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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컬 알리' 처형 계기로 본 사담 잔당들의 말로

딸기21 2010. 2. 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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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쿠르드족 대량학살을 주도한 사담 후세인의 측근 알리 하산 알 마지드(66)가 얼마전 처형됐다. 화학무기를 사용, 쿠르드족을 학살했다 해서 서방측으로부터 ‘케미컬 알리’라는 별명으로 불린 인물이다. 케미컬 알리의 처형으로, 후세인 정권의 핵심인물들은 거의 제거된 셈이 됐다.


쿠르드·시아파 학살 ‘케미컬 알리’ 처형


이라크 정부는 알리가 지난 17일 처형됐다고 발표했다. 알리는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 태생으로, 후세인과 동향에 사촌이다. 후세인의 오른팔이 되어 쿠르드족과 시아파 등 반대세력 탄압에 앞장섰다. 


그에게 ‘케미컬 알리’라는 악명을 안겨준 것은 1988년의 할라브자 학살사건이다. 후세인 정권은 80년대 후반 이란과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쿠르드족에게 이란과의 내통죄를 뒤집어씌워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이라크군은 할라브자에 사린과 VX 등 유독성 화학물질을 살포해 5000명 이상의 주민들을 살해했다. 이 작전을 주도한 것이 알리였다. 그는 쿠르드 자치정부의 현 대통령인 마수드 바르자니의 일족 2000여명을 학살·추방하기도 했다.

(후세인 정부는 쿠르드족 학살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유엔은 인도적 위기에 처한 쿠르드족을 보호하기 위해 이라크 북부에 보호구역을 설정했다.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 이라크군 전투기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남의 땅에 멋대로 설정한 비행금지구역은 주권침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후세인 정권의 쿠르드족 학살이 워낙 잔혹했기에 어느 정도나마 국제적인 ‘동의’가 이뤄졌고, 힘에 밀린 후세인 정권도 이에 동의했다. 유엔의 보호구역이던 지역은 현재 이라크 내 쿠르드 자치지역이 돼 있다. 알리가 주도한 말살작전으로 쿠르드족 18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91년 걸프전 뒤 후세인 정권은 남부 시아파 주민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들이 반후세인 봉기를 일으키자 정권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들의 선동”이라며 유혈진압했다.
탱크와 불도저를 앞세운 진압작전으로 시아파 10만명 이상이 살해됐다. 알리는 99년에는 바그다드의 시아파 거주지역인 사드르 시티와 남부 이슬람 성지 나자프에서 수십명의 시아파를 살해했다. 2003년 8월 미군에 붙잡힌 알리는 이라크 특별재판소에서 네 차례나 사형을 선고받은 뒤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후세인 측근들 줄줄이 형장으로

2003년 이라크를 공격하기 전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하지만 WMD 의혹에 대한 반론이 잇달아 제기되자 마지막에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쿠르드족 학살 등 반인도 범죄’였다. 


미군은 개전 두달 만인 2003년 5월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 후세인 정권 고위인사들에게 트럼프 카드 형식의 등급을 매겨 현상수배 명단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최고권력기구였던 혁명평의회 간부들과 바트당 지도부, 군과 정보기관 수장들이 대거 포함됐다. (다소 장난스럽게까지 보이는 이 ‘트럼프 수배리스트’는 미국 내에서도 거센 비판을 받았다. 부시 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국방장관 등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꼽은 패러디 트럼프카드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가장 극악한 범죄자로 꼽은 것은 물론 후세인이었다. ‘스페이드 에이스’인 후세인은 2006년 말 처형됐다. 후세인 바로 아래 ‘스페이드 킹’에 놓였던 것이 케미컬 알리였다.


클럽(클로버) 에이스였던 후세인의 둘째 아들 쿠사이는 2003년 7월 숨졌다. 후세인 정권의 비밀정보기구들을 이끌었던 쿠사이는 냉혹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는 모술에 숨어있다가 미군에 들켜 형인 우다이, 14살 아들 무스타파와 함께 사살됐다.

1991년부터 2003년 후세인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12년 간 부통령을 지낸 타하 야신 라마단은 최후까지 전쟁을 피해보기 위해 부시 행정부와 접촉, ‘타협’ 가능성을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라마단은 2003년 8월 쿠르드족 지역인 북부 모술에 숨어 있다가 쿠르드 반군 조직인 쿠르드애국동맹(PUK) 게릴라들에게 붙잡혀 미군에 넘겨졌다. 특별재판소에 회부된 라마단의 혐의는 후세인과 마찬가지로 1982년 중부 두자일 마을 시아파 주민 학살범죄를 주도했다는 것이었다. 


후세인은 이 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됐지만 라마단에게는 무기징역형이 내려졌다. 하지만 2006년 말 이라크 고등법원은 “라마단의 형량이 약하다”면서 특별재판소에 환송했고, 결국 라마단도 다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후세인이 처형되고 넉달 뒤인 2007년 3월 처형됐다.


후세인이 90년 쿠웨이트 점령 뒤 ‘쿠웨이트 주지사’로 임명했던 아지즈 살레 누마도 계속 재판을 받고 있다. 91~93년 총리를 지낸 모하마드 함자 앗 주바이디는 미군 침공 한달만인 2003년 4월 붙잡혀 미군에 구금됐다가 이듬해 말 지병으로 숨졌다. 후세인과 아버지가 다른 동생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는 2007년 1월 처형됐다.


끝나지 않은 과거청산, 그리고 논란

걸프전 당시 외무장관을 지내면서 ‘이라크의 입’으로 불렸던 타리크 아지즈 전 부총리는 아직 살아 있다. 2000년대 들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후세인과의 불화설, 숙청설 등이 돌기도 했던 아지즈는 바그다드가 함락된 뒤 미군에 체포됐는데, 스스로 투항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그가 후세인을 배신, 미군에 협력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아지즈는 현재 바그다드의 캠프 크로퍼 미군기지 내 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으로 법정에 나타난 것은 지난해 3월이었다. BBC방송은 아지즈가 지난 17일 뇌졸중을 일으켜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보도했다. 


후세인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쿠사이와 함께 공안기구들을 움직였던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는 2003년 6월 체포돼 케미컬 알리, 아지즈와 함께 재판을 받았다. 아직 처형되지 않은 채 수감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가 미군에 점령된 뒤 바트당 잔당과 수니파 저항세력을 이끌고 반미 무장투쟁을 벌여온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전 혁명평의회 부의장은 아직도 체포되지 않았다. 그의 생사는 미군의 최대 관심사다. 


알 두리는 2004년 9월 미군은 티크리트 근교의 한 마을에서 알 두리를 잡았다고 발표했으나 조사결과 본인이 아닌 친척 중 한명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듬해 11월에는 알아라비야TV와 BBC방송이 알 두리 사망설을 보도해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한달 뒤 요르단 잡지 알 마지드에 버젓이 살아있는 알 두리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미군은 그의 현상금을 1000만 달러로 올렸다. 2008년까지 알자지라 방송, 시사주간 타임 등을 통해 건재를 과시하던 알 두리는 그해 7월 알아라비야TV와의 인터뷰를 끝으로 행방이 묘연하다.

이라크 정부는 후세인 정권의 핵심인물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민심을 잡을 수 없다면서 반인도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인사들을 계속 처형하고 있다. 하지만 후세인 처형때부터 제기된 ‘사형 논란’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사형제 자체에 대한 찬반 논란은 논외로 하더라도, 후세인 정권의 반인도범죄를 규명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지적이다. 숱한 범죄를 저지른 후세인을 두자일 학살 1건으로 기소해 결국 처형해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현 이라크 정권은 시아파-수니파-쿠르드족으로 구성돼 있다. 취약한  연립정권이 과거사 규명 과정에서 제기될 혼란과 균열을 두려워해 진상을 밝힐 기회를 스스로 막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위클리경향> 2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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