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땅, 보이지 않는 자들- 알려지지 않은 쿠르드족 이야기.
힐미 압바스. 조경수 옮김. 이매진. 5/29
이것은 신화인가? 쿠르드족으로 독일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압바스 왕가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어릴적부터 들어 알고 있던 쿠르드족의 신화를 독일어로 적었다. 이 책은 그 독일어본을 번역한 것인데, 이것이 진짜 쿠르드족의 신화인지, 아니면 힐미 압바스의 상상과 각색이 들어간 것인지, 혹은 쿠르드족의 이름을 내건 현대적인 SF 소설인지. 우울하고 원대하고 심오하고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이야기다. 어떤 부분에서는 SF 작가 아서 클라크의 절대 정신, 보편적 자아를 연상케 해서, 꼭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보는 것만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반지 제왕’의 최후의 전투를 보는 것처럼 장대한 느낌을 줬다. 아주아주 멋있고 신비스러운 이야기다.
쿠르드족 이야기라고 해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민족’이라는 ‘쿠르드’라는 이름 때문에 오히려 선입견을 가지고 책을 펼쳤던 것이 아닌가 싶다. 조로아스터처럼 선과악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이야기에, 인간과 신의 미묘하고 설명하기 힘든 관계, 너무 서양 것에 익숙해서 기독교적인 세계관만 듣다가 동서양 뒤섞인 것 같은 글을 읽자니 뇌세포들이 고생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태초에 아주 늙은 성스러운 아버지가 있었는데 빅뱅이 터져서 절대정신이 확장되어 우주라는 것이 생겨나고, 거기에 물질들이 결합하여 별들을 만들어내고 드디어 아미노산과 단백질이 합성하여 생명체가 생겨나고, 그 중에 제일 잘났다는 인간들이 나와서 신(神)이 있네 없네 하면서 싸우는데, 우주에는 여전히 우주배경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가 태초의 힘으로 편재해 있지만, 지구 환경은 차츰 파괴되고, 오만불손한 인간들은 어머니 대지를 침탈하고, 이성의 힘이 무엇보다 우세하다고 여기고, 이성 지상주의자가 되어 멸망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데 현인들은 사라지고 없으니 이 인과의 사슬을 어찌 끊을 수 있으리오.
과학과 신화를 뒤죽박죽 해놓은 것은 내가 아니라 쿠르드족이다. 유난히도 우주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현대 물리학을 공부한 이들이 옛날 이야기투로 글을 쓴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사점이 많다. 높은 지대에서 하늘과 가까이 살던 민족의 탁견인가? 만일 이 지구의 문명이 외계인의 암시와 가르침으로 고대 시절에 태어났다는 외계문명도래설이 사실이라면 쿠르드족의 신화는 그 분명한 증거가 될 것 같다.
내용은 묵시론적이어서 무섭기도 하고, 오래된 이야기를 읽을 때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그 통찰력이 무시무시해서 으스스해지기도 한다. 쿠르드의 신은 벌하지 않으시고 그저 바라볼 뿐이니 모든 책임이건 벌이건 인간들의 일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신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대홍수 이야기가 나오니 중근동의 다른 신화들과 비슷하고 아라라트산이라는 산이 나오는 걸로 봐서 노아의 대홍수에 나오는 아라랏 산을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한데, 공동체주의를 설파한다는 점에서는 유일신앙 이후의 종교적 신화와는 다르다. 오늘날의 쿠르드족은 대개 무슬림이지만 저자가 써놓은 이야기들은 유대교나 기독교나 이슬람 이전의 것이어서 색깔이 아주 다른 모양이다. 오히려 페르샤 이야기들하고 가깝다는 느낌. 고유명사에선 아리안-인도 쪽과의 교류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자들이 인간 이성 내지는 자유의지를 절대적으로 신봉한다는 점, 인간의 생식력이 곧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라는 것, 그런 것들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책이 너무 멋지고 심오해서, 모두 한번 베껴써보거나 ‘장자’처럼 오래오래 읽었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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