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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버나드 루이스, '중동의 역사'

딸기21 2001. 6. 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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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버나드 루이스. 이희수 옮김. 
까치글방. 


 

서론

▲ 의복의 근대화: 군복→술탄→궁성으로. 모자는 마지막 보루. 지금도 여성의 복장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케피야 kefiya : 부족이나 지역을 나타내는 독특한 디자인과 색깔의 전통적인 머리덮개)
▲ 커피는 에티오피아→남부 아라비아→이집트, 시리아, 터키로. 이미 16세기에 카페가 생겨 카페사회가 형성됐다.
▲ 고대 언어는 대부분 소멸되거나 종교용어로만 잔존. 다만 히브리어는 종교언어로 보존되다가 정치적인 언어로 부활, 지금은 이스라엘의 일상용어가 된 이례적인 경우. 터키에서는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어의 아랍식 표기를 폐지, 라틴어 표기로 대체.
▲ 전통사회에서 통치자가 대중에게 뜻을 전달하는 방식은 ① 주화 발행 ② 모스크에서 금요설교.
▲ 신문은 17세기에 출현. 중동의 신문 도입은 프랑스 혁명의 결과였지만, 주요 형태는 공식적인 정부지로 정착. "신문의 목적은 국민에게 정부의 뜻을 알리는 것"이라는 개념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중동 사회에서 전례가 없던 새로운 직업인으로서 '언론인'이 중요성을 획득.
이란 혁명은 세계 최초의 전자장비에 의한 혁명- 문맹률이 높은 지역에서 라디오나 TV같은 '말하는 매체'는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란혁명 때에도 호메이니의 육성이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돼 배포됐고, 그의 지시가 전화로 전달됐음.
▲ 연극과 달리 영화는 크게 성공. 1897년 무성영화가 이집트에 들어갔고 1927년 이집트 최초의 영화 생산. 현재 이집트의 영화산업은 미국과 인도에 이어 세계 3위 규모. 그러나 서양 고전음악은 극히 제한돼 있다. 
▲ 서구의 유혹- 호메이니는 미국을 '거대한 사탄'이라고 규정. 정확한 표현. 사탄은 제국주의자가 아니라 유혹자이며, 정복하지 않고 부추긴다. 중동의 '투쟁'의 결과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제 1부 고대문화

1. 기독교 발생 이전의 중동


▲ 이집트 문명: 고대 상형문자와 민용문자->기독교 초기 콥트어로 대체, 기독교적 정체성 획득.
▲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문명: 아람 나하라임(Aram Naharayim; 두 강의 아람). 지배적인 언어는 셈어, 그 중 아카드어계와 가나안어계가 대표적. 이들은 후에 아람어로 대체. 아랍어는 중동지역에 나타난 마지막 언어. 기독교 시대 초기에는 아라비아반도 중북부에 한정.
▲ 초기 기독교 시대의 '동방': 해가 뜨는 곳, 'Orient'(라틴어), 'Levant'(이탈리아어)와 같은 의미의 'Anatolia' 
▲ 페르시아는 현지 이름으로는 '이란'. '페르시아'는 언어의 이름. 이란 고원에는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이 거주.
▲ 조로아스터교: BC 6-5세기. 선과 악, 신과 악마 사이의 우주적 투쟁. 제국 단위의 정통성을 지닌 최초의 종교.
조로아스터 이단 일부 후에 이슬람의 진출에 맞서 이란에서 종교적 저항을 시도. 미트라교, 마니교, 마즈다크교 등. 마즈다크교는 특히 일종의 종교적 공산주의를 확립, 후일 이슬람 쉬아파 운동의 자극제가 되기도.
▲ 유대-페르시아의 연계" 키루스와 유대인들의 후원-충성 관계.
▲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장(BC 4세기)과 아르사케스의 반란, 파르티아의 건국.
▲ 로마의 예루살렘 점령, 팔레스타인으로 명명.

2. 이슬람 이전의 중동: 기독교 시대의 종말

▲ AD 1-6세기의 역사적 중요성: 기독교의 발생과 전파, 기독교 이전 종교의 소멸 혹은 침잠
① 로마의 기독교화 ②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 ③ 중동의 그리스화 ④ 중앙 통제 경제의 점진적 성장
이 기간 이란제국의 두 가지 주요 국면: 파르티아와 사산왕조
▲ (동)로마와 페르시아 간 대립의 원인: 동서무역로 확보 說
양 제국의 고전적 제국정책은 정복 대신 부족민을 설득, 우호를 확보하는 것. 로마의 경우는 아라비아 접경의 페트라와 팔미라 등을 확보. 그러나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팽창정책으로 제국 간 충돌 시작, 그 사이의 파르티아를 긴장시킴. 
로마의 팔미라 합병에 이어 이번에는 페르시아에 중앙집권적인 사산조가 등장, 접경 공국들을 합병하기 시작. 
▲ 아라비아의 퇴조: 원인 중 하나는 양 제국간 경쟁과 관심이 사라진 것. 그 결과 아라비아는 문화적, 경제적 고립 속에 생활과 문화수준 하락(Jahiliyya; 무지의 시대, 이슬람 시대인 '여명의 시대'에 대비되는 개념).
▲ 6세기.
① 페르시아-비잔틴의 재격돌과 전쟁의 재게. 비잔틴의 정책은 페르시아의 군사력이 미치지 않는 대체로를 확보하는 것.
그 결과 비잔틴과 중앙아시아 스텝의 Khan 간에 협상이 이뤄짐. 
② 시나이 반도 남단에 Yotabe라는 도서국가가 잠시 역사무대에 재등장. 또 수세기만에 처음으로 아라비아 남서쪽 끝에 유대 군주국(힘야르 족의 개종)이 탄생. 이들은 친페르시아-반비잔틴 표방. 
③ 552년 네스토리우스파 승려들이 중국에서 누에알을 밀반출, 중국의 비단 독점시대가 깨짐. 
④ 6세기는 두 경쟁자 모두의 위축 혹은 약화로 마감. 아랍인들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원시적인 우상숭배가 아닌 보다 나은 이념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 

제 2부 이슬람의 태동과 성장

1. 기원


▲ 꾸란: '읽기'와 '낭송'. 
메카는 대상로를 따라 발전한 도시. 무함마드는 메카 기득권층의 박해에 밀려 622년 메카 북쪽의 오아시스 도시인 야스리브로 이주(Hijra=Hejira). 야스리브는 이후 Al-Madina('도시')로 불리게 됐고, 초기 추종자들의 공동체는 Umma. 
▲ 승리한 예언자: 무함마드는 8년간의 투쟁 끝에 메카를 점령. 움마는 국가가 됐고 제국으로 발전. 승리한 예언자 무함마드는 마지막 예언자, 즉 예언자의 봉인. 그의 죽음으로 인류를 위해 신이 의도한 계시는 충족됐다. 그 이후로 어떤 예언자나 더 이상의 계시도 없게 된다. 초기의 Khalifa는 후계자와 대리자의 개념을 모두 포함. Khalifat Allah-하나님의 대리인.
▲ 이슬람의 확장: 불과 1세기 만에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과 동쪽의 페르시아인들까지, 관용적인 지배자를 수용. 아랍의 세금은 무슬림은 물론, 일반 주민에게도 비잔틴 치하에 비하면 훨씬 가벼운 것이었음. 아랍군의 사령관들은 메카나 메디나의 오아시스 출신 도시민이었지만 아랍군의 주축은 사막출신들(사막의 힘).
▲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라"(꾸란). 피정복민들은 개종 거부시 감세혜택을 포기해야했지만 개종을 강요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반에는 아랍-비아랍 통혼을 경계. 아랍제국의 진정한 기적은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피정복민들의 아랍화와 이슬람화.
▲ 이슬람 초기의 사회적 변화: 아랍 정복자들의 추진력의 배경은 인구초과로 인한 압박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정복자들은 엄청난 부를 쌓았음. 새 정권과 옛 기득권층간의 투쟁은 서부(과거의 비잔틴)보다 동부(과거의 페르시아)에서 훨씬 가열했다. 비잔틴은 이미 도시화했고 귀족들은 본토로 도주. 그러나 덜 도시화된 페르시아 땅에서 무슬림 도시들의 급격한 성장은 긴장과 투쟁을 부름.
▲ 환율: 아랍제국에서 상당기간 비잔틴 금화와 페르시아 은화가 통용됐기 때문에 두 통화간 환율이 중요한 문제. 환전상들이 시장의 큰손으로 등장. 
▲ 초대 4칼리프(Rashidun; 바르게 인도된 자들) 시대: 순니파 무슬림들이 부르는 '황금기'
① 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
②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 이슬람제국의 기반을 닦은 시기.
③ 오스만의 즉위와 알리 추종자들의 내전(shiatu ali; 알리의 추종자들. 후일의 쉬아)
④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의 등극과 우마이야 칼리프조: 종교적 권위 상실을 만회하기 위한 '아랍의 지배'
▲ 카르발라의 대참사: 680년 알리의 아들이고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이 이라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몰살당함. 쉬아파는 이로 인해 박해의 기억을 각인하게 되고 이후 종교적, 정치적 차이를 키워가게 됨.
▲ 기독교와의 싸움: 히즈라 72(691-692)년 예루살렘의 성소에 '바위의 돔'과 알아크사 모스크 건립. 이슬람 최초의 복합 종교건축물. 새 시대의 표상. 이슬람은 단순한 기독교의 계승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종교임을 알리는 상징.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영원하사, 낳지도 낳아지지도 않으셨다"(꾸란). 이슬람은 제3의 성서가 아닌, 새로운 경전을 제시.
▲ 이슬람과 '평등': 이슬람에는 어떤 형태의 신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신앙인과 비신앙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의 차별은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임. 그러나 이슬람에서 노예는 재물이 아니라 법적, 도덕적 지위가 인정되는 인간이었고, 여성은 일부다처제와 축첩제에 종속은 되어 있을지언정 근대까지 서구에 못지 않은 재산권을 인정받음.

2. 압바스 칼리프조

▲ 747년 동부 이란 호라산 지방의 반란: 우마이야조의 차별에 반발, 압바스 칼리프조로 대체하는 혁명으로 발전. 아랍대 이란의 단순구도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아랍인들이 권력의 열매에 대한 '독점권'을 상실한 것은 사실. 
▲ 압바스 왕조
초대 칼리프 알-사파는 해방된 아랍여인의 자식. 그의 후계자들과 대부분의 후대 무슬림 군주는 왕족, 귀족 아버지와 무명 혹은 외국인 여자노예 출신 어머니 사이의 자식.
▲ 천도: 시리아에서 고대 중동의 무게중심이었던 이라크로 천도. 새 수도의 공식 이름은 Medinat al-Salam(평화의 도시)이었지만 바그다드로 통칭. 제국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한 것은 아랍의 부족적 전통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 약화돼가는 아랍의 종족적 결속을 보완하기 위해 칼리프는 이슬람의 정체성을 강조, 정기적인 메디나 순례를 조직. 
▲ 이란 르네상스: 9세기부터 타히르 왕조, 사파르 왕조, 부이 왕조 등이 이어지면서 아랍 이슬람에 이란 문화를 불어넣음. 
▲ 쉬아: 알리와 파티마의 후손들을 Imam으로. 그러나 6대 이맘 사후 무사와 이스마일 파로 양분.
① 12이맘파: 무사 추종그룹. 순니파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온건주의.
② 이스마일파: 극단적인 교리와 폭력주의.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예멘에서 세력 구축에 성공. 
▲ 파티마 왕조와 이집트의 번영
이스마일파의 우바이달라는 파티마의 후손이라며 파티마 왕조를 개창. 10세기 중반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 세력권을 형성, 카이로를 수도로 삼음. 11세기에는 바그다드의 순니파 칼리프를 능가할 만큼 세력 확대. 칼리프는 절대군주로서, 과오를 범하지 않으며 세습되는 자. 종교적으로는 막강한 최고종교지도자 아래 다단계의 선교사 연계망이 있어 고등교육과 교리선전을 수행, 오늘날의 일당제 국가의 지배정당과 비슷한 구조. 파티마 왕조 하의 이집트는 경제적으로 대번영. 그러나 이스마일파와 12이맘파간의 충돌로 인한 쉬아 내부의 에너지 쇠진 등으로 끝내 압바스를 이기지 못하고 소멸.

3. 스텝부족의 등장

▲ 11세기부터 이슬람 사회는 내적 약화의 길로. 앞서 8-10세기에 문화적으로는 거대한 지적 확산(이슬람의 르네상스)이 이뤄졌지만 영향은 도시 계층에 국한됐음. 11세기에는 중국, 발트해 연안국들과의 무역 축소로 경제적으로도 쇠락의 길로.
▲ 非이슬람권으로부터의 공격: 11세기와 12세기 초에 유럽의 십자군이 시칠리아와 스페인을 공격. 베르베르족이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에 독립 제국 선포. 베두인 부족 힐랄과 술라임이 상이집트를 석권, 북아프리카 일대를 휩쓸며 대파괴.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시아 대초원 알타이어족인 터키(투르크)인들의 침략. 
▲ Mamluk와 터키의 신앙화: 원래는 터키인 노예들. 그러나 점점 아랍의 군부를 이들이 채우면서 아예 맘루크들이 지배계급으로 등장. 960년에는 이슬람권 외부의 투르크 왕조인 카라한 왕조가 이슬람으로 개종.
터키식 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새 종교에 대한 완전한 복종. 고대 페르시아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란이나 아라비아 영웅시대를 그리는 아랍인들과 달리 이들은 민족성 전체를 이슬람에 묻어버렸다. 이슬람 이전의 터키의 문명, 국가, 종교, 문화는 잊혀졌다. 터키인 자신에게나 서구인에게나 '터키=이슬람'. 이슬람에 대한 충성심이나 진지함에서 터키인들은 다른 어떤 민족과도 견줄 수 없었다.
▲ 터키 민족의 대이주와 셀주크 시대
11세기 초 유라시아에서 러시아를 지나 이슬람 영토로. 가장 중요한 것은 셀주크 가문의 이주.
셀주크의 손자인 투그룰과 차그리가 지휘하는 터키 군대는 호라산에 들어가 가즈나 왕조(맘루크가 세운 이슬람 왕조)를 멸하고 주요 도시를 차지. 셀주크의 정복으로 압바스조 이래 처음으로 하나의 권위 아래 중동이 통합됨. 
셀주크는 순니파. 명목상 통치자로 칼리프를 인정했지만 사실상 제국의 주권은 군소국들을 소탕하고 비잔틴과 파티마 왕조를 패퇴시킨 셀주크의 대술탄에게. 
▲ Sultan: 1055년 바그다드 정복 이후 투그룰이 채택한 칭호. 이전에도 부이 혹은 가즈나왕조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기는 했지만 셀주크 때에 이르러 절대권력자를 지칭하는 말이 됨. 
▲ 십자군의 침입: 약화와 불화의 시기인 11세기 말 십자군이 레반트에 도착. 십자군이나, 내륙에서 반격을 준비하던 이슬람에나 당면과제는 파티마 붕괴 후 비틀거리던 이집트의 통제. 유럽인들이 '살라딘'이라 부르는 쿠르드 장교 살라흐 알 딘이 이집트에 파견돼 파티마의 총리(와지르)이자 대술탄 누르알딘의 대리인으로 봉직하면서 후일 파티마를 아예 멸하고 압바스 칼리프의 명목상 지위를 회복. 살라딘은 1174년 누르 알 딘이 죽자 무슬림 시리아를 차지하면서 사실상의 군주로. 12세기 말까지는 십자군을 축출했지만 살라딘 사후 후계자들의 내분에 따라 영토는 군소국가로 분할.
▲ 터키 군주국: 셀주크 부족민들의 이주에 따라 아나톨리아가 점령됨. 셀주크 왕자 슐레이만 이븐 쿠틀루무쉬가 파견된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강력한 터키 군주국을 건설. 
▲ Assassins: 제국 동부에서 터키계 군벌의 등장과 부재 영주들의 출현으로 사회적 불만이 쌓이자 이스마일파의 급진 개혁운동이 힘을 얻음. 페르시아의 이스마일파 일부는 11세기 말 등극한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를 부정하고 카이로와 연계, 급진 투쟁 시작. 이 분파를 이끌던 하산-이 사바흐는 북부 페르시아의 알라무트 산 요새에 둥지를 틀고 광신적인 암살단을 구성.
▲ 순니파의 부활: 11세기 초 호라산에서 시작. 호라산은 쉬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주요 지역. 부활의 목적은
① 쉬아 정권을 타도하고 칼리프조를 회복하는 것
② 쉬아의 이념적 도전에 맞서 순니의 교리를 공식화하고 확산시키는 것
③ 종교 조직을 이슬람의 정치생활에 통합하는 것
순니파의 투쟁은 성공했다. 11세기 초 순니 성직자와 율법학자들은 호라산을 기점으로 madrasa라 불리는 신학교를 조직. 쉬아의 두 분파가 모두 부이 왕조와 파티마 왕조의 약화와 실정 속에 신뢰가 떨어진 시기, 교리에서도 순니가 쉬아를 압도. 쉬아는 소수로 전락하고, 대다수 쉬아는 수피즘으로 전환.
▲ 칭기즈 칸의 침략: 1218년까지 동북아를 장악한 칭기즈 칸은 관심을 서쪽으로 돌림. 그의 후계자인 몽골인들은 1240년까지 서부 이란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공략. 아나톨리아의 셀주크군도 제압. 알라무트의 암살단가지 섬멸하고 1258년 바그다드에 집결, 압바스 조를 멸망시킴.
▲ 칼리프제의 와해: 이름만 남아있던 칼리프는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이슬람국가에서 술탄제가 공인을 받게 됨. 그러나 지금은 이슬람이 몽골 침략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복원 안 될 정도의 파괴를 입지는 않았다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음. 아랍문화의 중심 이집트는 몽골에 점령되지 않고 간접 영향을 받았을 뿐. 실제 공격을 받았던 이란에서도 회복은 빠르게 진행됐다. 몽골 정복자들은 이란의 정치안정을 도모하고, 도시와 산업, 무역 재건을 후원. 1295년에는 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중동과 동아시아의 문명을 통합.
▲ 이란과 이라크의 엇갈린 운명: 몽골 침입 후 이란에서는 질서와 번영이 회복되고 새 정권이 자리를 잡았지만,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바그다드는 방치돼 이후 수세기 동안 침체와 무관심에 빠져듦.
▲ 칼리프조 이후 중동의 문화권
①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한 북쪽의 페르시아 문화권
② 아나톨리아와 그 영향하의 유럽을 포함한 서쪽의 오스만 문화권
③ 중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이슬람제국
④ 이란권 남부 고대 아랍어 사용 문명권. 이라크 남서부와 아프리카로 연결되는 이집트 일대.
문화적 다양성이 늘고 특히 ①, ② 두 문화권 사이의 구분이 명료해짐.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터키인과 몽골인이 어느 곳에서건 지배적. 두 문화권을 통합해주는 것은 신비주의와 정통주의(순니파)를 절충한 새로운 형태의 수피즘. 13세기 이래 대중의 종교생활에서 표현된 특성은 수피교도 형제애.

4. 몽골 침입 이후의 변화: 티무르와 오스만제국의 등장

▲ 몽골 한국들은 중동을 장악한 뒤 중동 정치에 간여. 당시 권력의 중심은 이란. 이란의 몽골왕조(일한조)는 조용하고 평화적으로 통치됐다. 일한조는 개종 전은 물론, 개종 후에도 타종교에 관용적. 그러나 14세기 이란은 맘루크 치하의 이집트와 충돌하기 시작. 
▲ 절름발이(Tamerlane) 티무르: 14세기 말 이란 장악, 인도 습격, 이라크 병합, 시리아 점령, 15세기 초 아나톨리아 침공, 오스만제국을 패퇴시키고 중국 공략 준비 도중 사망. 파괴적인 정복자. 그의 사후 제국은 분열됐지만 페르시아와 동부 터키에서는 티무르 왕조가 이어짐.
▲ 이집트의 상황: 교역의 중심인 지중해에서 머리 떨어져 있는 이라크 대신 이집트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무역로를 개발하고 나일강을 이용한 관개를 개선하기 위해 단일화된 중앙정부가 요구됨. 이집트는 중동에서 십자군 축출을 위한 재정복전쟁의 기반이 되기도. 13세기 살라딘이 건국한 아유브 술탄조는 쇠락해지고 이후 실질적인 권력은 터키 맘루크들의 수중에. 13세기 후반의 맘루크 장군 바이바르스에서 시작된 맘루크조는 민간과 군대라는 고도로 정비된 이원 행정체제. 맘루크조는 15세기 초 티무르의 약탈, 뒤이은 베두인족의 약탈로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정치적, 군사적 타격을 입음.
▲ 오스만의 등장: 한편 아나톨리아의 중동부가 이슬람 문명에 편입. 몽골 침략의 충격으로 이 지역의 셀주크조는 14세기 초에 사라지고 비잔틴에 대항한 새로운 정복의 물결이. 서부 아나톨리아 전체에 터키와 무슬림 통치가 확대됨.
14세기 말 투르크 통치자 오스만의 등장. 발칸의 대부분을 공략,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까지 장악. 
▲ 오스만의 4대 술탄 바예지드 1세는 칼리프에게 자신을 '룸 술탄'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 아나톨리아가 중동 이슬람 제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선 것. 그러나 15세기 초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참패한 뒤 그가 자살함으로써 오스만의 영토는 다시 축소됨. 
▲ devshirme: 14세기 말부터 시작된 징집제도. 기독교 소년들을 징집, 오스만 군대와 국가기관에 충원하는 제도. 오스만 국가에서 이슬람 종교제도는 원숙기에 다다랐고, 성법(이슬람법)의 최고단계로 인정된 최고 종교지도자의 통수권 아래 지방 재판관과 직업 종교인들의 서열화된 성직계층이 존재. 
▲ 동로마제국의 멸망: 1453년 술탄 메흐메드 2세 때 술탄의 호위병인 예니체리 병사들이 콘스탄티노플 공격,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전사, Hagia Sophia(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인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사원)에는 초승달이 걸렸다!

5. 오스만제국의 위용

▲ 콘스탄티노풀 점령: Fatih(정복자) 메흐메드2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이슬람과 변경의 두 전통을 이었다. 오스만 술탄조는 동로마 점령을 통해 이슬람 세계 내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잡았다. 
▲ 맘루크의 쇠퇴: 13세기 중반 이래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맘루크 술탄조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티무르의 파괴와 동시에, 포르투갈의 동방진출로 인해 교역로 독점의 이익이 없어졌다. 결정적으로, 오스만 술탄과의 우호적이던 관계가 15세기 후반부터 틀어지기 시작. 핵심 변수는 오스만의 대포와 소총 등 새로운 화기.
▲ 중동의 패권을 둘러싼 술탄과 샤의 전쟁: 이란의 사파비 왕조는 급진 쉬아파 운동을 통해 집권. 오스만 술탄과 사파비 왕조의 샤 사이는 관용의 한게를 넘어 서로 이단자, 찬탈자로 간주하는 사이. 1511년 오스만의 Yavuz Selim(야우즈 셀림; 냉혹한 셀림)으로 알려진 셀림 1세가 즉위, 이란의 샤 이스마일과 전면전. 오스만은 승리를 했지만 더 이상 동진하지 않고 샤 통치하의 이란을 내버려둔채 철수. 이 과정에서 터키 쉬아와 이란 순니에 대한 각각의 탄압이 있었고, 증오와 공포가 확산됨. 
▲ 슐레이만: 페르시아를 약화시키고 맘루크를 정복한 오스만은 16세기 위대한 술탄 슐례이만의 시대를 맞아 유럽과의 지하드에 나섰다. 그러나 16세기는 터키의 밀물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썰물로 바뀌는 시기이기도 했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참패. 이슬람의 해군력은 유럽에 비해 약화되어 가고 있었으며, 동쪽의 페르시아와 계속 경쟁하느라 국력을 소진.
▲ 이란은 샤 이스마일에 이은 샤 압바스 등 훌륭한 왕들이 나왔다. 이들은 군대를 총포 등 신무기로 무장시키고 오스만을 좇아 보병과 포병을 조직, 근대적 군 체제를 갖춤. 샤 압바스의 통치기는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 그러나 그의 사후 왕조는 급속히 쇠퇴.
▲ 러시아의 진출과 서구 세력의 확대, 이슬람과 서구 간에 경제격차가 벌어짐. 

제 3부 중동 사회와 문화

1. 국가


▲ 기독교도들과는 달리, 무함마드의 후예들은 '신과 카이사르'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지 않아도 되었다. 예언자의 후계자들은 신정 일치의 체제를 구축. 기독교 제국과는 달리 황제권과 성직권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고, 교회와 같은 별도의 성직기구도 없었다. 칼리프제는 종교적 기구였고, 칼리프의 최고 임무는 예언자의 유지를 받들고 성법(聖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칼리프를 부르는 호칭 중 'imam'은 무슬림의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
▲ 칼리프의 선출: 쉬아파는 칼리프는 예언자의 혈연적 후손이어야 한다고 주장, 알리와 그 아들 하산을 제외한 이후의 모든 칼리프는 강탈자라고 주장. 그러나 순니 법학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고대 아라비아 부족의 족장 선출방식에 기초한 선거형태. 선거인단의 구성이나 선거절차도 권위주의적으로 정하지는 않았다. 
▲ 칼리프의 발전과정
① 족장제 칼리프 시기: 초기에 칼리프의 권위는 이슬람의 정치윤리와 고대 아라비아의 반권위주의적인 관습에 의해 크게 제한됐음. 고대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은 군주제를 싫어하고, 합의의 따라 뽑힌 추장을 선호. 초기 무슬림들은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제를 지켜봤기 때문에, 그와는 다른 형태를 구상. 
* 이슬람의 협의제: 칼리프의 조언자들인 shura(협의체)의 기능이 중요. shaykh(=sayyid; 부족장)은 슈라의 지지 속에 부족 귀족대표회의인 majils(=jama'a)를 주재하는 임무를 맡았다. 무슬림들은 협의는 격찬하고 독단은 개탄. 오스만 시기에는 일상적인 각료회의와 특별회의인 meshveret가 존재.
② 세습제 칼리프로의 이행: 10세기에는 이슬람제국은 세습적인 독립 공국들로 구성. 파티마 왕조가 출현하면서 겁데기 뿐인 바그다드 칼리프의 권위마저 소멸. 군주제가 생겨났지만 고대 이란의 '샤'라는 칭호 대신 아랍어 '말리크'라는 용어를 채택. 군주제의 완성은 셀주크 시기 '대술탄제(Great Sultanate). sultan은 추상명사로서 권위와 지배를 의미. 셀주크 가문은 신에 의해 주권을 부여받고, 칼리프에 의해 종교적으로 비준받았다. 즉 칼리프는 권위를, 술탄은 권력을. 칼리프는 군림하되 지배하지 못하지만 술탄은 둘 다 할 수 있었다. 16세기 이후 칼리프는 아예 술탄의 호칭 중의 하나로.
▲ 행정체제('디완'): 정부 조직은 행정수반, 즉 총리인 wasir(=visier)가 관장. 가장 중요한 부서는 문서를 다루는 총무부와 세금 부과·징수업무를 맡은 재정부. 정부조직을 관장하는 행정수반, 와지르의 중요성은 10세기부터 등장한 amir(군사령관)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약화됐다가 셀주크 시기 술탄의 보좌역으로 다시 득세. 그러나 셀주크 시기 이후 관료의 통제는 군부의 손으로. 맘루크 이집트에서 행정수반은 dawadar.
▲ 재정: 압바스 후기부터 재정문제만 전담하는 defterdar가 등장. 원칙적으로 국가재정은 이슬람 세금, 즉 성법에 명시된 세금에서 나왔는데 이런 세금으로는 비무슬림들이 지불하는 토지세(kharaj)와 인두세(jizya), 무슬림의 의무적인 희사금인 zakat나 ushr가 있었다. 세입은 현금이나 물품으로 징수. 

2. 경제생활

▲ 중동 농업의 두 가지 형태: 관개농업(강 유역 경제)과 내륙 농업(강우량에 의존)
가장 중요한 작물은 올리브, 파피루스, 차. 그러나 유럽과 달리 교육받은 농민층이 없고 상업에 비해 농업을 멸시, 농업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은 없었음. 기술을 제대로 발휘한 것은 관개 분야. 그러나 토양침식→농지 이동→사막 확대의 악순환이 계속됨. 특히 풀을 아예 뽑아버리는 염소를 키웠기 때문에 농지 황페화가 더 빨라짐.
▲ 농민과 유목민: 서유럽에서는 농업과 축산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지만 중동에서는 농민과 유목민 사이에 오랜 분리와 갈등이 존재. 이들은 서로 적대적(카인과 아벨의 신화). 
▲ 직물과 국제무역: 무슬린, 다마스크, 거즈, 모헤어, 태피터... 대유럽 직물수출의 중요성을 짐작. 가장 중요한 것은 tiraz(紋織이나 자수). 수송은 동물이나 수로에 의존. BC 1000년부터 사육된 낙타는 540kg의 짐을 싣고 하루에 322km를 걸을 수 있으며, 물 없이 17일을 버틸 수 있다. 낙타는 중동의 지리적 여건에서는 수레나 도로보다 훨씬 비용효율이 높았다.
▲ 노예무역: 역설적이지만, 이슬람법의 인도주의 때문에 이슬람 시대에 노예무역이 성행. 고아들의 노예입양이나 인신매매 따위가 금지되면서 사적인 노예 충원방식들이 대부분 근절됐기 때문(이슬람에서 인간의 자연상태는 자유). 
노예는 주로 ① 유럽의 슬라브족과 무슬림 스페인, 북아프리카인 ② 유라시아 스텝 ③ 아프리카 흑인들로 충원. 그러나 중세 이슬람경제는 고대와는 달리 노예노동력 중심의 경제는 아니었음.
▲ 실크와 향료: 로마 후기와 이슬람 초기 실크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상품. 실크의 수입과 제조는 왕실의 독점사업.
이슬람은 예배와 의례에서 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실크와 함께 주요 교역품목이던 향은 이후 수요가 감소. 향 무역이 쇠퇴한 뒤 중요성을 띠게 된 것은 말라바르 해안에서 공급되는 후추 등의 향신료 무역. 
▲ 중동경제의 쇠퇴: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상륙한 뒤에도 중동 무역은 지속됐지만 유럽이 신대륙을 개척하는 동안 이슬람국가는 자원 고갈과 재정부족에 직면. 특히 힐랄리 베두인족의 북아프리카 침략과 몽골의 파괴로 인한 피해 극심.

3. 엘리트 지배계층

▲ khassa: 권력, 富, 직업, 교육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구별되는 상류층
① 관료계층: 서기로 대표되는 관료(katib)는 상속이나 징세가 아닌, 급료를 지급받는 전문가 계층. 중동의 관료제는 정권, 종교, 문화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을 확실하게 유지. 특히 이집트에서는 중앙집권적인 행정과 건조한 기후 덕분에 엄청난 양의 행정문서가 오늘날까지 보존. 7세기 아랍 무슬림들이 기독교 이집트를 개종시켰지만 이집트 파피루스의 기록에 따르면 정부의 일상업무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랍인이 진출한 뒤로도 한참 동안 과거의 관료가문은 문서와 회계에 관한 고유 정보를 독점했다. 13-14세기까지도 콥트족이 여전히 행정을 주도하고 세금을 징수했다. 
② 울라마와 종교계층: 중세 이슬람사회는 문학(adab; 시문과 역사, 순문학 등)과 지식(ilm; 구란과 주해, 예언자의 전승 등 신학과 법학)을 발전시켰다. 그중 일름은 ulama(종교학자)들의 영역. 법을 운영하고 판결하는 전문가 계층.
울라마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qadi는 성법을 운영하는 판관. mufti는 유권해석을 내리는 법학자. muhtasib은 정부가 임명한 풍습 감독관. 정부에서 임명한 까디와 무프티에게는 일종의 재판관할구역이 할당됐다. 종교계층은 관료, 군부와 함께 제국의 세 번째 줄기. 오스만제국에는 총대주교 격인 수도의 최고 무프티 sheykh al-Islam가 독자적인 성직계급을 통솔.
초기 울라마들은 국가를 경원시하면서 울라마들은 waqf라는 독립된 종교재단에 의존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가와 울라마는 서로 권력을 분점. 양측 간에는 일종의 타협이 이뤄졌다. 국가는 울라마의 도덕적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이용.
③ 시인과 학자층: 지적, 문학적 재능으로 살아가는 전문가 집단. 이슬람의 권력층은 시인을 두고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짓게 했으며, 통치자는 아예 궁정에 홍보부 역할을 하는 시인단을 두었다. 통치자들은 또한 후대에 전하기 위한 역사가들을 고용. 이 밖에 천문학자, 점성학자, 예술가, 서예가, 건축가, 기술자, 의사 등의 전문가 집단이 존재.
④ 군부계층: 페르시아의 기마용병부대는 가공할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6세기 호스로우1세 시절 페르시아의 군사조직은 봉건성을 탈피해 장군과 군사총독, 장교라는 지휘체계를 완성. 
이슬람 이전까지만 해도 상설 직업군인이라는 개념은 이질적이고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었으나, 오스만 시대가 되면서 군주들은 쿠데타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노예나 이민족 출신들로 충성스러운 친위부대를 구성. 
⑤ 교역상인층: 이슬람은 애초부터 호의적인 입장.
⑥ 지주계층: 서유럽에서나 마찬가지로 중동에도 독자적인 소작 지주가 있긴 했지만 존재가 미미하고 불규칙적. 이슬람 
▲ madrasa: 11세기에 출현, 이슬람 전역으로 확산된 고등교육기관, 종교학과 법학을 가르치는 일종의 상설대학.
▲ kafa'a 원칙: 신분 높은(혹은 무슬림) 여자가 신분 낮은(비무슬림)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막는 원칙.

4. 평민계층

▲ amma: khassa와 대비되는 일반층.
▲ 이슬람은 평등의 종교: 여자에 대해서만 빼놓고는 평등. 
▲ 노예: 여성과 마찬가지로 가족 내에서 나름의 입지가 있었다. 이슬람 성법(샤리아)의 개인지위법에 명시된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이슬람 세계는 노예 경제에 의존하지는 않았다. 농업은 자유민이나 준 자유농민이, 산업은 자유장인이. 노예는 주로 가정용이나 군사용. 전자는 아프리카 흑인 출신들, 후자는 대부분 백인 출신들.
▲ 여성: 이슬람의 등장으로 고대 아라비아에 비해 여성의 지위는 크게 향상. 재산권이 어느 정도나마 보장되고, 남편이나 주인의 학대에서 보호받게 됨. 일부다처제가 합법화됐지만 4명으로 제한. 일부다처는 극소수 부유층에만.
▲ dhimmi(이교도): 비무슬림 시민들을 일컫는 법률용어. 딤미는 무슬림 통치자와 비무슬림 공동체간의 협정으로 결정되는 일종의 계약관계. 이슬람에서 딤미들의 처지는 법에 규정된 것보다 오히려 훨씬 좋았다. 법정에서의 증거능력이나 피해보상 등에서는 여성이나 노예와 마찬가지로 박대를 받았지만.
▲ 신분 상승의 기회: 이슬람 사회는 그 어떤 사회보다도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많았던 사회. 물론 '무슬림 남성'에 한해. 
▲ 유목민: 농경과 목축이 분리된 중동의 특성상 꼭 필요한 존재. 독특한 생활방식을 고수. 정부가 약할 때에는 오아시스와 마을을 약탈하고 대상을 습격하는가 하면, 때로는 정착사회를 정복해 새 왕조를 건설하기도.

5. 종교와 법

1) Islam
어원은 '복종', 신자들의 신에 대한 복종. 이슬람의 능동분사형인 Musilm은 그 복종행위를 실천하는 사람.
이슬람은 sharia라는 성법체계와 kalam이라는 신학체계를 포함한 총체적 개념. 

2) mosque(이슬람 사원)
▲ masjid에서 파생. 예배 장소, 신 앞에 무릎꿇는 장소. 정치적, 사회적 센터 역할도.
이슬람은 성찬이나 세례 의식이 없고 임명된 성직자도 없기 때문에 모스크 내부에는 제단이나 성소가 없으며 단순하고 엄숙. 이맘은 성직자가 아니라, 단지 예배를 인도하는 자. 무슬림은 누구나 이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후기에는 이맘은 반영구적인 전문직종이 됨.
▲ minbar와 mihrab: 모스크의 두 중심체. 민바르는 금요 합동에배 때 큰 모스크에서 사용하는 설교대, 미흐라브는 메카의 방향(qibla; 예배의 방향)를 표시한 일종의 벽감. 
▲ 꾸란은 신성한 것. 쓰고 읽는 것 자체가 신앙행위이기 때문에 다양한 서체가 개발되고, 아름다운 예술로 발전.
▲ minaret: 모스크 네 귀퉁이에 세워진 건축구조물. 그 꼭대기에서 무아진(mu'adhdhin; 무슬림들에게 하루 5번 기도시간을 외쳐주는 사람)이 예배 시간을 알린다. 이슬람 세계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상징. 

3) sharia(이슬람 성법)
무슬림들의 유일한 법은 계시를 통해 알려진 신법(神法). 꾸란과 하디스에 명시돼 있으며 후대 율법학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해석됐다. 따라서 법학자와 신학자의 뿌리가 같다.
▲ 까디는 법정에서 재판을 주관, 법을 적용. 법의 해석은 무프티의 몫. 무프티의 견해(fatwa)는 판례의 효력을 가짐.
샤리아는 인간의 입법권을 인정치 않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사실상의 인간 법들이 생겨남. 아래로부터 생긴 것은 관습, 위로부터 생긴 것은 규정. '통치자의 재량권과 울라마들의 합의'에 따라 꾸란과 하디스의 규정에 대한 해석도 변화.
▲ 샤리아의 4대 학파(Hanafi, Shafi'i, Maliki, Hanbali) 간에는 공존과 상호관용이 정착. 이들은 ijma'라고 불리는 합의과정에 따라 이견을 조정.
▲ ijtihad와 taqlid: 이슬람 초기에는 '합의'의 상당부분이 인간 이성이나 개인적 견해에 의존. 그러나 인간 이성에 기반한 변용(이즈티하드)의 영역은 점점 줄어들어, 900년 경부터 순니파에서 '이즈티하드의 문은 닫혔다'. 대신 울라마들은 의심의 여지 없는 종교적 공리, 즉 타끌리드에 의존. 물론 타끌리드는 기독교의 '참된 교의'와 같은 배타적인 것은 아니었고, '핵심 교의를 받아들인다' 하는 제한적인 의미. 이를 받아들인 사람을 순니라 부른다.

4) 이단
▲ bid'a: 기독교의 이단과는 다른, 일종의 '혁신' 개념. 신학적 위반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위반에 가깝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단의 규정에는 차이가 많은데,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스마일파와 같은 쉬아 극단주의자들은 이슬람의 테두리에서 제외한다는데 동의. 그러나 이들이 사회적 혼란이나 정치적 선동을 하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 분위기. 
▲ 불신자와 배교자: 이들을 상대로 한 싸움이 Jihad. 

5) 이슬람의 다섯 기둥
① shahada(신앙고백): 어원은 '증언'. 
② salat(예배): 하루 5차례의 의례적인 예배. 유대교의 예배일인 금요일은 안식일이 아니라, 공공활동이 더욱 왕성한 날.
③ hajj(순례): 종교적 의무. 흑석이 있는 카바신전은 Bayt Allah(하느님의 집)로 최고의 성지. 
④ 단식: 매년 라마단 달에 행해지는 것.
⑤ zakat(희사): 기원은 신자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자선 헌금인데, 후에 세금이나 공물 형태로 바뀜.

6) 금기사항
살인 강도 등을 금하는 보편적 계율 외에 종교적 계율로서 돼지고기, 술, 간음, 이자 취득을 금기시.

7) Jihad(성전)
율법학자나 신학자들이 규정하는 또다른 적극적 의무의 하나. 이슬람 법에 의하면 이교도, 배교자, 역적, 노상강도 등 네 종류의 적과 싸우는 것은 합법적. 특히 앞의 두 적과의 싸움은 성전으로 간주.
고전적인 지하드는 외적에 대항해서 적과 싸우는 것. 반면 쉬아파는 내부의 '찬탈자'들을 상대로 한 내적 투쟁을 중시.

8)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
쉬아파의 혁명이 실패한 뒤 개인적 신비주의에서 출발한 수피즘이 확산, tariqa 혹은 tarikat라고 불리는 종단을 조직해 사회운동화 하기도. 그러나 쉬아파와는 달리 순니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고 정치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6. 문화

1) 고대 중동문명의 불연속성

헬레니즘화, 로마화, 기독교화, 이슬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대 문화의 기록은 대부분 사라지고 연속성을 상실.

2) 언어
페르시아어는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아프간의 공식 언어인 타지크어와 다리아어, 파슈토어 등은 모두 페르시아어 계통. 아람어와 콥트어는 기독교 소수집단의 언어. 감소추세. 베르베르어와 쿠르드어는 사용 인구는 많지만 표준 문자가 없음.

3) 예술
▲ 전통적으로 문학만이 예술. 음악가는 모두 노예 혹은 사회적으로 열등한 사람. 이슬람 예배에서는 대부분 음악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와 달리 음악가들은 교회나 왕실의 후원을 받지 못했다.
건축가는 오스만제국 시대까지 대부분 군장교들로 특별한 위치. 막대한 급료를 받으며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 궁전과 요새, 사원, 대학, 공공시설을 제공하는 입안자이자 행정가들로 위치. 
▲ 실내장식: 고대 중동에서는 가구가 일반적이었지만 이슬람시대가 되면서 사라지고 유목민이 사용하는 모직물과 가죽, 카페트, 매트리스, 무릎 방석과 쿠션 등으로 대체. 
▲ 오스만의 술탄들은 초상화를 남기지 않았다. 이례적인 것은 벨리니가 그린 정복자 메흐메드의 초상화(아들인 술탄 바예지드가 팔아치움) 정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슬람 통치자들은 동전이나 우표 따위에 자기 얼굴을 새겨넣지 않음.

4) 시
▲ qasida(송시) : 오랫동안 아랍 시의 지배적인 매체였던 사막 야영지에서의 송시. 초기의 까시다는 부족의 미덕과 용기와 업적 등을 칭송하는 찬가. 
▲ 전통적인 까시다 외에 우마이야 시기에는 히자즈지방에서 에로틱한 연애시가 인기를 끌기도. 특히 메디나에서는 도시가 발전하면서 향락적인 문화가 형성. 몇몇 유명 시인들은 한권의 완벽한 시집(diwan)을 남기기도. 
▲ 포도주: 이슬람은 알콜을 금지했지만 페르시아와 터키의 시에 포도주가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듯. 무슬림들에게는 포도주의 제조와 판매, 음주가 금지돼 있었지만 비무슬림 시민들에게는 허락됐었다. 따라서 술을 마시려면 이교도에게 가야. 대문에 아랍 시에서 기독교 수도원과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도들의 집회지는 '선술집'의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 시의 정치적 기능: 찬사와 풍자는 시인들이 내놓는 최대의 상품. 특히 찬사는 시인들의 생계 수단. 이슬람 첫 세기에 이미 우마이야 칼리프는 궁정시인을 고용. 시인들은 연대기와 문학의 대가로 후원자에게서 보수를 받아 생활.
시를 통한 선전은 왕실 뿐 아니라 반란자들이나 종파, 정치적 파벌, 개인들의 선전수단으로도 애용됐다. 
▲ Shahname(샤나메) : 고대 이란의 신들과 영웅들의 모험을 담은 장문의 대화체 서사시. 페르시아의 '일리아드' 격.
이슬람 이전 페르시아 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5) 마까마
▲ maqama(마까마) : 아랍어로 '회기' 혹은 '계기'라는 뜻에서 나온 말. 아랍의 독특한 단편문학을 지칭. 마까마는 saj(사즈)라는 방식으로 쓰이는 짧고 운율적인 산문. 이 외에도 에세이가 많이 발달했고, 가벼운 오락거리로 픽션들도 만들어짐.

6) 연극
▲ 이교도의 잔재라는 이유로 극장은 이슬람 중세에는 중동에서는 사라졌다가 후대에 들어 다시 나타남. 그러나 꼭두각시놀이는 몽골시대에 동아시아에서 들어와 인기를 끌었음.

7) 역사
▲ 역사인식: 중동의 고전문학은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와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의식적으로 쓰여졌다. 이슬람에는 처음부터 강한 역사의식이 주입됐다. 예언자와 칼리프들의 진실을 확신하고 조절하고 재발견하기 위해 역사가 중요하다고 생각. 이슬람 통치자들은 초기부터 역사속에서의 위치를 의식, 선조의 행동에 관심을 갖고 후대의 기록에도 민감하게 걱정. 
▲ 풍부한 정통 역사서술 외에도 이슬람 이전부터 내려오는 영웅담 전통이 이슬람 이후 이교도에 대항하는 무함마드와 초기 무슬림의 영웅담으로 변모돼 내려오는 등 다양한 역사 서술방식이 전해 내려옴. 그러나 이슬람 이외의 세계에 대한 역사서술은 찾기 힘들다.

8) 학문의 번역
▲ 9세기 이후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약학, 지리학, 농경학, 철학 등에 관한 그리스 저술들이 아랍어로 번역됨.

9) 과학
▲ 그리스 과학이 다소 이론적이었던데 비해 중동의 과학은 훨씬 실용적. 약학, 화학, 천문학, 농경학의 유산들은 실험과 관찰이 뒷받침되는 훌륭한 것들. 아라비아숫자는 인도에서 유래했지만 이를 새로운 산술의 시발점으로 만든 것은 9세기의 중동인들. 특히 중동은 대수학을 창안. 11세기말-12세기초의 유명한 수학자 오마르 하이얌 등.
▲ 무함마드 이븐 자카리야 알-라지(10세기)는 천연두에 관한 기념비적인 연구로 중세를 풍미. 

10) 인쇄, 출판
▲ 오스만제국에서는 1485년 술탄 바예지드2세의 칙령으로 인쇄를 금지. 아랍어 활자가 고안되고 아랍어 인쇄소가 세워진 것은 16세기 초의 이탈리아. 중동에서 아랍어 인쇄가 인정된 것은 18세기 초. 

제 4부 변화와 근대화

1. 도전: 큐축카이나르자 조약과 서구의 도전


▲ Dar al-Islam(이슬람 세계)과 Dar al-Harb(전쟁의 세계)
이슬람은 무슬림 세계와 이교도들의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인식. 두 세계간의 경쟁에서 초기에는 이슬람이 우위. 유럽이 이슬람에 기여한 것은 주로 물질적, 기술적인 것. 벽시계와 안경, 망원경 따위. 그러나 서유럽이 중동에 전해준 것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 공성포, 야전포, 권총과 같은 화기. 오스만은 이 무기들을 받아들여 중동 내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
▲ 오스만의 비엔나 공성 실패와 1699년의 카를로비츠 조약: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시킨 조약. 언제나 승자로서 패자를 굴종시켰던 이슬람은 이를 계기로 진정한 의미의 '타협'을 해야할 처지가 된 것. 비엔나 패전과 카를로비츠 조약은 기독교 세력 앞에 무슬림이 후퇴하는 계기가 됐다.
▲ 러시아의 남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 1723년 러시아는 이란의 혼란을 틈타 카프카스에 진입. 이어 1774년 큐축카이나르자 조약으로 오스만에 엄청난 굴욕을 안겨줌. 러시아는 이 조약으로 ① 흑해 연안에 교두보를 확보 ② 흑해에서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무역의 확대 ③ 오스만에 대한 영향력 등의 과실을 얻음. 이어 1785년 크림반도 합병.
▲ 서유럽의 중동 진출

2. 변화: 중동 경제의 쇠퇴와 서구 자본의 침투

▲ 중동 경제는 내부적으로 16-17세기 심한 인플레의 영향으로 피폐. 대외무역도 유럽의 대양횡단 무역로 개척으로 침체.
▲ 19세기에 들어서는 이방인들이 경제의 주도권을 행사. 또는 이슬람 내의 비무슬림 소수집단이 경제를 쥐고 흔드는 상황으로.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터키계 유대인은 중동 내에서 힘을 얻게 되자 서구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에도 개입. 서구세력은 비무슬림 소수집단과 교회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중동에 간여.
▲ 인구는 크게 늘었지만 도시나 시골의 노동인구의 생활수준은 거의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악화됐다. 동시에 상류층의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충성구조나 의무, 구질서에서 공유됐던 가치관들은 붕괴됐다. 술탄은 수도에서는 장관과 조신들에게, 지방에서는 세습 자치군주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 오스만의 토지소유 분봉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지역의 지주들이 득세. 반면 농업발전은 미미. 세금징수 대상인 봉토(timar 티마르)의 보유기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사유토지인 malikane(말리카네)로 변질. 지주인 a'yan들은 지방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됨. 아얀의 출신들은 지주, 무역업자, 봉토의 소유자였던 기마병(sipahi 시파히), 조정 관리 등 다양. 
▲ 궁정에서는 내시들이 득세, 관료와 싸움질.

3. 응전: 서구화와 개혁 그리고 종교적 반응

▲ 수세기 동안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신의 진리를 갖고 있으며 그 진리를 인류에게 전달할 신성한 의무를 지녔다는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오스만 말기의 패배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오스만의 지배계층이 처음으로 결정적인 패배를 가슴에 새기고 서양을 탐색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은 카를로비츠 조약. 처음에 터키인들은 단순히 군사적인 문제로 파악, 서구의 군제와 군사교육, 기술을 받아들였다.
▲ 이슬람 내부의 도전: 19세기 초부터 오스만 내에서 자치와 독립을 추구하는 지방 지도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파샤(총독)들은 이집트, 아라비아, 이라크, 레바논 등지에서 독립을 주장. 
▲ 서구의 침투에 대한 반발은 초기에는 종교적 형태를 띠었다. 
① Naqshbandi(나크쉬반디) 수도승들의 개혁종단: 수피즘 성격. 이슬람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② Wahhabi 운동: 수피즘의 신비주의에 극렬 반대. 쇠약하고 변질된 신앙 대신 청교도적인 계율, 호전적인 실천을 주장.
▲ 서구 영향에 대한 그 다음 응전은 '적응과 협력'
열강들의 식민지역이 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영국의 인도,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등에서는 지배자들의 언어를 배워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술탄이나 이란의 샤도 임명직 협의체를 실험하고, 일부에서는 의회정부를 격찬.
▲ 또다른 응전: 범이슬람주의

4. 새로운 사상:프랑스 혁명과 민족주의

▲ 유럽이 이전에 중동에 미친 영향은 기술적인 것에 불과. 프랑스 혁명은 중동에 영향을 끼친 최초의 유럽 사상운동. 프랑스 혁명은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았을 뿐더러, 프랑스인들이 적극적으로 중동에 그 사상을 전파. 평등과 동포애는 무슬림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사상. 반면 '자유'라는 개념은 정치적으로 새로운 사상. 혁명 초기부터 이스탄불의 프랑스 대사관은 선전의 중심지가 됐다. 
▲ millet(밀레트) : 이슬람 제국 내의 종교-정치적 공동체
① 무슬림 밀레트(millet-i hakime)
② 그리스인 밀레트: 다양한 기원을 가진 그리스 정교 추종자들.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알바니아인, 기독아랍인, 기독교 투르크족 등.
③ 아르메니아 밀레트: 아르메니아 교회를 신봉하는 아르메니아 민족.
④ 유대인 밀레트: 15세기말 스페인에서 도망쳐온 이민자들, 시리아와 이라크의 토착유대인 공동체 등.
▲ 밀레트들은 정치적, 관료적, 상업적, 사회적 경쟁에서 집단의 결속으로 토대를 형성. 이들 사이에는 일종의 편견과 함께 '서열'이 존재. 오스만 내의 기독교 집단들은 19세기 내내 ①제국 내에서 평등한 시민권을 얻는 것 ②민족 자치 ③구질서하에서 누린 밀레트의 특권과 자치권의 보전 등을 목표로 싸웠다. 그러나 이는 모순된 것. 밀레트들의 '서열'에 따라 그리스인 밀레트들은 다른 두 밀레트들에 비해 이익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그리스 밀레트 내부의 반발도 있었다.
▲ 그리스 독립전쟁은 밀레트들간의 분열과 제국에 대한 충성심의 약화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은 어떤 소수집단보다도 오스만의 쇠퇴를 잘 간파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럽의 후원에 의존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점차로 유대인들,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제국 내에서 공생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더불어 오스만의 세력은 갈수록 약화됐다. 
▲ 오스만에 비해 이란은 서구와 더 멀리 떨어져 있고, 내부의 소수파가 많지 않고, 동질한 문화적 전통을 고수해왔기 때문에 서구 사상의 침식이 적었다. (물론 이란 내부에도 아르메니아 공동체는 있었고 후일 러시아로 떨어져나간다.) 그러나 이란은 서구의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를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토양이었다. 이란인은 아랍지역과 달리 이슬람 이전의 과거에 대한 인식과 그 시절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언어도 기본적으로 페르시아어였고, 16세기 초 사파비 왕조가 성립된 이후로 분리된 세력권을 형성해 쉬아파 중심으로 단합해왔다.

5. 새로운 전쟁으로: 오스만제국의 붕괴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중동

▲ 무함마드 알리 파샤의 반란: 이집트에 준 독립적인 새 왕조를 건설. 이라크와 시리아도 자치를 획득.
▲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사바흐 가문이 쿠웨이트 공국을 장악
▲ 나지드 지방의 신학자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와하브에서 시작된 18세기의 와하비 운동은 오스만의 정통성에 도전한 최초의 아랍 운동. 
▲ 1915년 아르메니아의 반란
▲ 샤리프 후세인이 지배하는 히자즈 지방 아랍 무슬림의 반란
▲ 1차 대전은 서구 앞에 이슬람이 굴복하는 극적인 계기. 
▲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는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됐다가 1934년 리비아로 통합.
▲ 과거의 메소포타미아인 이라크는 샤리프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 왕이 지배하는 왕정국가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았으며 과거 시리아나 레반트로 알려졌던 서부는 분할돼 중앙과 북부는 프랑스에, 남쪽(팔레스타인)은 영국에 할양. 프랑스는 잠시 뒤 할양받은 지역을 레바논과 시리아로 나눠 공화국을 설립.
▲ 와하비의 전달자인 사우드 가문의 팽창: 아브드 알-아지즈 이븐 사우드는 1914년 전쟁 발발 전까지 아라비아 대부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 샤리프 후세인이 지배하는 히자즈 왕국을 공격, 1925년 말까지 메카, 메디나, 제다를 손에 넣고 이듬해 히자즈의 왕 겸 나지드의 술탄으로 선언.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로 국호를 개칭.
▲ 터키에서는 1919년 아타튀르크인 무스타파 케말의 혁명
▲ 이란에서는 카자크여단의 장교였던 레자칸이 1921년 독재정권 수립, 1925년 '샤'로 취임해 팔레비왕조를 개창.▲ ▲ ▲ ▲ 

6. 자유에서 자유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오늘날의 중동

▲ 1차 대전 이후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이 완전한 주권 독립을 쟁취. 양 대전 사이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이라크, 이집트가 독립. 1951년 리비아 독립, 56년 수단, 튀니지, 모로코 독립, 60년 모리타니아 독립, 이듬해 쿠웨이트 독립, 62년 알제리 독립, 67년 남예멘 독립. 이중 예멘과 알제리는 혹독한 투쟁을 거쳐 독립을 쟁취. 
▲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혼란은 그치지 않았다. 내부는 물론 역내 국가간, 역외 국가간 여러 단계의 갈등 표출. 
① 가장 끈질기고 파괴적인 투쟁은 레바논 사태. 1958년과  1975-76년 내전 등.
② 예멘: 아라비아 남부에서는 오랜 투쟁 속에 과거 이맘의 통치지역이던 북예멘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예멘이 1990년 통일했으나 처절한 내전 끝에 94년 다시 분할.
③ 터키와 이라크의 쿠르드 문제, 이라크의 소수 쉬아파 공격, 수단의 무슬림-비무슬림 내전
④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의 투쟁
▲ 아랍의 두 가지 전쟁
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
② 1980-88년의 이란-이라크 전쟁: 팔레스타인의 전쟁보다 훨씬 복합적. 아랍이나 이스라엘과 달리 양쪽 중 누구도 국제적 지원을 받지 못했고, 외부의 강력한 반감을 샀을 뿐. 이 전쟁은 호메이니와 사담 후세인이라는 두 카리스마의 대결이면서 종족 면에서는 페르시아와 아랍인의 대립이었고, 이념적인 측면에서는 이슬람 복고주의와 세속적인 모더니즘(후세인은 후일 입장을 바꿨지만)의 대결이었다. 종파적으로는 쉬아파와 순니파의 전쟁이었으며,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역내 석유 지배권에 대한 경쟁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지역 패권 장악을 위한 투쟁인 동시에 영토분쟁이기도 했다. 
이라크는 미국의 지원 하에 부분적 승리를 거뒀지만 이후 걸프전으로 고립.
▲ 범아랍주의: 이스라엘은 중동 출신 인구가 압도적이지만, 무슬림들은 이스라엘을 '서구'로 분류. 단순히 서구 세력의 중동 진출의 도구라는 의미에서 뿐 아니라, 서구 '문명'의 일부분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인식. 때문에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성공을 놓고 무슬림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더 큰 국가에 대한 충성'을 생각했고, 이는 범아랍주의로 이어졌다. 그러나 국가간의 경쟁과 지도권 경쟁 등으로 이집트와 시리아가 3년간 통합을 시도한 뒤 실패로 끝났다.
▲ 사회주의: 20세기 중반까지 사회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지만, 아랍에서 사회주의를 실행한 것은 지식인들이 아니라 권위주의 정부. 90년대 초까지 아랍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특기할 점은, 공공연한 反서구 국가들조차 헌법이나 입법의회 같은 서구식 정치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 이슬람 혁명: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은 기원과 양상, 궁극적인 운명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 혁명, 또 러시아 혁명에 비견된다. 이란 혁명은 케말 파샤의 혁명 등과 달리 '이슬람 혁명'으로 불린다. 혁명 지도자들은 다른 혁명에서 모델을 찾지 않았다. 우익도 좌익도 이교도 적들의 이념으로 보았다. 이슬람이 가져다 준 것은 상징과 표어 이상이었다. 혁명은 민중의 목표를 만들어주었고, 적이 누구인지를 정의해 주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법상의 모델은 유럽적이었다. 프랑스 혁명 때와 같은 공포정치가 뒤를 이었다. 
▲ 이슬람과 민주주의: 두 이즘은 다양한 양상으로 상호경쟁을 해왔다. 원리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권력으로 향하는 편도선 차표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때 아랍권을 잠식했던 유럽 스타일의 민주주의가 이슬람 내에서 부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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