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53

에메 세제르,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56년 동안 시장직을 수행한 그는 나를 오래된 시청 건물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맞았다. 처음 만난 이 사람은 아주 정중했다. 또한 주의 깊은 반면 데면데면하기도 했고, 소심한 반면 친근하기도 했으며, 매사에 관심을 가진 반면 의심이 많기도 했다. 자기와의 대담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예전히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믿고 싶지 않아 했다. 또한 런던에 있는 한 대학에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그의 저작들, 특히 과 을 연구하고 인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프랑수아즈 베르제라는 포스트식민주의 학자가 에메 세제르를 만났다. (변광배·김용석 옮김. 그린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담은 대담집이다. 책의 분량은 매우 짧은 데다가, 뒷부분 절반..

딸기네 책방 2017.03.19

로널드 드워킨,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로널드 드워킨. 홍한별 옮김. 박상훈 해제. 문학과지성사 아이러니다. 조지 W 부시가 재선될 무렵에 나온 책이다. 모든 이슈에서 진영논리로 갈라진 미국을 바라보며, 양 진영 간의 '대화'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불가능함을 설파한다. 그리고 그 대화의 기본이 되는 전제들을 조목조목 짚는다. 동성애, 세금, 낙태, 종교 등 여러 '삶의 가치관'을 놓고 충돌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과연 이런 학자의 말을 누가 듣겠냐마는. 애당초 책은 저자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막무가내 보수파'들의 논점을 하나씩 깨뜨리는 식으로 돼 있다. 한쪽은 옳고 한쪽은 그른데, 이쪽이 옳다 생각하는 사람이 저쪽을 향해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야 민주주의로 갈 수 있어' 하면서 설득하는 꼴이다. 그러니 그의 말이 아무리 근거가 ..

딸기네 책방 2017.02.12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니컬러스 에번스. 김기혁·호정은 옮김. 글항아리. 우비크어는 독자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캅카스 북서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하나다. 계속된 무력 충돌에서 패배하면서 우비크인들은 터키로 집단 망명했고, 우비크족은 점점 우비크어 대신 터키어를 쓰거나 체르케스어Circassian와 아바자어Abaza 등 망명하여 정착한 캅카스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1930년, 흩어져 살고 있는 우비크족 원로들이 저녁마다 터키 삼순Samsun에 모였다. 기도 시간에 맞춰 말을 달려 와서는, 마당에서 저녁을 먹고 잠을자고 새벽이 되기 전에 자기네 땅으로 돌아갔다. 원로들이 저녁마다 그곳에 온 것은 프랑스의 캅카스어 언어학자 뒤메질George Dumézil과 함께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몇 ..

딸기네 책방 2017.02.12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일본 젊은이들의 외침

일본에는 '데모'가 별로 없다. 사람들은 조용하고, 정치에 무관심하며, 부당한 일이 벌어져도 나서서 항의하길 꺼리고, '튀는 것'을 극도로 겁내고, 순응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통상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이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1960년대 전공투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변혁 운동이 분명 있었다. 적군파같은 급진주의자들까지 있었다. 일본엔 예나 지금이나 '공산당'이 있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극좌파가 허용된다는 것뿐 아니라, 좀 다른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풀뿌리 흐름, 비판적 지식인들의 잔잔하지만 울림 있는 목소리는 한국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 않다. 마루야마 마사오같은 인물이 공개적으로 전쟁을 비판했던 것이나 니시카와 나가오처럼 민족주의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비판을 가하는 사람..

딸기네 책방 2017.02.08

2005년의 '문학의 해' 결심을 되돌아 보니

4권 변신.시골의사 6권 허클베리 핀의 모험 7권 암흑의 핵심 8권 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 11권 인간의 굴레에서 1 12권 인간의 굴레에서 2 13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18권 고리오 영감 19권 파리대왕 21권 파우스트 1 22권 파우스트 2 25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6권 이피게니에/스텔라 27권 다섯째 아이 29권 농담 31권 아메리칸 32권 양철북 1 33권 양철북 2 36권 마담 보바리 37권 거미여인의 키스 40권 독일어 시간 1 41권 독일어 시간 2 42권 감옥에서 보낸 편지 43권 고도를 기다리며 45권 젊은 예술가의 초상 46권 카탈로니아 찬가 47권 호밀밭의 파수꾼 48권 파르마의 수도원 1 49권 파르마의 수도원 2 51권 황제를 위하여 1 52권 황제를 위하여 2..

칼 폴라니,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칼 폴라니. 홍기빈 옮김. 길. 연말에 잼나게 읽은 책. 모두모두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냐...고 묻는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서아프리카에 관심이 쪼마만큼 있으니 아무래도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다호메이 지역의 구체적인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이런 식의 지역학 연구, 이런 식의 비교경제학 방법론에 관심을 갖고 본다면 꽤 재미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낯설어도 너무 낯선 서아프리카 어느 구석탱이의 지나간 옛 자취라는 점이 아무래도 걸린다. 왜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역사 속에는 다른 화폐, 다른 시장, 다른 체제도 많았다는 걸 알기 위해서'라는 앙상한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앙상하..

딸기네 책방 2017.01.18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이반 일리치. 권루시안 옮김. 느린걸음 지난 가을에 라카페 들렀을 때 기어이 책을 사고야 말았다. 표지도 이쁘고 질감도 좋고. 올해의 첫 책은 사실 이걸로 하고 싶었으나 어쩌다 보니 다른 책들에 밀렸다. 일리치의 책들은 나오는대로 사 모아야지. 경제학에 가려진 삶의 축복 저는 필요라는 개념의 당위성을 해체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노동보다도 더 근래에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라고 정의하는 그것은 과거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필요와 그에 상응하는 과거의 그것은 사회의 수많은 전제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너무나 달라 서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인식론적 단절이 우리가 '필요'라 부르는 것이 등장한 시점입니다. 1..

딸기네 책방 2017.01.17

윌리엄 이스털리, 세계의 절반 구하기

세계의 절반 구하기 윌리엄 이스털리. 황규득 옮김. 미지북스 오래 전에 빌 게이츠의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 소개를 파이낸셜타임스에서 봤는데, 그 중 한 권이 이스털리가 쓴 이 책이었다. 개발경제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이라 해서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번역본이 없었고, 교보문고에서 영어로 된 책을 들어다놨다 반복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얼마 전 교보에 다시 들렀다가 이스털리의 또 다른 책 가 나온 것을 봤다. 결국 휴가 가기 전에 두 권 다 샀다. White Men's Burden이 원제인 이 책, 는 이미 2011년에 번역본이 나왔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펼치게 됐다.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기는 했으나 재미로 따지면 별점 2개 수준. 중언부언이 많고 설명도 부실하다. 일화들은 뜬금없고, 온통 비판으..

딸기네 책방 2017.01.15

우치다 타츠루, 하류지향

하류지향우치다 타츠루. 김경옥 옮김. 민들레 우치다의 책은 두 번째이고, 집에 한두 권 더 있는 듯 싶다. 어떻게 보면 지식인 꼰대 아저씨인데 그가 하는 진심 어린 말들이 콕콕 박힌다. '옛날엔 그래도 이렇지는 않았어, 가난했지만 희망과 열성이 있었어, 요즘엔 모든 게 돈 위주로만 돌아가서 너무 심해'라고 이 아저씨 혹은 할아버지는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폭력적인 노친네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은, 지금 우리 모두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모든 게 돈 위주로만 돌아가서 너무 심하다는 걸. 이 시대에 절망하고 있기에, 이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새겨듣게 되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배움의 장에 서게 되면 첫 질문으로 "이걸 배우면 뭐에 도움이 되나요?"라고 묻는다. 아주 냉정하고 어떤 면에서는 비즈니스 냄..

딸기네 책방 2017.01.07

위대한 독재자가 되는 법?

위대한 독재자가 되는 법?미칼 헴. 박병화 옮김. 에쎄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고 재치있지도 않았다. 신랄하게 비꼬아서 쓰려고 한 모양이지만, 독재국가에서 일어난 학살과 인권침해는 그렇게 웃어 넘길 일이 아니었다. 라이베리아-시에라리온 내전을 생각하면 그곳 군벌들의 잔혹함과 그곳 사람들의 비극을 유머로 넘길 수가 없다. 두번째, 제3세계 정치구조를 딱 2mm 분량으로 얄팍하게 다루면서 독재자들의 작태를 우스개로 삼는 것이, 제3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까 싶다. 결과적으로 이런 종류의 글이 '아프리카 후진국들 꼬라지가 그렇지'라는 느낌만 굳히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세째, 르완다의 폴 콰가메나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는 '아프리카의 무식한 독재자들'로 쉽게 치부해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4..

딸기네 책방 2017.01.03