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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라이너스 칼 폴링과 몇몇 과학자들의 이야기.

딸기21 2003. 4. 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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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왓슨이 폴링에 대해 쓴 글이다.
<DNA를 향한 열정>에 실려있다. 희한하게도 다른 글에는 모두 저술 연도가 있는데 이 글에만 연도가 붙어있지 않아 언제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때 우러러보며 마음 속 경쟁상대로 삼았던 폴링을 왓슨은 어떻게 봤을까.


라이너스 칼 폴링(1901-1994)

1931년 나이 서른 살에 오리건 출신의 라이너스 폴링은 자신이 세계 최고의 화학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이한음의 번역은 가끔 이렇게 삑사리가 난다 -.-). 동의하지 않던 다른 화학자들도 10년 뒤에는 그 점에 동의했다. 그들은 유럽 이론물리학자들이 내놓은 새로운 양자역학을 그가 활용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폴링이 1939년에 쓴 명작 <화학결합의 특성>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학책이었으며, 성서와 같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젊은 교수였던 폴링의 카리스마적 자기 확신은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에게는 호소력이 있었지만 자신보다 더 늦게 탄생한(오역이 있었던 듯), 캘리포니아 공대의 연구비를 좌지우지하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다행히 당시 미국의 가장 튼튼한 과학 자금줄이었던 록펠러 재단이 그를 구원해주었다. 재단은 그가 단백질 연구에 착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당시의 화학자들은 거의 모두 이 거대분자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연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생물학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공은 1951년에 단백질의 알파 나선구조를 제시한 것이었다. 곧이어 영국에서 그 사실이 증명됨으로써, 폴링의 자신감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다가 그는 예상외의 실패를 하고 말았다. 1952년 말 그는 믿기 어렵게도 세 가닥으로 꼬인 DNA 구조를 제시했다. 그 직후 케임브리지에 있던 크릭과 나는 폴링이 금방 다시 강타를 날리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다가 이중 나선을 발견했다.

폴링이 왜 홈런을 치지 못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아내인 에이버 헬렌은 폴링에게 연구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고 말했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이 끝난 뒤 10년 동안 개인적으로 너무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 듯 싶다(번역 엉망이군).

시련은 폴링이 핵무기를 반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원자 폭탄이 처음 사용된 뒤, 그는 점점 커져가는 미국의 반공산주의 공포가 사람들을 광기의 핵무기 경쟁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강연에 나섰다. 존 에드거 후버는 그에게 '적색'까지는 아니라 해도 '분홍색'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뒤 감시에 들어갔다.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그를 위험인물이라고 불렀고, 국무부는 그의 여권을 압수했으며 캘리포니아 공대의 이사들은 그를 해임하고 싶어했다.

폴링은 자신의 눈에 띄는 행동에 대학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블랙리스트에 오른 몇몇 단체에서 탈퇴하고 정치강연도 중단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권을 돌려받지 못했고, 정부는 그에게 연구보조금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는 과학자들이 자신이 믿는 것을 솔직히 말한다고 해서 처벌을 받는다면 과학은 발전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서서히 정치강연을 재개했다. 195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더 용기를 얻은 그는 새로운 초강력 폭탄이 태평양이나 러시아의 황폐한 지역에서 폭발하면 방사성 낙진이 떨어져 위험을 끼칠 것이라고 역설했다.

250달러의 우편 요금을 들여, 그는 전세계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금지 청원 서명을 받았다. 그의 영향력을 우려한 <타임>은 그의 사진을 싣고 '태어나지 않은 것의 옹호자 또는 자유의 적의 앞잡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캘리포니아 공대의 저명한 이사 세 명이 사임하겠다며 압력을 가하자, 리 더브리지 총장은 폴링을 화학과 학과장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의 연봉을 18000달러에서 15000달러로 삭감함으로써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폴링은 결코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훗날 폴링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핵실험 금지협상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위안을 얻었다. 마침내 케네디 대통령이 재직할 때인 1963년 여름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 포괄적 공중핵실험 금지조약이 조인되었다.

낙진 위험을 지적한 폴링의 과학적 주장은 근거가 매우 빈약했지만, 실험을 더 하면 '깨끗한 수소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의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폴링 모두 나름대로 숭고한 목적을 위해 행동했다. 돌이켜보면 폴링은 미국과 러시아가 만들어내고 있던 수많은 핵무기들에 섬뜩함을 느낀 순간에 더 큰 그림을 보았던 것이다.

핵실험 금지운동으로 폴링은 1963년 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분야가 다른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캘리포니아 공대 관리자들 중 그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폴링은 63세에 교수직을 사임했다. 대학원생으로 패서디나에 온지 41년만이었다. 생물학과에서 열어준 한 차례의 송별회 외에 캘리포니아 공대에서는 아무런 기념행사도 하지 않았다.

폴링이 마지막으로 지녔던 원대한 소망은 자신이 화학과 생물학에서 했던 일을 의학에서도 해보는 것이었다. 그는 비타민을 이용해 정신질환, 감기, 암을 정복하려 했지만 그것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리한 일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끔찍한 질병들은 아직까지도 통제되지 않고 있다. 93세에 암으로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폴링은 자신이 비타민C를 매일 많이 먹지 않았더라면 더 일찍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비타민C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결론을 더 선호한다.

폴링이 마지막 승리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실패는 항상 위대함 곁을 거북하게 배회하고 있다. 현재 중요한 것은 그가 과거에 보였던 불완전함이 아니라, 완벽함이다. 폴링이 사망한 뒤 클린턴 대통령이 폴링의 자손들에게 보낸 추도사에는 그들 아버지가 '평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적극적인 행동주의를 통해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우선 순위를 재평가하도록 함으로써 결국 우리 세계를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폴링의 모습은 50년 전에 그가 생기라는 것은 없으며 오직 화학 결합만이 생명의 토대라고 주장할 때의 모습이다.



바람구두님이 폴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써놓으셨는데, 실제 그는 1952년 영국 왕립학회가 주관하는 DNA 관련 심포지엄(문제의 X선 회절사진이 공개됐던)의 연사로 초청받았는데 국무부가 여권 발급을 거부해 가지를 못했다. 이후 폴링은 2년 이상 국제학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심지어 1954년 폴링이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도 국무부는 폴링을 수상식에 참석토록 허락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하니.

물론, 왓슨과 크릭이 폴링의 업적을 '가로챘다' 말하긴 뭣하고(가로챈 혹은 방해한 사람이 있다면 에드가 후버나 매카시같은 빨갱이사냥꾼들이라 해야 옳다), 왓슨과 크릭의 번득이는 머리와 업적을 폄하해서도 안 되겠지만.

(옥스포드 '위대한 과학자들' 시리즈 중 두 사람에 대한 책 'DNA 구조의 발견과 왓슨, 크릭'에서도 예의 '과학자들 뒷다마' 식의 얘기들을 만날 수 있다.)

왓슨은 위에 옮겨놓은 글에서 폴링의 아내가 폴링에게 연구를 더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고 했는데 어째 좀 의심스럽다. 폴링의 아내는 1957년부터 폴링과 같이 공중핵실험 금지 서명운동을 받으러 열성적으로 뛰어다녔던 동지 같은 여성이었다던데. 

<폴링은 "내가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지탱해준 것은 나를 존경의 눈길로 보던 아내였다"며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그의 아내를 꼽았다. 그에게 아내는 자신의 내조자이자 평화운동의 실질적인 동료였던 것이다> (어딘가에서 따온 글입니다) 

이번 이라크전 반대 시위대의 피켓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no more war'라는 문구는 폴링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종류는 좀 다르지만 생각난 김에 냉전 시대를 첨예하게 겪었던 과학자 한 명을 더 만나본다면.

왓슨의 책에도 나오지만, 허먼 멀러(Hermann Joseph Muller 1890∼1967)라는 유전학자가 있다. 대중과학서 저술가인 마틴 브룩스의 <초파리>라는 책은 멀러에 대해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아무래도 그 책은 소재 자체가 초파리이니깐), 모르긴 몰라도 유전학 동네에서 끗발깨나 날리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왓슨이 공부한 인디애나 대학교에 재직했던 사람인데 왓슨의 말을 빌어보면.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처음 며칠을 지낼 때에는 당연히 멀러 밑에서 일을 해야할 듯이 보였지만, 곧 나는 초파리의 전성기가 끝났으며 트레이시 소너본과 샐버도어 루리아 같은 최고의 젊은 유전학자들은 미생물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그래서 머리 좋은 왓슨은 박테리오 파지를 연구하는 이른바 '파지 그룹'으로 들어갔고,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방향 새기 전에 다시 멀러 얘기로 돌아가보자.

살아 있는 세포의 유전자와 염색체에 X선을 쏘아 돌연변이 같은 유전적 변화를 이끌어낸 연구로 유명한 인물이다. 유전자에서 인공적으로 돌연변이를 유도한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1946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멀러는 유전학 실험도구로 초파리(Drosophila)를 사용한 <초파리계의 대부>(일명 파리대왕) T. H. 모건의 아래에 있었다. 


문제는 멀러의 기본 관심이 사회주의 성향의 우생학 쪽에 있었다는 것. 한마디로 '인간개량주의자'였다고 할까(딸기의 과장이 섞여 있으니 감안해 읽어주세요). 멀러는 의식적으로 인간의 진화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그것을 동기 삼아 연구를 진행시켰다.   


아마 멀러도 처음에는 전도 양양한 젊은 과학자였을 것이다.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벼연구소(Rice Institute)에서 3년을 보낸 후 서른살 때이던 1920년에 텍사스대학 교수(후에 정교수가 됨)가 되어 1932년까지 재직했다. 이 12년은 멀러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한다. 1926년 X선을 사용해 유전적 돌연변이를 유도, 유전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멀러의 실험은 돌연변이가 염색체의 파괴와 유전자의 변화로 생겨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독일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로 옮겨갔다. 1년 뒤인 1933년에는 레닌그라드를 거쳐 모스크바 유전학연구소로 간다.  


텍사스 유전학자가 모스크바에 간 까닭은? 


그는 소련이 매우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곳이라고 생각했고, 모스크바에서 유전학과 우생학 연구를 잘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 과학계는 이미 경직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멀러는 당의 공식 정책에서 소외되고 만다.

멀러는 억압을 받기 시작했다. 1936년 멀러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인간유전학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어겼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1937년 마침내 소련을 떠나 영국 에든버러 동물유전학연구소에서 3년을 보내고 1940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매사추세츠의 에머스트 대학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다가 1945년 간신히 인디애나 대학교에 자리를 얻었다. 왓슨이 멀러를 본 것은 인디애나에서였다.

앞서도 언급했듯, 멀러는 방사선이 생물유전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고, 산업시설과 방사선으로 인한 돌연변이가 인간 유전자 풀에 축적됐다가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지금 우리는 이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다음 세대에게 다가올 방사능의 위험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앞장섰고 관련된 논쟁에 적극 참여했다. 또 그는 말년에는 우생학 반대론자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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