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지방 끝쪽에 있는 수도 타슈켄트의 공항에 내려 유서깊은 오아시스 도시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를 지나 서쪽 끝 아랄해(海)까지 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멀리 파미르고원의 빙하에서 발원한 강아무다리야가 수천 ㎞를 흘러 드넓은 사막과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면서 황무지의 생명줄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무다리야가 끝나는 지점은 한때 세계에서 4번째로 큰 호수였던 거대한 내륙의 염호(鹽湖) 아랄해.그러나 지금은 강줄기가 거의 끊겨 말라붙은 소금땅이 되어버린 곳이다.
사막의 배들
지난달말 아랄해에 면한 항구도시였던 우즈베크 서북부 무이낙 마을을 찾았다. 한때는 어선 수십척이 마을 앞까지 차오른 물가에 정박해 있고 러시아계, 카자흐계 어부들과 생선 가공공장 노동자들 6만명이 북적거렸다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이 곳에서 한때 바다라 불렸던 호수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늘고 낡은 수도관들이 힘겹게 집과 집을 이어주고 있는 한적한 읍내에서 몇백m만 나가면 덤불이 무성한 사막이다. 염호였던 아랄해가 말라붙은 뒤 남은 것은 소금이 허옇게 말라붙은 잡초 투성이 너른 땅 뿐이었다.
농사도 지을수 없는 짠내 나는 사막에는 버려진 어선들만 남아 있었다. 녹슨 어선들이 모래언덕에서 석양을 배경삼아 서있는 모습은 `흉물스럽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한때는 어민들이었던 주민들 집 마당에도 낡은 낚싯배들은 어김없이 구석자리를 차지한 채 남아있었다. 이곳이 더이상 어촌이 아니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기에, 어촌의 기억을 연상시키는 낚싯배와 어망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이곳 주민들에겐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한때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호수였던 아랄해는 1970년대 이래 물이 급속도로 줄어들어 지금은 거의 마른 땅으로 변했다. 사막이 되어버린 아랄해 부근 옛 항구도시 무이낙에 버려진 배들이 그대로 놓여져 있고, 마른 땅에 허연 소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라진 어촌
열 자녀와 손자손녀 열한명 대가족이 함께 사는 집은 그다지 빈한해 보이지는 않았다. 집 한쪽엔 위성 수신용 접시안테나가 있고 카르위 안에는 최신식 오디오세트를 갖춰놓고 있었다. 겉보기에 우즈베크의 다른 농촌마을 집들과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아랄해 어부의 자부심을 안고 살아온 알리 집의 수입원은 물론, 삶의 구조는 과거와는 달랐다. 아랄해가 마르기 전 이곳 어획고는 옛소련 내륙지대 주민들의 생선 공급원이 돼주었고, 1930년대 기근 때에는 숱한 이들의 생명줄이 되었다고 했다. 알리 집도 고기잡이로 먹고 살았다.
알리의 아들 다섯 중 넷은 외국에 나가 일하고 있다. 무이낙 사람들은 대부분 알리네 아들들처럼 계절 노동자, 월경(越境) 노동자가 되어 1년중 10달 이상을 외국에서 보낸다. 학교 건물도, 마을회관도 제법 번듯하게 구색을 갖추고 있는 무이낙 읍내는 젊은 남자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행인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 한적한 풍경은 폐촌을 방불케할 정도였다.
마을 중심에 있는 문화회관 한켠에는 아랄해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다. 전시실 벽에는 무이낙에 살던 타타르인 화가가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림 속 무이낙의 집들 바로 옆에는 출렁이는 바다와 항구를 메운 어선들이 있었다. 고기잡이의 달인들로 소련 정부의 포상을 받았던 `어업 영웅'들의 초상화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막이 되어버린 무이낙의 모습, 버려진 어선들을 그린 잿빛 캔버스화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전시실 구석 어망과 낚싯배는 시골 박물관의 유물로 전락한 아랄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한 주민은 "전에는 이곳에서는 매주 목요일을 `물고기의 날'로 정해 아랄해 고기를 기념했는데 1991년부터 그 날도 없어졌다"며 아쉬워했다.
물줄기를 잘라낸 소련
아랄해의 수난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초. 우즈베키스탄과 접경한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은 천연가스가 풍부하고 목화 생산량이 많은 지역이었다. 소련은 `하얀 금(金)'으로 불리던 수출용 목화를 생산하고 천연가스를 채굴하기 위해 아랄해를 향해 흐르던 아무다리야의 강줄기를 돌려 거대한 운하를 만들었다. 투르크멘으로 향하는 중앙아시아 최대의 이 운하는 길이가 1300㎞에 이른다.
소련 정부는 사막 가운데 덩그러니 자리잡은 짠 호수 아랄해를 `자연의 실수'로 여겨, 말라붙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았다. 냉전 시대 소련에게 환경문제는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소련은 남아랄해 가운데 있는 보즈로즈데니야 섬에 생물학무기 연구시설을 만들어 탄저균이 담긴 드럼통들을 매각하기도 했다.
아랄해에 면한 항구도시였던 우즈베키스탄의 무이낙은 지금은 활기가 사라진 한적한 시골마을로 변해버렸다. 한 주민이 양을 데리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수도관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고 있다.
알리는 "한때는 아랄해에 큰 항구가 세 곳이나 됐다"면서 "물이 마르기 전에는 물고기도 많고 종류도 많아 생선 가공공장들이 24시간 돌아갔었다"고 회상했다. 그랬던 아랄해가 1971∼92년 갑자기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무이낙 주민들은 연유를 몰랐다고 한다.
"물은 줄어드는데 소련이 물을 딴데로 돌리는 줄로는 상상도 못했다. 운하를 파내 다른데로 물 다 돌린 뒤에야 우린 알았다."
우즈베크가 독립한 뒤에도 아랄해는 돌아오지 않았다. 1970년 아랄해로 유입되던 강물의 양은 1초당 3000∼5000㎥였지만 지금은 15㎥에 불과하다. 현지 공무원은 "아랄해가 완전히 마르지 않을 정도로만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지금 2개로 갈라진 아랄해 중 북쪽 호수는 카자흐스탄에, 남쪽은 우즈베키스탄에 속해 있다. 우즈베크 쪽 남아랄해는 2003년 다시 수면이 낮아져 동서로 나뉘었다.
3개가 된 호수의 총 면적은 1만7160㎢로 40년 전의 4분의1에 불과하다. 카자흐 정부는 2005년 다이크코카랄이라는 대규모 댐을 지어 북쪽에서 아랄해로 흘러오는 또다른 강 시르다리야의 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카자흐 정부의 노력으로 북아랄해쪽은 최근 수면이 올라가 수상생물이 늘고 있다. 카자흐의 항구도시 아랄스크에 접했던 호안선은 100㎞나 후퇴했다가 지금은 25㎞ 지점까지 되돌아왔다.
문제는 남아랄해. 여전히 면화에 외화 수입을 의존하고 있는 우즈베크 정부는 사실상 아랄해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다리야는 계속 관개수로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아랄해는 해안선이 수백㎞씩 아래로 내려갔다.
1994년 1월 카자흐, 우즈베크,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아랄해 주변 5개국은 연간 예산의 1% 씩을 갹출해 아랄해복구를 위한 기금, 일명 `아랄 펀드(Aral Fund)'를 만들었다. 그러나 우즈베크 정부는 말라가는 아랄해를 그대로 두고 유전, 가스전 개발에 더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8월 우즈베크 정부는 국영 에너지회사 우즈베크네프테가즈, 러시아 루크오일, 한국 석유공사,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CNPC),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로 구성된 컨소시엄과 협정을 체결해 아랄해 에너지 개발에 본격 나서기로 했다. 남아랄해는 과거의 어촌도시들에서 호안선이 북쪽으로 200㎞ 이상 후퇴한데다, 그나마 우즈베크 정부가 얼마 안 남은 호수 주변지역의 출입까지 통제하고 있어 `숨겨진 호수'가 돼버렸다.
2006년 세계은행이 아랄해 보전 계획에 본격 착수했지만 대부분의 지원은 카자흐가 적극 추진하는 북아랄해 복원에 치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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