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장애와 소통하는 법

딸기21 2003. 7. 28. 10:58
728x90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1·2> 토베 케이코 글·그림. 자음과모음.
<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 노라 엘렌 그로스. 한길사

몇해전 전문직종에서 제법 잘 나가는 사람을 취재차 만났다. 심심찮게 신문에 이름이 거론되기에 "언제 출마하실거냐"고 물었더니 "지금은 아니"란다. 그분 아이가 자폐아라고 했다. 정치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아이에게는 아직 아빠가 필요한 때라는 얘기였다.
토베 케이코의 만화책 `사랑하는…'의 주인공 히카루는 자폐아다. 싸우고 울고지새던 일중독자 아빠, 마음 약한 엄마가 자폐아를 매몰차게 대하는 사회와 맞부딪쳐 함께 싸우는 것이 책의 줄거리다.



사회는 장애를 가진, 혹은 그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뿐인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과학저널리스트인 매트 리들리는 다운증후군 아기를 낳을까 싶어 낙태를 하는 세태를 비꼬면서 "사람들은 `그저 잘 웃고 언제나 걱정이 없이 태평한 아이'가 싫어 죽이기까지 한다"고 쓴 바 있다. 얼마전 샴쌍둥이 지혜와 사랑이가 분리수술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샴쌍둥이를 장애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아 가족들이 수술비 마련에 애를 먹다는 보도를 보았다. 지하철에서 샴쌍둥이가 들어서면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지 않을 자신 있는가. 기껏 알량한 동정심밖에 없는 주제에, 히카루를 안아주는 일본 사회를 부러워하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양심불량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봐도 우리 사회는 약자, 소수자에게 야박하다 못해 잔인하다. 히카루 이야기는 실제 자폐아 가족의 이야기를 집중 취재해 스토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더없이 생생하다. 눈물 나는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번역자는 조금이라도 독자들에 보탬되도록 국내 시설 정보를 팁으로 다는 열성을 보였지만 덧붙인 내용이 턱없이 부족하다. 자폐아를 돌보고 키울 수 있는 시설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히카루가 다치면 집에 찾아와 사과하는 교장선생님, 구민회관의 소신있는 양육도우미, 자폐아 상담센터의 책임감 강한 카운셀러는 남의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일본의 사회안전망을 실제보다 낙관적으로 그렸을 수도 있지만, 우리와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모든 장애를 우린 참 못 받아들인다. 그런 인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또하나의 책이 `마서즈…'다. 미국 보스턴 남쪽에 있는 작은섬 마서즈 비니어드는 유전학·생명과학책에서는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지명이다. 바닷빛이 아름답고 포도밭이 많은 이 섬에는 유독 청각장애인이 많다. 17세기 유럽인들의 이주 이후 근친결혼이 잦고 유전적으로 고립돼온 탓이다. 



예일대 인류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섬을 유전병 표본실로 보아온 과학자들의 패턴을 벗어나 `수화로 소통이 이뤄지는 특별한 곳'으로 본다. 이 섬에서 청각장애는 더 이상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곳에는 `입으로 말하는 사람'과 `손으로 말하는 사람', `귀로 듣는 사람'과 `눈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수화를 할 줄 모르면 불편한 것은 장애인이나 비(非)장애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공통의 언어인 수화를 배우면서 공존과 통합을 배운다. "수화를 할 줄 아는 것이 프랑스어를 하는 것처럼 부러움을 사는" 사회가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사회도 이제는 장애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tip- 비니어드섬 수화 이야기 몇가지

이 섬 사람들은 영국 켈트의 윌드 지방에서 온 사람들인데, 근친결혼이 많아 청각장애인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연구결과 건청인과 청각장애인 사이의 의사소통에는 거의 아무 문제가 없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건청인들끼리만 있을 때에도 수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노인들은 기억했다(아쉽게도 이 섬의 '고립'은 20세기 들어와 끝났고 청각장애의 혈통과 수화 공동체도 없어졌다).
1. 남들에게 안 들리게 얘기해야 할 때
2.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얘기할 때
3. 어부들이 이쪽 배와 저쪽 배에서 대화를 나눌 때
(손만 번쩍 들면 바다 저멀리의 어부와 이야기할 수 있음)
4. 외부사람 욕할때.


그런데 보통 수화는 근대의 산물이라 생각하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왜냐? 청각장애의 유형은 70가지가 넘는데 질병이나 사고 따위로 오는 것도 있지만 유전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집안에 청각장애인이 다수 출몰하곤 한다.
보통 집에 청각장애 아이가 있으면 건청 부모는 어떻게든 아이랑 대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자기네 가족만의 수화를 개발한다(home sign). 그런데 근대 이전에는 지역공동체=광범한 혈연공동체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단일가족을 넘어 한 집안, 혈통으로 수화가 통합돼 간다.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혈통으로 이리저리 얽혀있었기 때문에 같은 수화를 썼다.

청각장애 아동이 애기 적에 수화를 못 배우고 커서 배우면 속도가 느리다. 일반 언어 습득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비니어드 섬 청각장애 어린이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보통 사람들이 말배우듯 수화를 배웠기 때문에, 건청 아이들과 비슷한 정도로 어휘를 발전시켜나갔다. 따라서 비니어드 수화는 보통 언어와 마찬가지로 복합적이고 어휘 숫자도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동네 건청인들은 어릴 적부터 말과 수화를 같이 배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라서도 자기가 어떻게 수화를 배웠는지 기억을 못했다고 한다. 우리가 말을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