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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의 세계사 Plagues and Peoples (1998)
윌리엄 맥닐 (지은이) | 김우영 (옮긴이) | 이산 | 2005-09-30
아시아에서 시작된 조류독감 공포가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조류독감으로 740만명이 숨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예측을 내놓은 가운데, 얼마 전에는 1918년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스페인 독감'이 최근 발생한 아시아 조류독감과 매우 유사한 바이러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났다는 외신 보도가 뒤따랐다.
미국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스페인독감을 일으킨 바이러스는 조류에서 파생됐으며, 인체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유전자에 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드러났다. 조류-인체 감염에서 인체-인체 감염으로 변질되면서 이 바이러스는 막대한 인명피해(2000만~5000만)를 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아시아 조류독감도 비슷한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고 우려하고 있다.
사실 스페인독감과 유사한 신종 독감이 유행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미국 시카고대학의 윌리엄 맥닐 교수는 1975년 펴낸 `전염병의 세계사'에서 "인류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전염병으로는 1918~1919년 크게 유행했던 인플루엔자를 들 수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불안정성과 변종 출현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벌써 30년전에 스페인독감과 유사한 인플루엔자의 유행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나왔던 셈이다.
맥닐의 책 2권, `전염병의 세계사'와 `전쟁의 세계사'를 주문해놓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어떤 모양의, 어떤 느낌의 책일까 궁금해 두근두근, 책 주문해놓고 이렇게 기다려본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딴소리를 조금 더 하자면 이 두 권의 책이 들어있는 이산출판사의 `히스토리아 문디'라는 문고는 지금까지 내게 "몽땅 사버리자"라는 생각이 들게 한 유일한 문고판이다.
맥닐의 책이 국내에서 출간된 것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이 문고의 책 한권을 샀을 때 뒷날개에 시리즈 목록과 함께 맥닐의 책 2권에 `근간'이라는 표시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어찌나 반가웠던지!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읽으면서 그 바탕이 된 맥닐의 책을 읽지 못한 상태로 독서를 해야했던 것이 굉장히 아쉬웠고, 잭 웨더포드의 `야만과 문명'을 읽으며 그 아쉬움은 배가됐다. `전염병의 세계사'는 국내에서 이미 한 차례 출간됐었으나 이미 절판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읽고는 싶은데 구하지 못해 아쉬웠던 책이 `근간'으로 되어있을 때의 기다림을 아는 이들은 알리라.
`전염병의 세계사'를 주문해놓고 친구에게 자랑을 했다. 책 제목과 출간 연대(1970년대, 정확히 말하면 1975년), 책의 대략적인 내용을 얘기했더니 "재미없겠네"라는 한마디가 돌아왔다. 기다림과 설레임 끝에 책을 다 읽고난 지금 나의 소감은? "느무느무 재미있었음"이 되겠다...
책은 `전염병의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되어있지만 질병의 역사를 다룬 의학책을 생각하면 안 된다. 맥닐은 역사학자이지, 의사나 생리학자가 아니다. 깔끔하고 재미난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전염병이라는 것이 인류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분석한다. 일례로 그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이 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유럽 특유의 전염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은 면역력을 갖고 있었지만 원주민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질병이었던 여러 전염병들이 퍼지면서 원주민들은 백인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음은 물론 거의 전멸 상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지금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책에서 맥닐은 아메리카 대륙의 사례를 포함해, 인류 문명의 형성 과정에서부터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역학(疫學) 구조를 제시한다.
역사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창으로 전염병이라는 현상을 제안하면서 저자는 `기생'과 `질병'이라는 생물학적 개념을 중요한 도구로 사용한다. 현미경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인류는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거대 동물의 포식망만을 생각해왔지만 실제로 이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은 사자에게 잡아먹히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미생물, 우리가 `병원균'이라는 것들에 희생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포식관계에서 포식자는 기생충이 되고, 피식자는 숙주가 된다. 생명체 내부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이 싸움의 양상에서 숙주들이 집단적으로 치명타를 입는 경우를 우리는 전염병이라고 부른다.
맥닐은 질병과 기생이라는 개념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해서 `거시 기생'과 `미시 기생'이라는 개념을 내놓는다. 미시기생은 병원균이 인간을 뜯어먹는 것을 말하고, 거시기생은 인간이 인간을 뜯어먹는 경우를 말한다. `거시기생'이라는 용어에선 생물학 개념을 지나치게 인간사회로 확장한 듯한 감이 들기도 하지만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
인간은 주거지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자연, 낯선 병원균과 만나게 된다. 숙주와 병원균간의 싸움이 벌어진다. 초반에 병원균들은 면역력 없는 인간들을 공격, 치명타를 입히곤 한다(낯선 질병에 인간이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은 면역력이 없기 때문이다). 병원균 입장에서도 숙주를 모두 죽여서는 유전자를 증식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전염병은 치명성이 줄어들면서 만성질환이나 소아병 수준으로 `정착'하게 된다.
똑같은 구조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재연된다. 지배계급은 권력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피지배계급을 수탈한다. 하지만 피지배계급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면 계급의 재생산이 이뤄질 수 없다. 전통사회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리하여 왕은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 정도는 남겨주고, 나머지 즉 잉여생산물을 수탈해가는 수준으로 폭정을 완화, 나름의 태평성대를 구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치사를 굳이 `거시기생'이라는 말로 해석한 것은, 분석 틀을 통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미시기생과 거시기생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 문명의 전파와 정복전쟁에 동반된 전염병의 역사에 천착해온 맥닐은 전염병을 돌발적인 사건으로 보는 대신, 환경과 인간의 교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적응 과정의 일부로 파악한다. 전염병은 단순한 독감이 아니라 생활환경의 변화나 생태계 질서의 교란, 인구 증가 등이 총체적으로 맞물려 나타나는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다. 생활환경의 변화와 생태계 질서의 교란, 인구 증가 등 `문명의 발달'을 좌우하는 요인들은 거시기생의 시스템과 연결돼 있다.
책에서 저자는 누누이 "근거 자료는 희박하다"고 고백한다. 역사가들은 거시기생에 대해 엄청난 기록물들을 남겼지만 미시기생에 대한 기록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병원균이라는 것들에 대해 알게 된 것 자체가 인류 역사에서는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러니 맥닐은 근거 자료가 거의 없는 역사를 `추론'으로 메우고 있고, 사료를 해석하는 대신 시나리오를 `제안'하는 식으로 전염병의 세계사를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이모저모로 봤을 때 당시의 상황은 이러저러했을 수도 있었다'는 식의 `추론의 역사책'이고, 저자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맥닐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이는, 다시 말해 그럴듯한, 그러나 문헌-고고학상의 자료는 거의 없는 사안을 가지고 수천년 전의 상황을 상상하곤 한다. 증거 없는 추론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에 어떤 이들은 반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추론으로 가득 찬 이 역사책이 역사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매우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점이다. 전염병의,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의 역사는 대개 피지배층-약자의 역사와 겹친다. 또한 전염병의 역사를 통해 독자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라는 한 차원을 더 볼 수 있게 된다. 동서고금의 역사학자들이 모두 무시해왔던 영역을 걸음으로써 맥닐은 역사를 보는 또 다른 문을 열어놓는다.
첫머리에 얘기했던 조류독감으로 다시 시각을 돌려보자. 맥닐의 시각을 받아들인다면, 첨단을 자랑하는 21세기에 전염병이 여전히 지구촌을 공포에 떨게 하는, 얼핏 부조리해 보이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글로벌 시스템 속에서 급속히 퍼져나가는 조류독감의 이면에는 세계화된 경제체제 속에서 오히려 더 가난해져 가는 빈곤지역들의 열악한 보건현실이 숨어 있다.
인체에 조류독감을 일으키는 H5N1 바이러스는 치료약 개발에 맞춰 계속해서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류독감은 거대한 지구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무시하고 과학의 단기적인 성과들에만 눈이 멀었던 인류에게 던져진 경고장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스페인독감과 유사한 신종 독감이 유행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미국 시카고대학의 윌리엄 맥닐 교수는 1975년 펴낸 `전염병의 세계사'에서 "인류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전염병으로는 1918~1919년 크게 유행했던 인플루엔자를 들 수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불안정성과 변종 출현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벌써 30년전에 스페인독감과 유사한 인플루엔자의 유행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나왔던 셈이다.
맥닐의 책 2권, `전염병의 세계사'와 `전쟁의 세계사'를 주문해놓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어떤 모양의, 어떤 느낌의 책일까 궁금해 두근두근, 책 주문해놓고 이렇게 기다려본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딴소리를 조금 더 하자면 이 두 권의 책이 들어있는 이산출판사의 `히스토리아 문디'라는 문고는 지금까지 내게 "몽땅 사버리자"라는 생각이 들게 한 유일한 문고판이다.
맥닐의 책이 국내에서 출간된 것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이 문고의 책 한권을 샀을 때 뒷날개에 시리즈 목록과 함께 맥닐의 책 2권에 `근간'이라는 표시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어찌나 반가웠던지!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읽으면서 그 바탕이 된 맥닐의 책을 읽지 못한 상태로 독서를 해야했던 것이 굉장히 아쉬웠고, 잭 웨더포드의 `야만과 문명'을 읽으며 그 아쉬움은 배가됐다. `전염병의 세계사'는 국내에서 이미 한 차례 출간됐었으나 이미 절판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읽고는 싶은데 구하지 못해 아쉬웠던 책이 `근간'으로 되어있을 때의 기다림을 아는 이들은 알리라.
`전염병의 세계사'를 주문해놓고 친구에게 자랑을 했다. 책 제목과 출간 연대(1970년대, 정확히 말하면 1975년), 책의 대략적인 내용을 얘기했더니 "재미없겠네"라는 한마디가 돌아왔다. 기다림과 설레임 끝에 책을 다 읽고난 지금 나의 소감은? "느무느무 재미있었음"이 되겠다...
책은 `전염병의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되어있지만 질병의 역사를 다룬 의학책을 생각하면 안 된다. 맥닐은 역사학자이지, 의사나 생리학자가 아니다. 깔끔하고 재미난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전염병이라는 것이 인류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분석한다. 일례로 그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이 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유럽 특유의 전염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은 면역력을 갖고 있었지만 원주민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질병이었던 여러 전염병들이 퍼지면서 원주민들은 백인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음은 물론 거의 전멸 상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지금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책에서 맥닐은 아메리카 대륙의 사례를 포함해, 인류 문명의 형성 과정에서부터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역학(疫學) 구조를 제시한다.
역사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창으로 전염병이라는 현상을 제안하면서 저자는 `기생'과 `질병'이라는 생물학적 개념을 중요한 도구로 사용한다. 현미경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인류는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거대 동물의 포식망만을 생각해왔지만 실제로 이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은 사자에게 잡아먹히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미생물, 우리가 `병원균'이라는 것들에 희생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포식관계에서 포식자는 기생충이 되고, 피식자는 숙주가 된다. 생명체 내부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이 싸움의 양상에서 숙주들이 집단적으로 치명타를 입는 경우를 우리는 전염병이라고 부른다.
맥닐은 질병과 기생이라는 개념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해서 `거시 기생'과 `미시 기생'이라는 개념을 내놓는다. 미시기생은 병원균이 인간을 뜯어먹는 것을 말하고, 거시기생은 인간이 인간을 뜯어먹는 경우를 말한다. `거시기생'이라는 용어에선 생물학 개념을 지나치게 인간사회로 확장한 듯한 감이 들기도 하지만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
인간은 주거지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자연, 낯선 병원균과 만나게 된다. 숙주와 병원균간의 싸움이 벌어진다. 초반에 병원균들은 면역력 없는 인간들을 공격, 치명타를 입히곤 한다(낯선 질병에 인간이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은 면역력이 없기 때문이다). 병원균 입장에서도 숙주를 모두 죽여서는 유전자를 증식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전염병은 치명성이 줄어들면서 만성질환이나 소아병 수준으로 `정착'하게 된다.
똑같은 구조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재연된다. 지배계급은 권력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피지배계급을 수탈한다. 하지만 피지배계급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면 계급의 재생산이 이뤄질 수 없다. 전통사회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리하여 왕은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 정도는 남겨주고, 나머지 즉 잉여생산물을 수탈해가는 수준으로 폭정을 완화, 나름의 태평성대를 구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치사를 굳이 `거시기생'이라는 말로 해석한 것은, 분석 틀을 통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미시기생과 거시기생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 문명의 전파와 정복전쟁에 동반된 전염병의 역사에 천착해온 맥닐은 전염병을 돌발적인 사건으로 보는 대신, 환경과 인간의 교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적응 과정의 일부로 파악한다. 전염병은 단순한 독감이 아니라 생활환경의 변화나 생태계 질서의 교란, 인구 증가 등이 총체적으로 맞물려 나타나는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다. 생활환경의 변화와 생태계 질서의 교란, 인구 증가 등 `문명의 발달'을 좌우하는 요인들은 거시기생의 시스템과 연결돼 있다.
책에서 저자는 누누이 "근거 자료는 희박하다"고 고백한다. 역사가들은 거시기생에 대해 엄청난 기록물들을 남겼지만 미시기생에 대한 기록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병원균이라는 것들에 대해 알게 된 것 자체가 인류 역사에서는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러니 맥닐은 근거 자료가 거의 없는 역사를 `추론'으로 메우고 있고, 사료를 해석하는 대신 시나리오를 `제안'하는 식으로 전염병의 세계사를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이모저모로 봤을 때 당시의 상황은 이러저러했을 수도 있었다'는 식의 `추론의 역사책'이고, 저자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맥닐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이는, 다시 말해 그럴듯한, 그러나 문헌-고고학상의 자료는 거의 없는 사안을 가지고 수천년 전의 상황을 상상하곤 한다. 증거 없는 추론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에 어떤 이들은 반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추론으로 가득 찬 이 역사책이 역사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매우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점이다. 전염병의,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의 역사는 대개 피지배층-약자의 역사와 겹친다. 또한 전염병의 역사를 통해 독자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라는 한 차원을 더 볼 수 있게 된다. 동서고금의 역사학자들이 모두 무시해왔던 영역을 걸음으로써 맥닐은 역사를 보는 또 다른 문을 열어놓는다.
첫머리에 얘기했던 조류독감으로 다시 시각을 돌려보자. 맥닐의 시각을 받아들인다면, 첨단을 자랑하는 21세기에 전염병이 여전히 지구촌을 공포에 떨게 하는, 얼핏 부조리해 보이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글로벌 시스템 속에서 급속히 퍼져나가는 조류독감의 이면에는 세계화된 경제체제 속에서 오히려 더 가난해져 가는 빈곤지역들의 열악한 보건현실이 숨어 있다.
인체에 조류독감을 일으키는 H5N1 바이러스는 치료약 개발에 맞춰 계속해서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류독감은 거대한 지구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무시하고 과학의 단기적인 성과들에만 눈이 멀었던 인류에게 던져진 경고장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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