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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자와 히로후미, '사회적 공통자본'

딸기21 2011. 9. 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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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공통자본 
우자와 히로후미 (지은이) | 이병천 (옮긴이) | 필맥 | 2008-10-01


읽고 나서 가슴이 뿌듯해지는, 일본 노학자들 특유의 고졸하면서도 치열한 삶이 담겨 있는 그런 책. 후지따 쇼오조오(흙흙 이분 2003년 돌아가셨다는 걸 최근에야 알고 혼자 뒤늦게 섭섭해했다)도 그렇고, 니시카와 나가오도 그렇고, 우자와 히로후미도 그렇다.

우자와라는 분은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일본의 노학자다. 이 책은 소스타인 베블런에게서 시작된 제도주의 경제학이 신자유주의에 질식당할 처지가 된 오늘날의 세계(이 책에선 주로 일본)에 던져주는 시사점들을 짚어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각설하면 자유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생각은 틀렸고,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자연스레 넘어갈 거라는 낙관론도 틀렸고... 암튼 제도주의 경제학은 이쯤 해두고 넘어가자.

우자와 선생은 흔히들 '제도'라고 부르는 것들을 '사회적 공통자본'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회적 공통자본은 "한 나라 또는 특정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이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개하며, 인간적으로 매력 있는 사회를 지속적,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장치"를 의미한다. 흔히들 쓰는 '인프라'라는 말이나 '제도'라는 용어보다 훨씬 포괄적인 범주다. 사회적 공통자본 안에는 교육/의료제도 같은 제도와 교통망, 전력, 에너지 등의 인프라, 심지어 한 사회(공동체)가 속해 있는 (자연)환경까지도 포함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책은 일본의 농촌과 도시, 학교교육, 의료, 금융제도, 지구환경이 사회적 공통자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너무나 망가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유는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추동되는 세계화,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자본주의 본래의 속성 때문이다.

너무 큰 이야기들을 너무 짧고 쪼개진 글들 안에 넣어놨다. 케인스, 베블런, 뮈르달 등의 경제학 얘기가 나오다가 신탁(트러스트)과 공유지의 비극 문제 등 구체적인 내용들로 넘어가고, 대학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단상에다 도시-농촌 문제 같은 것들까지 전후좌우로 넘나든다. 그래서 정교한 체계를 이 책 안에서 모두 읽기는 힘들지만, 던져주는 내용들이 분명한데다가 '작지만 구체적인' 얘기들과 인생 살면서 느꼈던 솔직한 감상이 섞여 있어 오히려 재미있었다.

책의 큰 줄거리에선 좀 벗어나 있는 것이지만,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부분 한 토막. 현대 도시의 기본 발상이 되다시피 한 르 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가 아닌 '사람 살기 좋은 도시'에 대한 연구와 관련된 부분. 미국 학자 제인 제이콥스가 쓴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라는 책의 내용을 저자가 인용해놨다. 제이콥스는 이 책에서 죽어가는 거대도시들을 매력있는 도시로 되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이 필요한지를 조사해 4가지로 정리했다고 한다. 이 기준들은 어떤 원칙에서 연역돼 나온 게 아니라, 그나마 미국에서 살만한 도시들을 조사해보니 이러저러 하더라는 걸 귀납적으로 정리한 것들이라고.

"그 첫번째 원칙은 가로(街路)의 폭은 되도록 좁고 굽어있으며 한 블록의 길이가 짧은 편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두번째 원칙은 도시를 재개발할 때 오래된 건물이 가능한 한 많이 남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원칙은 도시의 다양성에 관한 것으로, 도시의 각 지구는 반드시 두 개 이상의 기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번째 원칙은 도시는 각 지구의 인구밀도가 충분히 높아지도록 계획돼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인간적인 매력을 갖춘 도시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걷는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져야 한다. 제이콥스적인 가로는 노폭이 넓지 않고 굽어있으며 블록 하나하나의 길이가 짧다. 십자(十)형 교차로 대신 T자형 도로구조를 기본으로 하고 육교는 원칙적으로 놓지 않는 방식으로 도시가 설계돼야 한다."


요는, 사람들이 걷기 좋아야 한다는 것. 이 책 읽고 일본에 들러보니 도쿄와 서울의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도쿄만 해도 빌딩(아파트 포함)보다 주택이 많고 서울에 비하면 사람과 자전거가 그래도 대접을 받는다. 골목이 사라진 서울에서 근래 보기 드물어진 T자형 도로가 일본 주택가에 얼마나 많은지 느꼈다. 뭐가 다르냐고? 다른 차이는 아직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T자형은 훨씬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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