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벨라위의 아이들.
나집 마흐푸즈. 이두선 옮김. 하서.
소설을 멀리 하게 된 것이 좀 오래된 일이다. 재작년 한차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사 모으면서 다시 한번 소설의 세계로 빠져봐야지 했었지만 이게 또 쉽지 않은 일이어서, 몇 권 읽으며 감동했다가는 정신적 부담에 지레 눌려 포기했다. 소설을 멀리 하게 된 것은 내가 순전히 지식축적용으로, 지극히 목적지향적으로 책을 읽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결국 난 소설이 주는 그 무게감이 겁이 났던 것 같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어떤 넌픽션보다도 심각한 무게감을 준다. 차라리 현실의 일들, 내 것이 아니라고 맘편히 여길 수 있는 일들을 보는 게 낫지, 인간의 보편성을 건드리는 소설들은 너무 무섭단 말이다.
‘게벨라위의 아이들’은 처음 읽어본 이집트 소설이다. 국내에는 아마도 별로 팬이 없겠지만 명색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올해 아흔넷이 된 나지브 마흐푸즈(이집트식으로 읽으면 나기브 마흐푸즈)는 아랍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이고 세계적인 문호이지만 역시나 이 나라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내에는 이 책이 두어 가지 버전으로 출간된 것 말고는 단행본이 번역돼 나온 것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1959년에 발표됐다는 이 소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인지 확실하게는 알 수 없는 사막 주변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게벨라위라는 선조에게서 나온 이 마을은 여러 작은 마을들로 나뉘어있다. 제목에서 보이듯 그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꾼의 이야기 등등이 꼬리를 문다.
첫 번째 ‘아드함’의 이야기를 읽을 때 나는 이것이 장 지오노의 ‘폴란드의 풍차’ 같은 비극인 줄 알았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 때문에 증오하고 살해하는 한 가계(家系)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게벨’의 이야기는 영웅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로 들렸다. 주어진 행복을 버리고 민중을 구하러 나선 사나이! 세 번째 ‘리파’의 이야기는 수도승 같은 한 사람의 비폭력 투쟁을 그린 또 하나의 영웅담이었다. 그 다음 ‘캇셈’에 이르면 영웅의 무기는 힘(게벨)에서 사랑(리파)으로, 다시 지혜(캇셈)로 변한다. 캇셈은 초인적인 영웅이 아닌, 현실적인 영웅이 되어 줄줄이 이어지는 게벨라위네 마을의 해피 엔딩을 예고할 것만 같았다. 마지막 ‘아라파’에 이르러 결국 작가는 이 순진한 독자의 바람을 무너뜨린다.
마흐푸즈는 이 소설로 198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작 신문에 한차례 연재됐던 이 소설은 이집트에서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못했다. 이슬람권 최고의 종교교육기관인 알 아즈하르 성원(聖院) 측이 이 책에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은, 세 영웅이 이슬람과 유대교, 기독교 3대 유일신교의 창시자들을 빗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과학기술과 종교의 갈등이라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간결한 묘사와 차분한 색조로 다루고 있다'는 다소 황당한 소개글이 붙어 있다)
그런데 그들 세 종교의 신자가 아닌 내 눈에 이 소설은 종교가 아닌 권력의 메타포로 읽혔다. 권위의 근원이 있고, 그 우산을 쓰고 억압하는 통치자가 있다. 통치자 밑에는 속물적인 수장들이 민중을 갈취한다. 억압과 폭력, 아첨과 거짓말, 음모와 배신. 통치자는 교활하고 수장들은 욕심 많고 민중들은 나약하다. 영웅이 주도하는 평등·평화의 시대는 짧고, 고난과 핍박의 시기는 길다. 영웅의 도래와 함께 꿈이 피어오를 만 하면 이내 그 꿈은 반복되는 억압의 역사에 밀려 산산이 쪼개진다.
공화국 출범 이래 지금까지 단 세 명의 국가원수만을 갖고 있는 나라 이집트. 독재는 반복된다. 이집트 사람들은 인간성들이 나쁘다. 사기 잘 치고 거짓말 잘 하고 관광객 등쳐먹기나 하고 역사유적조차 관리할 줄 모르고 정부는 썩었고 공무원들은 뇌물을 받고 남자들이 나서서 매춘을 한다. 교활한 독재자와 썩은 관리들, 썩은 세상에 순응해 살고 있는 나약한 국민들. 이 소설이 이런 현실에 대한 질타가 아니고 무엇이랴. 결국 모든 반란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채 여전히 빈곤과 억압 속에 죽어지내야 하는 게벨라위 사람들. 책은 오래전에 쓰인 것이지만 이집트 정치상황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처럼 보였다.
몇 달 전에 마흐푸즈가 이 책이 이집트에서 출간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아즈하르 성원 앞에 머리를 숙였다는 외신기사를 읽었다. 이집트의 지식인들은 양심의 보루로 존경받았던 마흐푸즈의 행동에 충격을 받고 비판들을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의 책을 자기네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늙은 작가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러니 소설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권력과 인간성에 대한 마흐푸즈의 통찰력이 어디 이집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 마을의 이야기는 힘과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영웅을 원하면서 추종적이고 비겁한 삶을 은근히 바라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며칠간 손에서 놓지를 못했고, 다 읽고난 지금도 마음이 사막을 붕붕 떠다니는 것 같다. 사막의 모래와 물담배 연기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것 같다. 이 책은 내게 또 하나의 ‘무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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