통’이라거나 ‘평범하다’거나 ‘주류’에 해당되는 부분은 찾기 힘들다. 존재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내용은 없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스토리를 읽으면서 어린 소년의 슬픔과 외로움이 전해져 왔던 부분들이 있었다. 가족 중에 자신과 같은 인종의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대체 어떤 상황일까, 자신과 정체성을 공유할 사람이 가족 중에조차 없을 때는 대체 어떤 기분이 들까. 

“나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앞에 놓고 끙끙댔다. 허공에서 지구를 떠받치는 거북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왜 뱀이 그토록 큰 죄를 지어서 세상에 슬픔이 생기도록 만들었을까? 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까?” 

여섯 살 소년의 마음에 눈이 시큰해졌다. 곁들여, 책의 메시지와는 그저 작은 관계만 있을 뿐이지만, 오바마가 찾아갔던 ‘케냐의 풍경’들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었다.


아프리카에서든 뉴욕에서든 시카고에서든 하와이에서든, 자기랑 꼭 닮은 백인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곁에서든 나이로비의 친척들 사이에서든, ‘이방인’으로서의 감성을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 책은 오바마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들을 전해주지만, 그렇다고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오바마는 넬슨 만델라도 아니고 마틴 루터 킹도 아니다. 그는 아직 젊었고 아직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투쟁과 핍박 속에 성장한 인물도 아니다. 그러니 그의 스토리엔 한(恨)이나 눈물은 없다. 그저 고민과 성장통(그것이 ‘작다’고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만 있을 뿐이다. 오바마는 참 진지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대로 책은 재미는 있었다.
 


△ 2001년9월11일, 세상은 쪼개졌다. 내가 아는 사실은, 역사가 그날 복수의 광기를 등에 업고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역사는 죽지 않고 다만 묻힐 뿐이라는 포크너의 말 그대로다. 그것은 심지어 과거도 아니다. 이 총체적인 역사, 이 과거는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알카에다의 폭탄이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게 내 인생의 공간들인 나이로비와 발리, 맨해튼의 거리와 빌딩과 사람들에게 떨어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또 단지 내 이름이 9·11 이후 질투심 많은 공화당 앞잡이들의 홈페이지에서 온갖 조롱을 받기 때문만이 아니다. 근원적인 투쟁, 즉 풍족한 세상과 부족한 세상 사이의 투쟁, 현대적인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 사이의 투쟁, 넌더리가 날 정도로 널려 있는 온갖 다양성을 끌어안으면서도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소중한 가치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떤 기치나 구호 아래서든 확실성과 단순함을 추구하면서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대해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은, 바로 이 책에서 제시하는 투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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